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시간 역행Ⅱ
* * *
디안을 암두시아스의 방으로 호출하기 30분 전,
암두시아스의 도움 요청에 바비룬과 다르칸이 문을 부수고 방으로 뛰어들어 외쳤다.
[뿔 계집!!]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바비룬 필라이트와 다르칸이 만발의 전투 태세를 갖추곤 줄에게 발톱과 검을 들이밀었다.
악쿤을 데려오라고 깽판 쳤을 때에는 그래도 악쿤의 스승이기에 죽일 각오로 덤벼들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암두시아스를 건드렸다. 그녀는 마왕군의 핵이자 역린과도 같은 존재다.
“워 워 사과할 테니까 그 무서운 것들 좀 치워줘.”
[이 새끼가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암두시아스까지 건드려?!]
“우리 주술 용사님, 보기와는 다르게 정이 많네? 아차. ‘전’ 용사지.”
[초월자가 되면 목숨도 여러 개 인가봐? 소원대로 죽여줄게.]
초월자.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처럼 세월이라는 흐름에 지배받지 않는 자들.
초월자로 도약할 수 있는 조건은 알려져 있지 않다만 여지껏 ONE(?)의 역사에선 4명만이 존재했으니 그 희소성이 얼만치인지 가늠이 갔다.
미쳐버렸던 왕 노젤루스.
자신을 인간이라 착각했던 멍청한 드래곤이자 최악의 드래곤인 타나토스(피아).
검성 홀라.
그리고 줄.
타나토스와 홀라, 줄이 합심하여 노젤루스를 죽였기에 현존하는 초월자는 셋이다.
그 중 한 명이 마왕을 위협했다. 악쿤이 복귀하기 전 그가 깽판 쳤던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위협이었다.
그 소동은 악쿤만 복귀하면 멈출 걸 알았기에,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으니 바비룬과 다르칸도 더 열을 올리지 않았던 거였었다.
그러나 또다시 제멋대로 행동하는 줄을 초월자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진정하라니까?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죽였어.”
[ 다르칸 류 공격술 제 1식 퇴근ㄱ ]
파직!
줄의 전격에 온몸이 마비되어 다르칸의 검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마나 장벽을 넓게 터트려 암두시아스의 방 전체를 휘감았다. 이제부턴 다른 마왕군은 그녀의 방에 침입할수도, 상황을 지켜볼 수도, 대화를 엿들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줄은 말했다.
“...이럴수가 내 오러를 뚫고 마법이...”
“너희 용사 출신들 특징이 뭔지 알아?”
“그만하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악쿤, 너도 똑같아. 그 특징에 사로잡혀 있어.”
파직 파지지직!!
샛노란 전격 두 줄기가 더 요동쳤다.
그 눈으로 쫓기도 어려운 속공에 바비룬과 악쿤은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고, 이들의 몸 또한 멈춰버렸다.
“으아아앙!!”
암두시아스는 공포에 온몸을 벌벌 떨며 일각공의 모습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한다는 걸 느끼자 바비룬은 더욱 격렬히 몸부림쳤다.
[줄!! 이게 풀리면 목을 찢어발겨주마!!]
“바빌론이었나, 아무튼 전 주술 용사 너가 가장 심해.”
“그 특징이라는 게 뭡니까.”
악쿤은 마나가 뭉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줄의 말에 반응했다.
“역시 ‘비교적’ 내 제자가 말이 제일 잘 통하는구나. 그 특징이 뭐냐고?”
줄은 빙긋 웃었다.
“레벨만 높아졌다고 자기들이 강한 줄 안다는 것. 여러 번 사선을 넘었다곤 하지만 너희는 깊이가 없어.”
“......”
“너희 셋이 전력을 다해서 덤벼도 나 하나 못 이겨. 아니, 그래도 사천왕 자존심이 있으니까 조금 말을 바꿔줄까? 이길 수 있더라도 내가 동귀어진으로 너희들 중 두 명은 데려갈 수 있어. 허세가 아니라는 건 지금 온몸으로 느끼고 있잖아?”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세 사천왕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웠다. 온몸의 기관 뿐만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마저도 마비된 기분. 사소한 움직임도 불가능했다.
“검 쓰는 놈아. 네가 타나토스를 상대로 비겼다면서?”
“...”
“웃기지도 않아. 그 자식이 조금만 제대로 했으면 넌 진작에 잿더미가 되거나 독에 녹아버려서 죽었어. 걔 딴에는 힘조절 엄청 한 거야. 안 믿기지? 그래도 넌 믿어야 돼. 그때 너를 죽이면 에이브(AYV)씨가 굉장히 노하실 게 뻔했거든.”
다르칸이 입을 다물거나 말거나 줄은 혼자서 턱을 짚고 무언가를 고민했다.
“아, 카이루스 상대로 이긴 건 순수하게 기뻐해도 돼. 그 녀석은 진심이었을 거야. 애초에 자존심이 쓸데없이 강한 놈이라서 일부러 지는 연기 따위 하지도 못하고.”
