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시간 역행Ⅱ
* * *
“아.”
줄의 짧은 감탄사. 다르칸과 악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이미 난감하단 표정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야. 괜찮겠지.”
줄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거야. 괜찮겠지 암암.’ 뭐가 괜찮다는 건지 눈치껏 알아채기 어려웠다.
‘전송 위치는 메이블한테 말 안 했었는데... 뭐. 명색이 전 용사인데...’
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곤 움직였다.
*
[꺼져 벌레 새끼들아!!]
우렁찬 포효, 백색과 검은색 무늬로 얼룩진 거대한 호랑이가 고함치자 충격파가 일며 마왕성 전체가 뒤흔들렸다.
그 고함에 나가떨어진 건 조그마한 독벌레들이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가고일이 이곳을 수호했으나 그들은 몸놀림이 상당히 느리기에 언젠가 습격하여 얼음 마법과 쇠사슬로 단박에 가고일을 제압했던 ‘어딘가의 대마법사’와 ‘암두시아스 납치범 토끼 가면’을 견제하기 위해 재빠르고 치명적인 딱정벌레 ‘포이즌 비틀’로 지하실 수호병을 대체했다.
“수호대장님!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아냐, 넌 마나 아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괜한 자존심은 아니었다. 실제로 바비룬의 포효 한 번에 모든 벌레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으니.
하지만 디안은 안심할 수 없었다. 바비룬이 못미덥다기보단 마나 경계망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존재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나? 아니야. 이건... 군단장님에게서 느껴지던...’
기(?). 그것도 시커멓고 강렬한 기다.
바비룬과 동급. 근 1년간 바비룬이 잠까지 줄여가며 주술을 갈고닦아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나 토텔리 프리온도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기가 굉장히 가까워졌다. 디안이 조용히 가방으로 손을 뻗었을 때 그가 초록색 피가 철퍽이는 계단으로 느긋하게 내려왔다.
“손님이... 왔네... 드루이드랑... 여자 마법사...?”
[제길, 제일 성가신 놈이 왔어.]
철컹
그는 거대한 철검을 세웠다. 시커먼 기가 검날에 휘감겨 더욱 비대해졌으며 땅과 천장이 쿠구구구 진동하며 바비룬을 노린다.
“...옛적 그 마법사 놈은 아닌 것 같고... 저 마법사도 토끼 가면은 아닌 것 같고... 실렉티스?”
“실렉티스...?”
디안의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반응을 보니... 실렉티스가 아닌가...?”
“실렉티스가 뭐죠?”
무언가 홀린듯 그의 질문에 역으로 물었다.
그 문답을 듣자 바비룬은 다급하게 꼬리로 디안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고, 그녀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듣지 마.]
“실렉티스가 뭐냐고...? 문신... 그 분이라는 녀석의 수하... 너희는 아닌가 보군...”
“그분? 아니, 문신이라고요? 문신......크으윽!!”
[아 씨발 일 났네.]
디안은 머리를 싸맸다.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점점 비대해진다.
“크, 크으윽...! 수호대장님?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 등신아! 내가 그러니까 듣지 말라고 말 했잖아!!]
“그쪽 호랭이는 주술 용사인가...?”
[닥쳐라 애송이. 그런 저급한 드루이드랑 본좌를 비교하다니!]
바비룬은 순간적으로 던전을 공략했을 때 만났던 독사 드루이드의 말투를 연기했다.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악쿤에게 지독히도 들어 뇌리에 각인된 채였기에 순발력 있게 잘 대처할 수 있었다.
“꺄아악!! 머리가! 머리가아!!”
[가지가지한다 진짜.]
하지만 상황은 완화되지 않는다. 지금 문제는 저 곰탱이 같은 토텔리보다 디안의 상태였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곤, 앞발을 휘둘러 난폭하게 벽에 던졌다.
콰작!!
벽이 살짝 파였다. 잔해가 후두둑 떨어지며 디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살짝 흐느끼는 디안. 몸이 박혔다는 고통인지, 두통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비룬으로서 지금 그녀에게 취할 태도는,
[야 씨발. 정신차려.]
