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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69화 (69/152)

〈 69화 〉 시간 역행Ⅱ

* * *

쿠드득­

무너진 바닥에 암두시아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누구야!”

이불로 온몸을 뒤덮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저 바닥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면 곧장 수호대장인 바비룬 필라이트를 호출할 생각이었다.

“이야~ 방이 완전 핑크빛이네? 세계를 위협하는 극악무도한 마왕의 방이라곤 아무도 안 믿겠어. 머릿속 꽃밭인 파란만장한 공주님의 방을 떠올리겠지.”

느끼한 목소리와 함께 방 바닥에서 무언가 빼꼼 올라왔다.

올백머리의 소년이었다. 그는 빙긋 웃더니 갑자기 얼굴을 팍 구겨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꺄아아악­!!”

“사람 얼굴 보고 그런 반응 보이면 실례지 않을­ 부부붑...”

서로 얼굴만 내비치는 상태. 암두시아스는 이불을 그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책상으로 달려가 바비룬 호출 버튼을 연속해서 눌렀다.

삐­! 삐­! 삐­! 삐­! 삐­!

공습 경보! 공습 경보! 공습 경보! 공습 경­

버튼을 누른 횟수만큼 마왕성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방 바깥에서는 무언가 쿠당탕탕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암두시아스는 책상에 놓인 포크를 다르칸이 검을 쥐는 것처럼 잡고선 소년에게 향했다.

“아오. 성깔 있는 아가씨네. 하긴, 여자는 조금 까칠해야 돼.”

“애인이라곤 없어보셨잖습니까. 뭘 다 안다는 듯이...”

“이 자식이 스승 가슴팍을 후벼파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암두시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포크를 잡은 자세는 그대로였고, 방 바깥에서는 부하들이 고함쳤지만, 그 사내가 한 마디를 더 던지자 소란은 진정되었다.

[다들 물러가라.]

“참모장님?!”

[참모장 명령이다. 내 손님이 장난을 친 것 뿐이야. 곧장 물러가라.]

암두시아스는 참모장과 그 옆에 있는 소년을 번갈아가며 보고선 머리를 움켜쥐었다.

“누구세요?”

“실례합니다. 우선 이 사람을 소개하자면­”

“아가씨 장난 쳐서 미안! 난 어딘가의 대마법사라고 해!”

소년은 참모장에게 헤드락을 걸며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 스승님이지.”

“...스승?”

참모장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서리를 쳤고, 신경질적으로 소년을 뿌리쳤다.

“방 바닥은 금방 수리할 테니 오늘은 수호대장이나 제 부관의 방에서 같이 주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 상관이라고 딱딱하게 말하는 것 봐라. 나한테도 격식 좀 차려.”

“충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지껏 욕 한 마디 안 했잖습니까?”

“말하는 것 봐라... 어휴, 늙으면 죽어야지.”

그는 멋대로 암두시아스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손바닥으로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안 잡아먹으니까 경계 풀어.”

“그걸 어떻게 믿어요? 바비룬이 이상한 사람 말 듣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수는 있겠구나. 음... 어떻게 믿게 해줄까. 그래! 이건 어때?”

파직­ 파지직­

그의 온몸에서 전격이 피어오른다. 그는 일상 대화하듯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 먹었으면 마왕군 전체를 다 죽일 수 있었어.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증명이 되지 않을까?”

“......”

삐­! 삐­! 삐­!

공습 경보! 공습 경보! 공습 경보!

참모장은 귀를 틀어막고 암두시아스를 끌어안아 강제로 버튼에게서 멀어지게끔 했다.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문 부숴!!”

“수호대장님과 군단장님이 오고 계신다!!”

밖에는 또 소란이 일었다. 그에 소년은 껄껄 웃었고, 참모장은 고함치며 그를 타박했다.

“농담도 못 해~ 아, 웃겨 죽겠네.”

“이 무슨 질 나쁜 장난입니까!”

“괜찮아~ 왜냐면 어차피 너희하곤 같이 얘기할 생각이었거든.”

콰드득­ 서걱­

문은 거대한 발톱에 부서졌고, 벽이 깔끔하게 잘렸다.

