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60화 (60/152)

〈 60화 〉 필요악

* * *

용사는 내 생각대로 잘 성장하고 있었다.

포이즌 슬라임과 봄버를 잡아 레벨업도 순조로웠고, 최세린을 만나 격의 차이도 느꼈으니 그 분함은 성장통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그를 위해 마왕군은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고블린, 그리고 코볼트.

슬라임, 그리고 봄버. 이들은 용사에게 죽을 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뛰어든 영웅이다.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용사의 희생양이 되기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던 두 몬스터의 삶을 기리는 중이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부관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겨우 삼키며 뱉었다.

1차 침공 때 조금은 무덤덤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나 보다.

하기야, 애초에 마음 여린 아이였으니 마왕군이 된들 천성이 바뀌지는 않겠지.

“그들의 영혼이 부디 편안하기를 기리며 잠시 묵념하겠습니다.”

시신을 회수할 수는 없었기에 사실 장례식이 아닌, 영안식이라 불러야 할 행사.

그 행사가 끝났고, 그동안 해방해둔 몬스터들은 각자의 업무를 보러 돌아갔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때 날 불러세운 건 수호대장이자 폭염의 드루이드 바비룬 필라이트였다.

“사석 아닌 이상에야 서로 격식 차리자는 말 기억 안 나?”

“부하들 다 떠나가는데 사석이고 나발이고 모르겠으니까 군말 말고 따라와.”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였다.

*

“하나만 물어보자.”

수호대장의 집무실, 잡동사니가 어질러진 방 안에 겨우 앉을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고, 그는 턱을 짚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냐?”

“뭐가.”

“들으면 알잖아. 용사 새끼들 왜 놔두는 거냐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그게 우리 운명이라니까.”

“그걸 몰라서 말하는 것 같아?”

크르르륵­

앉아있는 내 얼굴에 날카로운 발톱을 드세우며 위협했다.

“반병신을 만들면 그만이잖아. 아니면 몬스터를 안 보내고 레벨업을 안 시킬 방법도 있어.”

‘속 편한 소리.’

이재홍의 주장은 용사가 우릴 무기한정하게 죽일 수 없게끔 성장할 껀덕지를 주지 말자는 말이었다.

“너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 근데 뭐? 다타리오를 가이드로 보내? 같잖은 연극도 할 줄은 몰랐네. 이 짜치는 짓을 용케 카이루스가 허락했어.”

“설득하느라 애 좀 먹었지.”

“...병신, 갈수록 가관이다. 그분 죽이자는 목표는 사라진 거냐.”

“진행 중이야. 하늘 아래로 떨어트릴 방법을 찾는 중이지.”

“빨리 찾길 바란다.”

그는 씩씩거리는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갔다.

“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거든.”

쾅­!!

그의 문 닫는 몸짓에는 감정이 뒤섞였다. 나를 향한 원망일까 분노일까. 부하를 잃었다는 슬픔일까.

“하아...”

나도 짙은 한숨을 뱉었다. 이재홍의 말은 속 편한 소리지만, 내 입장이 아니라면 너무나 타당한 주장이었고, 그걸 설득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웅­

내 심장에 걸린 마법진.

용사를 성심성의껏 키워내야 한다는 언약, 나는 이걸 저주로 부르기로 했다.

이걸 아는 사람은 나와 최세린 뿐이다.

철수 형이야 눈치껏 알아챈 느낌이지만, 그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골머리를 잡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희생시켜야 그분을 죽일 수 있을까.

짐작 가지 않았다. 요즘 땅이 푹 꺼지는 한숨만 늘어가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담는 이재홍이 보인다.

“근데 여기 너 방이잖아.”

“...빨리 꺼져.”

*

어째서 이리 됐는지 수십 번도 넘게 되뇌었다.

그분이라는 놈에게 척을 지게 된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실렉티스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철수를 제압하고, 그의 정신을 완전히 돌려논 후 일행은 용사 초기 때처럼 전대륙을 들쑤셨다.

그분을 찾아 죽이기 위함이었다. 3대 세력을 제하곤 그 누구도 용사 4인방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살해 계획은 어느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를 찾아내는 게 문제였다.

김철수는 정신을 돌려놓자 실렉티스에 대한 기억을 태반 잃은 상태였고, 넬피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실렉티스가 아니었으니.

그렇게 대략 몇 달간 삽질을 진행한 후에야 그분의 정체를 알 만 한 사람을 찾아냈다.

요정족의 여왕 카넬루아. 그녀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넬피도 그녀를 통해 실렉티스의 정보를 얻어냈으니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그녀를 찾아 떠났다.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인지라 그녀를 찾아내는 건 제법 귀찮은 일이었고, 넬피는 그녀와 교신이 안 된다고 발을 굴렀다.

“...꼭 만나러 가야 되나?”