격려, 걱정 따위는 결단코 아니다.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닥쳐. 여긴 적진이야. 정신 차리라고 말했어.]
“그, 그치만 머리가...!!”
[정신 차리라는 말 안 들려?!]
그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한 건 토텔리 프리온이였다.
“드루이드 너도 내 말이 안 들리나 봐...”
후우웅!
그는 검을 휘둘렀고, 바비룬은 재빠르게 움직여 그의 검을 받아냈다.
콰아앙!!
검과 송곳니가 격돌하며 낼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둔기가 맞부딪치며 공명하는 소리.
그 소리가 울리자 충격파가 일며 이미 엉망이 된 지하실을 더욱 헤집는다.
[정신 차리라니까!!]
“너부터 차려... 자꾸 한눈 팔지 말고...”
[크윽!]
푸슉
피가 솟구친다.
바비룬의 귀가 잘려나갔고, 그곳에서 진득한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너 많이 강하네... 나는 한 번에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몸을 비틀 줄은 몰랐어... 브룩보다... 더 강할 것 같기도 하고...”
[너 무슨 실어증있냐? 말을 왤캐 답답하게 하냐? 그보다 너 상대할 시간 없어!]
바비룬의 바람과는 다르게, 토텔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되려 더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바비룬도 회피만 하기엔 토텔리의 검술 실력과 오러의 질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진지하게 임해야 할 상대다. 4년 전 한껏 봐주며 싸워줬던 토텔리는 이곳에 없다.
쾅! 키이이 푸슥 쿠구구구!!
폭음이 터질 때마다 바비룬과 토텔리의 몸에 잔상처가 생긴다.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전투였지만 토텔리에게는 아직 간보기 단계에 불과하기에 더 내뿜을 오러와 여러 검술이 준비되어 있었고, 바비룬도 주 목적이 마왕군 파괴 공작이 아니기에 아직 도망칠 힘을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바비룬이었다.
단순한 1대1 구도가 흘러갈 수 없는 이곳은 마왕성이다. 더군다나 메이블과 단탈리온을 만나는 게 이번 목표다.
하지만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추가 병력이 자꾸만 처들어온다.
[제발! 디안 이 썩을 년아 제발!!]
바비룬은 급박해지고 있었고, 체감상 시간을 역행한 후 전투는 10분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참모장 일지는커녕 개죽임이다.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타임 패러독스인지 영향력인지는 몰라도 그것에 잡아먹혀 죽는다.
디안만이 지금 바비룬에겐 동아줄이였다. 그러니 바비룬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야!!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멘탈 안 잡을래?!!]
고함쳐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디안은 두통을 이겨낼 수 없었는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싸매곤 흐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비룬은 잠시 토텔리에게서 거기를 벌리곤 무슨 말을 해야 디안이 정신차릴지 고민했다.
‘...그래, 시발. 그 새끼가 있었지.’
이 말을 하더라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면 죽을 각오를 마치고 최후의 한 마디를 던졌다.
[악쿤이 제대로 실망하겠다?! 정신 못 차려서 나도 죽고, 너까지 죽으면 참으로 좋아하겠다고 씨발!!]
그 말을 듣자 디안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무릎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잠시 휘청거렸지만, 벽에 손을 짚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겨우 꺼냈다.
‘된 건가?’
여지껏 보인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묘한 기대심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자 갑자기 검격이 날아와 바비룬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너는 가만히 좀 있어봐 개새끼야.]
“너는 입이 험하구나... 입부터 잘라줄게...”
퍼어엉!!
토텔리가 더욱 강하게 오러를 터트렸다. 여지껏 간보기에 불과했다는 걸 바비룬도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상태의 토텔리를 앞에 두고 디안에게 집중하긴 무리였다. 바비룬도 주술을 더욱 강하게 발동하여 형변의 디테일과 가죽의 질을 올렸고, 그의 검에 맞서고자 크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마탑주님......”