그곳에는 입김을 가득 뿜으며 씩씩거리는 바비룬 필라이트와 경직된 표정으로 검을 잡고 새카만 오러를 터트리는 다르칸이 있었다.

“다들 앉아! 내 제자 친구들이랑 얘기 좀 하고 싶었거든.”

*

‘3대 세력 중 한 명이 참모장님의 스승이었다니.’

디안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한가득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복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정신이 너무 없었던 까닭이다.

“호오, 이 아주 신박한 설계로군요.”

연구실장이자 10위 악마인 부아르(8대).

마왕군 마도구 개발 및 수리 부서를 관리하는 악마이다.

디안은 그의 수하들과 같이 전송한 차원포를 뜯어보며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악쿤이 기절했던 사이 다르칸은 그녀에게 휴가이니 휴식을 권했지만,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 같이 책임지고 싶다 말하곤 바로 연구실로 직행했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인 이유이다. 실상은 악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부아르가 말했다.

“디안 양, 이건 남대륙에서 설계한 물건이라고 했던가요?”

“네. 에볼로기아 수도 메일리에서 제작하고 있었어요.”

“흐음... 분명 아이디어만 보면 괴학자(??者)가 만든 게 분명한데 이상하군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본론은 혹여나 이 무기가 완성되었더라면 마왕군은 또다시 멸망했을 겁니다. 과장이 아니에요. 디안 양이 정말 큰일 하신 겁니다.”

부아르는 신사적이지만, 없는 말까지 내뱉는 성격은 아니다.

그만치나 디안이 가져온 차원포는 위협적인 무기였다.

“과찬이세요. 그보다 괴학자라뇨? 하이링커를 말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이런 신박한 설계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미친 발명가 하이링커가 유일합니다.”

하이링커. 북대륙의 괴학자. 그에겐 여럿 별명이 따라붙는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미친 발명가, 괴학자, 폭탄마, 광견 등등...

천재는 미치기 쉽다던가? 하이링커가 그 주장을 증명하는 산증인이었다.

그의 영석한 두뇌에서 태어난 마도구는 하나같이 신박한 것들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마도구 시장에 새로운 폭풍을 불어오는 것들 뿐이었다.

근래에 들어 마도구 시장이 급격히 발달할 수 있었던 건 하이링커가 선발자로서 최첨단 마도구 제작에 뛰어들었던 덕이다.

그가 만든 작품들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마도구 제작자들에게 있어선 교본이 되었다.

그의 기술은 몇 세기나 앞선 것이었으며, 누군가는 맥라룬 드파니온의 재림이라고 불렀다.

물론 맥라룬은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였고, 하이링커는 발명가에 가까우니 마땅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만, 천재라는 공통점은 같았다.

“그가 남대륙을 도왔다는 건가요?”

“확증은 없습니다만 미친 사람이니 행보를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게 유일한 근거죠.”

“만약 도왔다는 게 맞더라면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미친 사람 머릿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아르는 차원포가 하이링커의 작품이 맞는지는 더 헐뜯어봐야 알 수 있을 거라 말했고, 그때쯤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디안, 연구실이야?”

상관이자 스승인 악쿤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전화였지만, 선뜻 부름에 응하기는 어려웠던 게 보고서는 다 작성하지 못 한 채였고, 납치해온 파리오와 사장이 수호대장의 부관과 대화를 잘 마쳤는지도 보고받지 못했다.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원래 휴가시잖아요?”

“이미 반납했지만... 감사합니다.”

부아르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얼른 가보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디안은 못 이긴 척 악쿤이 호출한 마왕실로 움직였다.

“이게 무슨 멤버죠?”

방문을 열자 꽤나 의아한 조합이 보였다.

암두시아스, 진 키아라를 제한 3명의 사천왕. 그리고 악쿤의 스승인 줄.

“네가 서클 4에 시그니처 완성한 천재라면서? 악쿤보다 널 제자로 뒀어야 했는데 아쉽다. 아무튼 반가워!”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악쿤 토든님의 제자인 디안이라고 합­”

말이 끝나기도 전, 줄이 쏜살 같이 다가와 양손으로 디안의 새하얀 손을 붙잡곤 굉장히 과장스럽게 손을 붕붕 휘둘렀다.