이때 혼자서 초조해보이던 이재홍, 그답지 않게 오줌 마려운 개 같은 움직임은 진귀한 광경이었다.

허나, 그가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 아니듯 우리도 그를 배려하진 않았다.

카넬루아가 아니라면 여전히 헛발질만 계속하고 있을 테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카넬루아의 얘기를 잠깐 하자면, 그녀는 ONE(?)에 몇 없는 예언가 중 한 명이다.

용사 시절 때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얼굴을 마주했던 건 레벨 500언저리 즈음이었나, 던전 근처에서 만난 것 단 한 번이었는데, 그녀는 우리에게 대뜸 서대륙에서 남쪽으로 움직이면 있는 해안. 그곳으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예언자라는 자들의 말의 무게를 실감해본 적도 없었고, 마왕군 다음 출몰 지역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또한 던전을 들리며 움직일 생각이었던 터라 그녀의 말을 따르기엔 동선 낭비가 극심했다.

그리고 3일 후, 우리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던 것을 미친듯이 후회했다.

남대륙에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었다. 수만 명이 해수(??)를 대동한 토텔리의 부관에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고, 뒤늦게 그곳에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바다가 피로 적셔졌고, 주민들은 우리를 원망했다.

그 이후부터는 카넬루아의 예언을 재는 일 없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애초에 카넬루아가 실렉티스라면.

예언이라는 희미한 성질의 것 보다는 그분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꼭두각시 중 한 명이라면 어떨까.

허무맹랑한 추측만은 아닌 게 근거는 몇 있다.

이재홍은 카넬루아의 명령을 받고 김철수를 추격했었다 말했다.

실렉티스였던 김철수, 그리고 그의 케어를 바라는 척 모든 용사를 그와 만나게 해 최종 전투를 설계했던 장본인이 카넬루아다.

또한, 요정이 던전에 대해 빠삭한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 중 몇 개는 마왕군이 직접 관리하던 던전이다. 그 위치는 굉장히 불분명하고 세간에 드러나 있지 않아야 할 터인데, 카넬루아는 의심이 갈 정도로 이 던전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왕군과 내통했다면? 마왕군에도 실렉티스가 있었더라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감각에 의존한 느낌도 있지만 아마 빗나가진 않으리라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카넬루아는 실렉티스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님!!”

넬피가 애교 많은 딸이라는 걸 증명하듯 쪼르르 날아가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고, 카넬루아는 그녀를 쓰다듬으며 평안하면서도 품위 있는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평안하셨나요 주술 용사님?”

“...예. 덕분에 더럽게 평안했죠.”

“다행이네요. 사담 싫어하시는 마법 용사님이 계시니 곧장 궁금한 걸 알려드릴까 하는데.”

우아하게 웃음을 포갠다.

그에 썩 불쾌감을 느꼈다.

“실렉티스와 그분에 대해 캐내고자 찾아오신 거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이제와 숨겨 뭐할까요.”

그녀는 옷 앞섬을 살짝 풀어헤치곤 맨들맨들한 가슴팍을 보여줬다.

“체통 지키기엔 부끄러운 자리에 문신이 있어서 낯 뜨거워지네요. 증명은 했으리라 믿어요.”

그곳에는 뱀 문신이 있었다. 실렉티스의 상징.

얘기가 길어질 테니 앉으라며 통나무로 만든 의자를 가리켰다.

각오는 했지만 적잖이 충격인 내용이 많았다.

실렉티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

메이블과의 문답에서 들었던 평화를 위한 집단 마왕군이라는 대답과 양상이 비슷했다.

역시나 마왕군과 실렉티스는 엮여 있는 걸까.

퍼즐 맞추기는 뒤로 미루고, 일단은 실렉티스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그 평화가 무어냐 물었다. 그때 돌아오는 대답은 더 충격적이었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분의 비위를 맞추는 거예요. 그분이 이 세계에 정을 떼지 않을 수 있게. 언제까지나 ONE(?)의 용사와 마왕 대립 구도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그 길로 용사와 마왕군을 인도하는 게 실렉티스죠.”

디안은 문신이나 실렉티스에 대해 보거나 들어선 안 되기에 저 멀리에 넬피와 떨어져 있고, 이재홍은 굉장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도 그분이라는 새끼한테 놀아났다는 거야?”

“의미는 맞지만 거친 표현은 자제하세요. 경고입니다.”

“...알았어. 그럼 여기서 질문. 그분이 도대체 뭐 하는 놈...이 아니라, 뭐 하는 사람인데?”

언제나 들었던 의문.

김철수까지 정신 계열 마법으로 조종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란 말인가.

카넬루아는 용사와 마왕군 대립 구도를 몇 차례나 지켜보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그럼 아무리 적어도 몇 세기는 관통한 인물일 터, 인간이라면 내 스승이나 검호 홀라처럼 초월자일 것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드래곤이나 요정, 정령 같은 고등한 종족일 것이다.