그때 디안은 만취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서 놀라우리만큼 마나를 끌어모으는 데에 집중하여 어떤 마도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짧은 순간이동 블링크.
그걸 발동시키는 마도구였다. 끔찍한 두통 속에서, 마나를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인데 마도구 한 개도 아닌, 다섯 개를 동시에 가동했다.
‘...천재는 맞네.’
바비룬은 뒤에서 폭발하는 마나의 떨림에 감탄했다.
토텔리도 마찬가지였는지 검끝을 바비룬에게서 디안에게로 바꾸어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피슉!
찰나의 순간에 바비룬과 같이 그녀의 몸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토텔리는 멍하니 검을 내려놓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
위치가 바뀐 걸로 보아 순간이동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만, 디안은 바닥에 엎어져 피를 구토하곤 이내 의식을 잃었다.
‘더럽게 손 많이 가는 계집이야.’
바비룬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에 앞발을 올리곤 생명력을 제법 많이 나누어 주었고, 그 여파인지 잠시 현기증이 일어나 비틀거렸지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여긴 어디지?’
제법 고풍스러운 방. 과거 마왕군에 처들어왔을 때 들렀던 방은 메이블을 상대했을 때의 거대한 돔과, 마왕의 방,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계단과 복도 뿐이었다.
이곳의 구조는 알 방도가 없었다는 말이다.
신 마왕성은 처음부터 새로 지었기에 구조가 지하를 제하곤 완전히 달랐으니 이대로 나서봤자 길을 잃고 해맬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천왕이나 마왕군을 만나면 그야말로 최악이니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했다.
치이이...
바비룬은 형변을 풀어 인간 모습으로 돌아왔고, 얼굴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기에 본래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설정했다. 묘하게 조금 이목구비가 뚜렷해진 건 본인의 욕심이 첨가된 영향이다. 그는 시계를 바라보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은... 씨발 4분? 거 존나게 빠듯하네. 죽이되든 밥이되든 움직이긴 해야 돼.”
이럴 때에는 기동력이 좋고,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도마뱀의 형상이 좋았다.
외벽을 타고 최정상으로 올라가면 메이블 혹은 단탈리온과 마주할 수 있겠지.
그리 정하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바비룬은 도마뱀의 모습으로 변해 널브러진 디안을 꼬리에 칭칭 감곤 박치기를 하여 벽을 부쉈다.
그리곤 벽을 타며 성큼성큼 올라갔다. 창문은 피하며, 또 밖에서 노출되기 쉬운 각도는 최대한 피해가며 어떨 땐 사선으로, 어떨 땐 아예 삥 돌며 움직였고, 그 리듬에 맞춰 디안의 몸이 흔들거린다.
스슥 스스슥
그때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 세상에.]
너무 놀랐는지 욕보다는 생소한 표현이 튀어나왔다.
눈앞에 일렁거리는 것은 마법진이였다. 메이블의 것인고 하면, 묘하게 위력이 약해보이는 것이 절대로 그의 것은 아니었다.
[침입자가 있다더니, 더러운 도마뱀일 줄이야!]
나름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사자 대가리... 진짜 산 넘어 산이네. 술마시고 싶다 시발 거.’
디안을 격렬하게 흔들었지만, 아직도 대롱대롱 메달리고 있을 뿐이기에 방어막을 펼쳐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절망을 보여주마!!]
창문을 깨고 랜스를 들고 뛰쳐나온 건 메이블의 부관인 알로켄이였다.
부관한테도 줄의 사자의 방문을 얘기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는 싸울 생각이 넘쳐났고 마법진에서는 돌덩이가 날아왔다.
[제발 메이블 좀 보게 해줘 개새끼들아...]
빌어봤지만 알로켄에게 들리지 않았다. 들렸더라도 다를 건 없었겠지만.
단순히 날아오는 거대한 돌덩이들을 피하고자 분주히 움직일 뿐이었다. 바비룬은 지체되는 시간에 더 큰 절망을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