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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73화 (73/152)

〈 73화 〉 시간 역행Ⅱ

* * *

돌덩이가 날아오지 않는 사각으로 몸을 피하곤, 벽을 부숴 디안을 그 안에 가두고 중얼중얼 주술을 외웠다.

˚ 수호자(??者) ­ 바람의 정령. ˚

휘이이이­

허공에 새하얀 바람이 덩어리처럼 뭉치더니 흩어졌다.

그곳에는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참새가 부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말했다.

“불렀어? 불렀어? 어라? 어째 좀 늙은 것 같은데?”

[시끄러워. 넌 이 여자애나 지키고 있어.]

“시끄럽다니! 시끄럽다니!”

하여간 더럽게 시끄러워. 중얼거리곤 시계를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1분. 멍하니 시계에만 시선을 고정하곤 몸에 힘이 풀린다는 걸 느꼈다.

‘......’

끝났다. 디안은 기절한 채고, 복귀는 커녕 영락없이 죽을 신세다.

20분이 이리도 빡빡할 줄이야. 이상한 데 시간을 많이 지채한 게 탓일까, 아니면 디안이 탓일까.

이유를 따져보아도 모든 결론은 같았다.

과거에 갇혔다. 달라지는 건 없다.

[줄행랑을 치다니! 더러운 도마뱀, 목을 꼬챙이처럼 뚫고선 주방장에게 넘겨주마!!]

[......다 끝난 김에 너부터 데려가줄게.]

잃을 게 없어졌다. 바비룬의 몸이 꾸득꾸득 크기를 부풀린다.

방을 다 덮을 크기에서 한 층을 다 덮을 크기로. 중급 바람의 정령이 디안을 바람으로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무사했으나 몸이 밀리는 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무너지는 건물 외벽과 함께 마왕성 구석으로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뭣이?! 아직도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나도 이젠 모르겠다. 다 같이 죽자.]

쩌적­ 쩌저적­!

쿵­ 쿠르르릉­

건물이 과자처럼 부서진다. 그 중심에는 커지길 멈출 줄 모르는 바비룬이 있었다.

알로켄은 당황하며 거리를 벌렸다. 날개를 퍼덕이며 저 멀리에서 무너져가는 마왕성을 허망하단 표정으로 바라봤으며, 본능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너, 너는 누구냐.]

[나? 집 잃은 미아. 돌아갈 곳이 없어. 어떡할까?]

[네놈은 누구냐고 물었다!!]

[알 것 없어.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지 뭐.]

현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에이브(AYV) 신살 계획은 끝났으니.

크허어어어­!!!

하늘을 향해 쏘아낸 우렁찬 고함과 함께 구름이 갈라진다.

마왕성은 바비룬의 몸에 의해 무너진다. 풍전등화처럼 건물이 사라지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고, 알로켄이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마기를 둘러 달려들었으나, 휘두르는 꼬리에 맞은 것만으로도 단박에 나가떨어졌다.

[맙소사!! 저 괴팍한 놈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참모장님!! 군단장님!!!]

[크허어어어어­!!]

알로켄의 고성이묻힌다. 마왕성의 몬스터들이 죄다 뛰쳐나와 바비룬을 바라봤으나 이들 중 누구도 바비룬에게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괴물.’

토텔리만이 검을 고쳐잡고 바비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단숨에 도약하여 베어낸다. 그의 몸을 타고 난도하여 죽이리라.

생각하곤 움직였다. 철컹­ 콰과과과­!!

묵직한 금속음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오러.

그 두 개가 막 합쳐져 하나의 기술이 되려는 가운데­

[내가 막는다. 모두 물러서라.]

마왕성 전체에 울리는 웅장한 목소리에 토텔리는 멈칫했다.

[칩입자여, 네 명을 네가 재촉하는구나.]

아는 목소리, 바비룬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는 참모장 메이블 토진이다. 네놈을 죽일 이름이니 기억해두도록.]

챱챱챱­

바비룬의 몸을 사방에서 노리는 수십 개의 트럼프가 빛을 뿜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바비룬의 몸이 사라졌다.

콰아아앙...!!!

건물 한 층을 지탱하던 괴물이 사라지자 그 위층이 떨어져서 아래층을 강타했고, 성 전체가 뒤흔들렸다. 하지만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한 모습만을 남겼다.

*

“요란하게도 저질렀군. 이것도 줄이 지시한 내용인가?”

“...미안하게 됐다.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었거든.”

참모장의 집무실, 디안은 소파에 담요를 덮은 채 곤히 잠들었고, 메이블의 옆 의자에는 금발의 미녀이자 마왕인 단탈리온이 있었다.