디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마왕군 간부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으나, 그들은 고개를 절렜다.

“벽 같은 사람이다. 네가 이해해라.”

바비룬이 말했다. 그는 여지껏 보아온 어떠한 표정들 중 가장 최악에 가까웠다.

“우리 멍멍이. 친구 스승님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말 걸지 마시지 늙다리.”

“...사랑스러운 제자야. 친구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니?”

“제가 관리할 대상이 아닙니다.”

쌀쌀맞은 자식들, 줄은 투덜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그 사이에 서클 올랐구나, 시그니처 빼면 5서클인가? 마법 용사랑 동급이네.”

“아... 공수해온 마도구까지 겸하면 6서클입니다.”

“아콜드의 서 말하는 거 맞지?”

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가방 속 조용히 잠들어있는 두텁고 표지가 낡은 가죽으로 되어있는 고서.

과거 대마장을 지냈던 인물 아콜드 프리브룩스(한때 줄과 타나토스(피아)에게 마법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가 룬어를 친히 정리해둔 물건이다. 시리즈마다 다르지만, 디안이 가지고 있는 2권은 7서클까지는 사용자의 서클을 하나 올려주는 역할이다.

“그리운 이름이네. 아무튼 6서클이면 웬만한 마왕군 잔당한테 죽을 일은 없을 거고...”

‘같은 동료인데 죽을 일이 무슨 말씀이시지?’

디안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줄은 어딘가 소름끼치는 표정을 짓곤 떨떠름한 표정의 수호대장 바비룬을 고개로 가리켰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간단해. 너는 이 간부님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야 돼.”

“여행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확히는 역행이지.”

줄은 악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이 녀석과 나는 시간을 이미 한 번씩 역행한 몸이거든. 금기를 두 번 저지르면 ‘그분’이 굉장히 언짢아하셔서 말이야.”

“그분이라함은...?”

디안이 순수하게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줄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는 악쿤의 목을 홱 당기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진짜 얘한테는 아무것도 말 안 했구나?”

“기억을 지워뒀습니다. 실렉티스인지 에이브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지독하게도 걸어뒀더군요. 요정족 공주 넬피조차도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 그 뚱뚱한 공주님? 그 공주님도 실렉티스일지도 모르잖아.”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미인 카넬루아는 실렉티스였지만요.”

“실렉티스가 뭔지는 알아?”

“그것도 모릅니다.”

“그럼 쟤는 뭘 믿고 널 따라온 거냐?”

“그건...”

얘기하자니 너무 긴 이야기다.

어쨌든 지금은 디안이 참모장의 부관이라는 게 중요한 점이다.

“지금 말하기 애매해?”

“예,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본론부터...”

줄은 심각한 얼굴을 거두곤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해둘게. 나는 마왕군이 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가 지시할 내용은 너가 그토록 존경하는 참모장과 이 귀여운 꼬마 마왕님의 뜻이야. 마왕군의 뜻이라는 거지.”

아직 혼란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자 악쿤과 암두시아스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이야.”

“응! 사실이야!”

마왕군의 마왕과 최고 간부 두 명이서 말한다.

거부할 근거는 없었다. 줄은 말을 이었다.

“너와 험악한 수호대장님은 시간을 역행해야 돼. 우리 예쁜 디안 양은 그 시간 차원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지. 이 둘은 보디가드인 거고.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것이고 목적은 무엇이냐! 단순하게 얘기해줄게.”

그는 악쿤의 어깨를 두드렸다.

줄의 장난스러운 어조에 비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장소는 마왕성. 시간은 우리가 그들을 토벌하기 전인 4년 전 막바지. 그곳에서 두 명을 만나고 오면 돼. 이미 스승님이 그들과 얘기를 마쳤으니 암구호만 말하면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설령 위험하더라도 이재홍이랑 철수 형이 있으니 괜찮겠지.”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오는 것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메이블 토진과 전 마왕 단탈리온. 그들을 만나 한 가지 물건만 가져오면 돼.”

목표물은 메이블의 일지, 그것의 후편이다.

“...따라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금기 때문도 있지만 스승님과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악쿤은 난감하단 표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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