줄은 마왕의 방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더니, 본연의 말 형태로 변환한 암두시아스를 바라봤다.
“으으으!!”
그녀는 열렬히 마기를 터트리고 있었다. 세 사천왕을 줄에게서 구해내기 위해.
“흑마법도 쓸 줄 아네? 기특하다 기특해.”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둬도 줄의 항마력을 뚫어낼 순 없었기에 줄은 애교 수준으로 취급하곤 바비룬에게 다가갔다.
“우리 들짐승에게도 한 마디 해줄까? 너는 비이린에서 생활하면서 이그니스 영감이나 다른 정령, 혹은 요정족 여왕 카넬루아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고 멋대로 착각했을 거야.”
[...너 새끼가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여?]
“당연히 알지. 초월자의 정보망을 무시해선 곤란해. 그리고 이것도 특징에 포함된다는 거 알아? 웃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거. 새파란 어린애야. 어른의 말은 새겨들어야 하는 법이야.”
그는 부들거리는 이재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이재홍은 이를 빠득 깨물며 으르렁거렸지만, 이번에는 길고양이 취급하듯 턱을 간지럽히곤 악쿤에게 다가갔다.
“사랑스러운 제자야. 당황스럽지? 마법의 최고 경지인 서클9에 달성했지만 스승의 마법 한 번에 마나도 터트리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너 모습이 말이야. 너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증거야 멍청아.”
악에 찬 얼굴, 악쿤은 마법을 캔슬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마나를 모으고 있었고, 그 모든 시행착오는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해 몸만 지쳐갈 뿐이었다.
그는 줄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도 에이브(AYV)의 끄나불이였습니까? 실렉티스였냔 말입니다!!”
“한심한 소리. 그리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아? 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훌륭하신 세 사천왕님들을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때려주고 있는지 아냐고.”
줄은 다 넘겨진 머리를 다시 넘겼다.
그가 진지한 말을 뱉을 때 자주 나오는 습관 중 하나다.
“무력감을 느끼게 하려고.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을.”
짝!
줄은 경쾌하게 손뼉쳤고, 그와 동시에 세 사천왕의 몸을 휘감던 전격이 풀린다.
이들은 동시에 앞으로 고꾸라졌고, 줄은 재밌다는듯 깔깔 웃었다.
“자! 진짜 얘기 좀 시작하자! 이렇게 자존심을 한 번 밟아줘야 내 말에 귀 기울일 거 아니냐?”
*
줄의 이미 깔려 있던 마나 장벽.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내게도 같은 걸 지시해 2중 마나 장벽이 깔렸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어디로든 새어나가면 안 되거든. 나조차도 에이브(AYV)는 까다로우니까 말이야.”
“...시답잖은 얘기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 멍멍이 화가 많네? 무서워서라도 사족은 다 잘라내야겠네.”
줄은 암두시아스의 방과 악쿤의 집무실을 이어주는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적당한 걸 찾았는지 마나를 조작하여 그 물건을 올렸다.
거대한 종이였다. 머잖아 올라온 건 잉크 병과 펜이었다.
“우리 위대하신 참모장의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하나 줄까 해.”
스슥 스스슥
종이에 펜 그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완성되어간다.
그림체가 깔끔했기에 분간하긴 쉬웠다.
“에이브(AYV), 그리고 실렉티스. 이들의 관계? 이딴 건 얘기할 필요도 없어. 이미 알고도 있을 것이고.”
찌직
종이를 찢는다. 그리곤 손으로 가슴팍을 털어내는 제스처를 취하자 종이에 그려졌던 잉크가 모두 빨려나와 다시 잉크 병에 들어갔다.
“마왕군의 목적은 세계 평화 유지 및 에이브(AYV) 장단 맞추기. 맞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자 찢어졌던 종이는 다시 합쳐졌고, 그곳에 다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너희 전 용사님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살(??)이잖아.”
“...야, 정윤상. 네가 말했냐?”
“어차피 다 알고 있었어. 숨길래야 못 숨길 사람인 거 얼추 느낌 오잖아.”
“어이구 그랬냐? 괜찮지 뭐! 마왕군 망하는 즉시 자는 너 침대 습격해서 목 뜯어 죽일 거라는 것만 알아둬!”
“워워, 싸우지 마. 내 말 끊기잖아. 또 개목걸이 차고 싶어?”
이재홍이 달려들 때마다 줄은 전격으로 된 목걸이를 목에 채웠다.
말을 듣겠다고 이를 빠득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걸 풀어줬고, 이 행동이 3번쯤 반복되자 녀석은 덤벼드는 걸 포기했다. 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해줬을까? 이유는 간단해. 너희는 에이브(AYV)의 발끝에도 닿지 못해. 그는 나보다도 훨씬 전능한 존재거든. 아니, 나뿐만일까. 이 세상 누구를 예로 들어도 닿을 수 없는 놈이야.”
