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71화 (71/152)

〈 71화 〉 시간 역행Ⅱ

* * *

바비룬이 느낀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존나 고까웠지만. 어쩔 방도는 없었다.’였다.

‘개새끼.’

노란 머리칼의 줄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바비룬은 그에게 가장 자신 있던 무력에서 패배했다.

아쉽지도 않았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다.

신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너희가 에이브(AYV)의 목숨을 노린다라?”

줄이 비꼬는 의도대로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다.

“어찌 보면 마왕군 컨설팅 같지 않아? 은근히 재밌네.”

줄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콱 저 조그만 머리통을 앞발로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또 목줄이 채워질게 눈에 훤했기에 굳이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다만 이를 갈며 그를 노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뭐해? 디안 데려오라고.”

줄이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 아이한테 뭘 시키려는 겁니까.”

“아이라기엔 나이가 제법 있지 않나? 명색이 참모장 부관인데 일 좀 해야지.”

“휴가입니다. 차라리 제가 움직이는 게 나을 겁니다.”

“넌 검 쓰는 친구랑 같이 훈련해야 된다니까~ 아니면 시그니처 완성한 잉여 인력 있어? 그럼 이번 임무에서 디안을 제외해줄 수 있지.”

“차원문 여는 데에 시그니처가 필요하진 않습니다.”

“이보쇼, 시그니처가 마법사들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몰라서 하는 얘기야? 그걸 완성한 것만으로도 그 여자애는 단순한 몇 서클이냐, 마력이 얼만큼이냐. 이딴 째째한 기준으로 판단할 존재가 아니라고. 고서 다 뒤져봐. 서클 4에 시그니처 완성한 미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악쿤과 줄의 치열한 공방전, 결국 의견에 힘이 강해지는 건 줄이었다.

바비룬과 디안이 만나고 와야 할 존재는 다름 아닌 메이블이었기에.

“증명이 된 자를 사자로 보내야 신 마왕군 위신이 선다. 메이블로서도 너희에게 죽기 전 자신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거고, 에이브(AYV)에게 거슬러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는 건 눈에 훤하지. 단순히 참모장 일지 후편을 우리에게 건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위험 부담을 안게 되는 셈인데, 흔쾌히 내줄 것 같아? 내가 봐온 메이블은 그런 호쾌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제가 가면 되잖습니까. 시간 역행을 통해 다녀온다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 올 수도 있습니다.”

“얘가 왜 이렇게 떼를 쓸까. 너는 이미 한 번 시간을 역행한 몸이잖아. 금기 마법을 제대로 연구해보긴 한 거야?”

줄이 이어서 하는 말은 바비룬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었기에 태반은 못 알아들었지만,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한 번 뒤트는 것만으로도 악쿤이 책임져야 할 영향력이 있고, 악쿤의 레벨이 하도 높기에 그 영향력이 별로 표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그것이 두 번으로 가중되면 얘기가 다르다.

미래도 아닌 과거에 두 번이나 영향을 끼치면 타임 패러독스라는 일어나선 안 될 끔찍한 사태가 초래한다나 뭐라나. 결국 악쿤의 몸이 버티지 못 하고 터져버린다는 뜻이었다.

“너 제자가 그리 못 미더워?”

“그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그리 큰 짐을 주기는 싫습니다.”

“그럼 네가 능력이 출중하던지. 나한테도 쩔쩔매는 주제에 뭘 그리 바라는 게 많아. 힘 없는 놈의 반발은 투정일 뿐이야. 너는 아직도 내 손아귀 안에 있어.”

악쿤은 할 말을 잃었고, 단지 손을 꽈악 쥐는 것 말고는 다른 액션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런 악쿤을 보자 줄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짜증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위험하지도 않아. 내가 이미 수를 써 뒀거든. 메이블과 얘기는 마쳤다. 단탈리온과도 마찬가지고.”

“말씀 중 죄송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인물이잖습니까? 어떻게 얘기를 마쳤다는 거죠?”

다르칸의 질문, 암두시아스는 아무 말도 이해하지 못한 채 푸딩만을 입에 넣고 있다.

“역으로 물을게. 4년 전 너희는 마왕군을 부쉈지. 그때 메이블을 비롯한 사천왕들이 당시 약했던 너희들에게 쩔쩔매면서 죽어줬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할 말이 남았는지 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젠 너희도 알겠지만, 그건 에이브(AYV)가 원한 시나리오였어. 용사의 손에 비참하게 죽는 전 용사이자 사천왕들. 놈은 그런 비극을 좋아하더군.”

“메이블 녀석은 그 빌어먹을 각본을 부수고 싶어했지. 허나 놈에겐 힘이 없었어. 에이브(AYV)를 죽일 힘이. 방법도 몰랐고.”

“그때 녀석이 내린 결론은 가르침을 구하고자 나를 찾아온 거였다.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더라면 그때가 두 번째로 만났던 거였지. 마왕군을 부활시키기 전에도 찾아왔었거든. 그땐 메이블 녀석은 에이브(AYV)와 실렉티스의 존재도 몰랐거든. 아마 내가 흑막인 줄 알았던 거였겠지. 조금 혼내주고 말았지만.”

줄은 애매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 얼굴은 메이블과의 만남이 썩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 나온 표정이리라 지레 짐작했다.

“잡설이 길었네. 아무튼 결론은 이러해. 마지막으로 날 찾아왔을 때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내 지식으론 에이브(AYV)를 죽일 방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내게 협력한다면 신 용사들에게 그 바톤을 넘겨줄 수는 있다고. 녀석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끝내 수락했다. 자신이 신살을 실패한다면, 그 시행착오를 모두 적어둔 일지를 건넬테니 이 운명을 끝내주길 바란다면서 말이야.”