바비룬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에이브(AYV)와 실렉티스의 존재를 안 순간부터 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이 몸을 무겁게 했던 탓이다.

“지금도 미안하고... 과거에도 미안했고...”

바비룬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메이블은 귀가 좋았다.

“과거라면, 내게는 미래를 뜻하는 건가?”

아차 싶었으나, 이미 들은 순간부터 모른채하기에는 양심이 찔려온다.

입을 다물까 하다가 짙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비룬답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이다.

“...귀신 같네. 맞아, 너한테는 미래지.”

“네놈 세계의 나는 네놈들의 손에 죽었나보군.”

“그렇게 됐다. 봐준 것도 모르고 신나게 덤벼들었지. 멍청하게.”

“하기야, 네놈은 신 용사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했지.”

“이런 시발 새끼가. 아니, 미안해.”

“푸하하!! 입 더러운 걸 보니 주술 용사임은확실하군!”

호쾌하게 웃는 메이블을 보자 팔에 닭살이 돋았지만 다행히도 메이블은 금세 냉정을 되찾곤 말했다.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다. 이곳에서의 나는 방법을 갈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사천왕들 중 네놈들 손에 죽은 자는 아직까지 없어. 그럴 생각도 없고.”

“하지만 죽었잖아? 과거는 바뀌지 않아.”

“멍청한 소리. 평행 우주를 아는가?”

“평행 우주? 동등한 우주 이런 건가?”

“역시! 네놈은 주술 용사가 확실하다! 무식의 극을 달리는군!”

“싸가지 없이 말하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해. 가뜩이나 기분 더러우니까 콱 죽여버리기 전에.”

“하하, 무서운 소리 마라. 지금이라면 날 실력으로 죽이는 게 가능하잖나? 너무 사나운 네놈에 대한 존중 좀 하자면 확실히 현재 주술 용사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마나가 느껴지는구나. 아니, 주술의 자원으로 칭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미안하게도 주술에는 문외한이라서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평행 우주가 어쨌는지나 설명해.”

“네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자면... 음...”

저 말이 본인을 무시한다는 건 너무나도 극명확한 사실이었기에 욱했으나 또 반박하고자 입을 열면 메이블은 호쾌하게 웃을 것만 같다.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메이블이 이토록이나 감정이 풍부한 놈이었던가? 그가 내비치는 감정은 분노와 슬픔 말고는 확인한 적 없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니,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네놈이 내게 미안하단 말을 한 순간부터 이곳의 미래는 네놈의 세계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얘기다.”

아직 설명이 부족했다.

“영향력, 타임 패러독스 블라블라. 나도 시간 역행 마법에 대해 연구 좀 해봤지. 다 부질없다. 중요한 건 한 가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것. 간단하게 말해주지. 오늘 내가 폭식을 하는 바람에 배가 아파 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면? 그 때문에 내일의 컨디션이 망가져서 업무가 밀렸다면? 그 밀린 업무가 계속 밀려 마왕군에서 불만론자가 생겼다면? 그 불만론자를 필두로 마왕군이 내부에서 붕괴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사천왕 목을 취했다면? 너희 신 용사가 존재 의의를 잃고 허망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에이브(AYV)가 세계에 환멸을 느껴 모든 인간을 죽이기로 했다면? 그렇다면 내 폭식 때문에 세계는 멸망하는 셈이지.”

“너무 개소리 아니야?”

“평행 우주, 패러랠 월드. 그 존재 의의가 이렇다. 작은 사소한 행동 하나가 여러 갈래의 미래를 만들고, 그 가능성의 모든 게 평행 우주다.”

“어쩌라는 건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다. 어차피 나와 얘기를 나눈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고 있으니 네놈들의 손에 내게 죽을지도 불확실하다는 거지. 이 세계에선 내가 네놈들의 목을 단박에 잘라낼지 어떻게 아는가? 혹은 에이브(AYV)를 성공적으로 죽여낼지도 모르지. 내일 점심에 내가 무얼 먹을지도 잘 모르는데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네놈은 이 시간대가 과거라고 생각되겠지만, 네놈에게도 이 또한 미래이다. 너는 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있고, 서서히 늙어간다. 과거로 시간을 역행했다고 한들, 역행하기 전 시간대가 지금 네놈의 미래는 아니야. 너는 미래로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말이지.”

“너무 어려워. 간략히.”

“신경쓰지 마라. 영향력이든 뭐든.”

“오케이. 그래서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두 가지였다.

디안을 깨워달라는 것.

미래든 과거이든 아무튼 이 다른 시간대에 갇혔으니 원래 있던 시간대로 보낼 방법을 찾아달라는 것.