암두시아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푸딩만을 입에 집어넣자 줄은 그녀를 마구 쓰다듬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짜증이 올라왔지만, 푸딩을 다시 입에 넣자 사그라들었다.
“뭐, 그러니까 신이겠지만.”
큼큼, 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도 못 이기면서 에이브(AYV)를 죽이겠다? 현실성 없는 얘기야. 그 현실을 알려주고자 조금 거친 방법을 썼다. 사과할 건 사과할게, 미안들 해.”
“이어서 말씀하시죠.”
“역쉬~ 나이가 제일 많은 우리 검사님이 가장 어른스럽네! 그래, 이어서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 특유의 깐족거리는 태도는 이미 모두가 익숙해졌다. 나는 거진 6 ~ 7년 전부터 익숙해진지 오래고.
“다행히도 내 지도 방법은 채찍을 준 다음 당근을 주는 방식이라서 말이야.”
실제로 그러했다. 당근이 채찍의 비율에 비해 너무나도 조촐해서가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줄은 언제나 혹독한 가르침(사실 오늘 있었던 일은 ‘혹독함’의 ‘ㅎ’자도 되지 않지만...)을 준 후에 해결 방안을 넌지시 던졌었다.
“너랑 너. 둘은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어.”
그는 나와 김철수를 가리켰다.
이재홍이 왜 자기는 빼냐며 분노를 내비췄지만 줄은 침착하게 말을 쏟아냈다.
“너는 아무리 강해져도 에이브(AYV)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해. 아, 무시하는 거 아니다? 사실 마왕군에서 가장 잠재력 높은 건 너거든. 근데... 그냥 태생적으로 너는 에이브(AYV)에게 닿을 수가 없다는 것만 알아둬라. 대신 역할을 줄 테니까 고까워하진 말고.”
“...그렇다면야.”
순간 이재홍이 까다롭지만 간식 주면 조용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였던 건 무슨 이유일까.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내가 줄에게 물었다.
“진 키아라는 어째서 제외하는 겁니까?”
“걔는.........”
말끝을 흐린다. 줄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너희에게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건 아니야. 나 같아도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굉장히 곤란해. 그러니 묻지 마.”
줄은 심장에 손을 얹고 언약을 발동한 상태로 말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행동에 잠시 넋이 나갔으나, 그가 진심이라는 것만은 모두가 알았다.
“우리 마왕님도 약속해야 돼요?”
“응? 내가 왜?”
“안 그러면 위험하거든요~ 진 키아라한테는 아무것도 말 하면 안 돼요 알겠죠? 약속하면 푸딩으로 이 방 전부 채워줄게~”
‘푸딩으로 방을 채운다고...?’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까짓 거 못해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암두시아스는 흔쾌히 줄과 약속하고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줄이 강제로 그녀의 손을 끌어 심장에 얹었다. 나는 말려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미친.”
“언약 완료. 악쿤, 이 아이는 너희가 알아서 관리해. 진 키아라한테 오늘 들은 거 조금이라도 뻥끗했다만 심장 터져서 죽는다. 알겠지?”
“이 자식 지금 뭐 한 거야? 언약 맺은 거야?”
“나한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어. 모르면 가만히 있어. 전 주술 용사.”
줄은 평소 태도만 보면 굉장히 장난스러운 이미지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경계를 늦춘 적 없다. 환하게 웃으면서도 속은 시커먼 사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암두시아스에게는 일부러 얘기를 들려준 거다. 언약을 걸어둠으로써 본인에게도 보험을 만들어두기 위해서 말이다.
“열 내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거 잘 알지? 그러니 집중해, 너희 셋은 두 조로 나뉠 거야. 지시할 것도 각기 다르지.”
어느새 손에 쥐어진 펜의 끝으로 나와 김철수를 가리켰다. 잉크가 한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둘은 나와 특별 게스트한테 훈련을 받는다. 에이브(AYV)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도록 처음부터 뜯어고쳐주지.”
휙 펜을 휘둘러 이재홍을 가리켰다. 잉크가 요란하게 튀며 바닥에 점선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너는 과거로 역행해 내가 가져오라는 물건을 가져온다. 이미 과거에서 만나야 될 사람이랑 입은 맞춰뒀으니 단순히 가져오기만 하면 돼.”
“지금 나보고 시간을 역행하라고? 정윤상 저 새끼처럼 금기 저지르라는 말이야? 아니, 그보다 나는 마법 쓸 줄도 몰라. 내가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형변이랑 주술 뿐이라고.”
“이보쇼, 내가 생각이 그렇게 짧겠어? 당연히 미녀 도우미 한 명쯤은 붙여줄 생각이었지~”
그는 펜 끝을 내게로 향했다.
착 잉크가 요란하게 로브에 묻었고, 표정이 굳었으나 그는 아랑곳않고 말했다.
“너 제자 불러와.”
“......”
“뭘 멍 때려? 시그니처 완성한 디안 말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