“신이에요.”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신?”

“네, 그 분은 신이에요.”

“언제부터 신이 된 겁니까?”

나는 실렉티스가 그분을 신으로 지칭하는 줄만 알았다.

이 세계에 종교는 있으나, 그 끝은 대부분 더러웠다.

대표적인 서대륙의 폐허. 신을 받들던 그들은 그 교회의 잔해물에 깔려서 죽었다.

진정 신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신도들을 죽이진 않았겠지.

나는 지구에서도 무신론자다. 신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그 사상은 ONE(?)에서도 적용된다.

하지만.

“창조신 큐(Q), 그리고 그를 모시던 네 명의 신이자 큐(Q)의 자식. 칸, 창판, 하이라, 테다리안. 이들에 대한 신화는 들어봤을 테죠.”

“그거 소설 아니야?”

“인간들에 의해 각색된 부분은 있겠죠. 허나 명확한 사실이자 역사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큐에게 태어난 네 명의 신은,

성미가 포악하던 큐에게 반기를 들었고.

100개의 밤낮이 바뀔 기다란 전투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전쟁은 태초의 전쟁이라 불린다.

“하지만 빠트린 게 있죠. 그의 자식은 다섯 명이었습니다.”

“불륜이라도 저질렀나.”

“주술 용사님.”

“알았어, 조용히 하면 되잖아.”

“...그 자식의 이름은 에이브(AYV), 허약한 몸도 몸이지만, 다섯 남매 중 막내이기에 그는 아무런 입지가 없었어요.”

넬피는 슬쩍 시선을 흘리다가 다시끔 말을 이었다.

“큐(Q)를 죽이고 네 남매는 그의 시신을 나눠 가졌습니다. 맞이인 칸은 그의 눈을 가져갔고, 차남인 창판은 그의 심장을 뽑아갔어요. 셋째인 하이라는 그의 가죽을 가져갔고, 넷째인 테다리안은 그의 뼈를 수거했죠.”

“...그런 패륜이 없네. 근데 자식은 다섯 명이었다며? 에이브는 뭘 가져갔는데.”

“그는... 마땅히 가져갈 게 없었어요. 같이 목숨을 걸고 큐(Q)를 죽였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죠. 하지만 그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설령 아무것도 못 가져가더라도 괜찮으니 그는 남매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죠.”

“아비를 죽인 주제에 평화를 운운하는 것도 우습군요. 피는 피를 불러올 뿐인데.”

“...조금 놀랐네요. 마법 용사님이 정확히 대화의 맥을 짚으셨거든요. 주술 용사님은 불필요한 얘기만 덧붙일 뿐이었는데.”

“또 저 새끼만 비행기 태우네.”

이재홍의 툴툴거림을 뒤로하고 카넬루아는 말했다.

“네 남매는 큐(Q)의 잔해가 지닌 힘을 토대로 ONE(?)을 네 개로 나누어 가꾸기 시작했어요.”

“잔해에 무슨 힘이 있던 겁니까?”

“정확히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이 시초의 아티팩트에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던가요? 이들은 서로가 지닌 잔해를 탐냈고, 대륙을 탐했어요. 이 다음은 예상이 가시죠?”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검술 용사님, 맞아요. 이들은 다시 전쟁을 펼쳤죠. 그걸 100년 전쟁이라고 칭해요. 큐(Q)에 의해 ONE(?)이 탄생하고 100년 즈음 되었을 때 벌어졌던 전쟁이라 붙은 이름이죠. 전쟁의 끝마무리는 결국 붉은색이었어요. 칸은 창판의 심장을 필두로 한 마법에 불타 죽었고, 창판은 하이라의 놀라우리만치 지독한 생명력에 무릎을 꿇었어요. 하이라는 테다리안의 날카로운 뼈와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온몸으로 피를 토해냈고, 테다리안은 칸의 몸놀림을 따라갈 수 없었죠.”

“다 죽었겠군요.”

“네, 하지만 한 명의 신이 남아있잖아요?”

에이브(AYV).

“그분이 ONE(?)과 실렉티스를 이끄시는 신입니다.”

‘만악의 근원.’

마왕군을 통해 시민을 죽인 것도,

그 마왕군, 메이블을 비롯한 이들을 우리 손에 죽게끔 만든 것도,

김철수를 조종해 몬스터를 싹 살해한 것도 모두.

에이브(AYV)의 짓이다.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어디에나 계시죠. 설령,”

화아아악­!

하늘이 불을 끄듯 어두워졌다.

그리곤 일행이 하나 둘 시야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땅이 흔들린다.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쪼개진다.

그와 동시에 쿵­ 쿵쿵­ 무언가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비석이었다. 그 비석이 지진을 일으킨다. 카넬루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당장 이곳에도 계시고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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