“그건 곤란하지. 좌표의 문제다. 배송지 모르는 택배가 어떻게 출발하겠는가?”

“아, 너도 지구인이었지.”

“요점 흐리지 마라. 결국 내가 네놈들을 네놈들의 시간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는 거다. 모든 건 저 여자애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지. 악쿤 토든... 아니, 정윤상도 그를 알고 있을 거고.”

“세상에 본명도 알아? 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럼 잘나신 우리 메이블 씨는 이름이 뭐냐?”

“분명 요점 흐리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쩨쩨한 새끼.”

“깨우는 건 도울 수 있다. 느껴지는 마나만 봐도 보통 여자애가 아니란 건 알겠군. 어라, 아콜드의 서까지? 네놈들 신 마왕군에서도 핵심 전력이겠군. 누구의 부하지? 정윤상?”

“요점은 너도 흐리잖아 내로남불 새끼야. 참 신기해. 참모장이라는 놈들은 왜 하나같이 개 같은지 모르겠어.”

“정윤상이 참모장인가? 호오, 마법 용사가 참모장을 하는 건 당연지사인가. 아니지, 호칭의 문제겠지. 굳이 참모장이라 지칭할 필요는 없으니. 어쩌면 정윤상이 나를 많이 닮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어.”

메이블은 말이 참 많았다. 중급 바람 정령보다도 훨씬.

저 쉴 새 없이 놀리는 아가리를 어떻게 해줄까 고민하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디안은 악쿤의 제자라고 밝혔다. 그러자 고개를 주억거리곤 말했다.

“괴물 같은 여자애를 키우는 군. 근데 20분이 어쨌다고? 너는 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줄이나 정윤상이나 얘가 천재라던데 네가 보기에도 그래?”

“천재는 무슨, 괴물이지. 서클이 고작 6인데도 불구하고 시그니처를 완성했다? 가히 에이브(AYV)도 탐낼만한 괴물이다. 줄도 얼마 안 가 이 여자에게 따라잡힐 운명이다.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노젤루스도 혼자서 죽여낼 수 있었겠군.”

“...그래,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는 알겠어.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시간 차원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거다. 더군다나 아콜드의 서까지 있으니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겠군. 아, 그럼 서클이 6이 아니라 5겠군? 이건 2권이니 말이야.”

“몰라, 시발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어. 줄은 얘가 20분이 지나면 시간 차원문을 마나가 부족해서 못 연다고 말했어. 그게 틀렸다는 거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실제로 이 여자애 혼자서는 열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내가 마력을 좀 빌려주면 어려울 것도 없다.”

결국은 된다는 거잖아? 한시름 놓고 말 많은 메이블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디안을 신기하다는 듯 살짝 건드리는 단탈리온이 보였다.

“어머, 제게 뭐가 묻었나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 눈을 차마 마주하긴 어려웠다. 그녀는 마지막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죽었고, 그 영상은 평행 우주라는 어려운 얘기를 들어도 머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아냐, 그냥 좀 신기해서.”

고개를 다시 돌렸다. 메이블은 과자를 하나 우적거리며 바비룬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맛이 좋아. 하나 먹으면서 들어라.”

“고맙다. 그래서.”

일지는? 그리고 줄이 알려준 시간대가 메이블이 신살을 시도했던 시간대인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여러 가능성만 세워두고 시도조차 않았다.”

“뭐?”

“생각해보니 ‘않았다’라는 표현은 잘못됐군. 시도조차 못했다.”

“그건 뭔 소리야. 에이브(AYV) 안 죽일 거야?”

“누구보다도 죽이고 싶지. 일지도 건네줄 거다. 하지만 별 도움은 안 되겠지.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만 잘 새겨듣는 게 백 배는 나을 거다.”

메이블은 과자를 하나 더 꺼내 잘라먹곤 잠시 고개를 돌렸다.

파스스... 그의 손에 들린 과자 조각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에 시커먼 화염이 엉겨붙어 회색 연기를 내뿜었다.

“풍전등화. 혹은 믿는 도끼에 발 찍히는 법. 배신은 뼈아픈 법이지. 아니, 배신이라는 표현도 잘못됐어. 오늘따라 언어 선택이 부적절하군. 사과하지.”

“너 말 참 많다. 개소리할거면 일지나 쳐 내놔. 돌아가게.”

“...맞아, 말을 많이 뱉는 건 내 나쁜 버릇이야. 지금껏 내가 한 얘기는 중요치 않으니 모두 잊어도 상관 없다. 다만 지금 하는 말은 뇌리에 선명히 새겨라. 정말 간략하게 말할테니.”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본래 용사는 세 명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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