짝짝­!

그는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암두시아스의 침대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곤 바비룬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내가 설정한 시간대로 가서 일지만 받아오면 돼. 너와 여자 마법사의 역할은 그게 끝이야. 악쿤과 검 쓰는 너희 둘은 신살을 위해 힘을 기른 후, 메이블의 일지를 바탕으로 방법을 찾는다. 끝내 실패한다면 이번 마왕군도 단순한 4대 마왕군 사천왕으로 기록되겠지. 그 마지막 구절에는 ‘그들은 용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가 붙을 거다. 어때? 선택지가 있어?”

이야기를 놓치진 않았기에 이해가 불가했던 건 아니지만, 사실 처음부터 머릿속에 의문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비룬은 잠시 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고, 그때 천천히 입을 뗐다.

“불만은 없어. 근데 당신이 우리를 도와서 얻는 게 뭐지?”

스승으로의 정?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챙길 위인으로 보이진 않는다. 혹여나 어물쩡거리는 대답이 돌아와도 반응은 마찬가지일터, 바비룬은 줄이 신뢰가지 않았다.

“얻는 게 뭐냐고? 단순해.”

별 기대를 안 해서일까, 굉장히 단순한 대답이 오히려 신빙성이 생겼다.

“나는 에이브(AYV)가 꼴보기 싫거든.”

*

정윤상을 따라 움직이니, 시간을 연결하는 차원문의 장소는 마왕성의 지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의 디안을 바라봤다. 녀석은 조금은 긴장한 채였다.

옛적 자기 스승을 골치 아프게 했던 사천왕과 마왕을 만나 일지를 가져오라니, 단순한 심부름이라기에는 스케일이 굉장히 컸으니 이해는 됐다.

‘나도 녀석에게 궁금한 건 있었지.’

메이블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으로 설정하더라도 대략 20분 남짓.

그 이상으로 설정하자니 디안의 마력이 버틸 수 없을 거라 말했다. 시간 차원문을 지금 열 때는 몰라도, 돌아가야 할 때는 디안이 설정해야 하니 마나를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줄이 못미덥기는 여전했지만, 강함에 있어서는 한순간에 나를 재웠던 에이브(AYV)와 크게 결이 다르진 않을 것 같다.

김철수랑 정윤상은 한층 강해져서 돌아오겠지. 어째 들러리가 된 기분이라 표정은 구겨졌지만, 줄이 내게 말했던 가장 성장 가능성 높은 사천왕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애써 분을 삭혔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가져가.”

“저... 참모장님. 너무 많아요.”

출발하기 직전, 차원문에 정윤상이 마나만 불어넣으면 곧장 가동이다.

그 전에 녀석은 자식 소풍 보내는 것마냥 이것저것 부랴부랴 디안에게 싸주고 있었다.

방어력에 있어서 최강이라 불리는 첫 번째 푸른 방패와 옛적 정윤상의 마법도 가볍게 튕겨냈던 두 번째 하얀 거울.

이만 해도 과하다. 디안에게는 아콜드의 서라는 아티팩트도 있으니 템빨이 엄청난 상태라는 거다.

그래도 부모 자식 걱정은 끝이 없는지, 정윤상은 급하게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포션, 긴급 블링크를 발동할 수 있는 일회성 마도구 등등을 디안의 가방에 구겨넣고 있었다.

놈은 한심하단 눈빛을 보내는 나를 눈치채곤 걱정스럽단 투로 말했다.

“재홍아, 디안 다치지 않게 잘 부탁한다.”

“꼴깝떤다. 저 정도면 다치고 싶어도 못 다쳐.”

“...진짜 안 다치게 잘 좀 해줘.”

“최근 내 일이 왜 이렇게 많아진 것 같냐~ 대신 참모장 업무도 해줘~ 과거까지 돌아가서 심부름까지 해줘~ 이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기 자식 보디가드도 하라고 말하네?”

“수호대장님. 자식이라뇨.”

디안이 정색했다. 새파랗게 어린 게 꼴에 눈 부릅뜨고 있으니 퍽이나 위협적이었다.

순간 장난삼아 녀석의 마빡을 한 대 때려줄까 했다가 말았다. 정윤상이 개지랄할게 눈에 훤했다.

“여기저기서 다 까이네. 에휴.”

혼잣말인듯 모두에게 들리게 내뱉곤 차원문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마나나 불어넣어. 나나 얘나 멀쩡하게 돌아올 거니까.”

“...그래.”

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가 서서히 형태를 변환하자 그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알기 쉬워서 좋았다. 비록 자주 싸우더라도 기본적으론 서로를 믿고 있으니.

촤라락­

녀석은 바닥에 시간의 파편을 하나둘 설치했고, 곧이어 지하실 전체가 놈의 짙푸른 마나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 Ξεκνα ­ 시동 }!”

마나를 불어넣자 파편과 파편 사이가 이어진다.

이내 파동처럼 차원문의 중심에서 일렁이기 시작했고, 지하실 천장이 조금 흔들려 흙먼지를 가득 떨구었다.

머잖아 그 마법진 끝자락이 어색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 일렁임은 점차 거대해졌다.

그리곤 점차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게 차원문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깨닫곤 완전히 형변을 마쳤다.

˚ 형변(??) ­ 호!(虎) 모델 서쪽의 하얀 호랑이 ˚

나는 디안을 등에 태우고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

그리곤 1분도 안 되어서,

[이런 씨발!]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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