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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56화 (56/152)

〈 56화 〉 마왕군은 부활한다(1부 完)

* * *

“생각보다 난관이었군. 마법 용사가 저토록 무른 놈일줄 몰랐어.”

플라금의 국왕, 플라티넘이 양옆에 양과 음을 끼곤 터무니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맞소, 하마터면 검술 용사의 손에 죽을뻔했지, 그건 그분이 원한 전개가 아니었는데.”

남대륙의 국왕이 기다란 옷자락을 의자 뒤로 넘기곤 냉수를 들이켰다.

“다르칸은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가?! 그분이 환멸을 느꼈더라면 어쩔 뻔 봤나!”

위대한 마도사이자 대마장으로 불리는 노인,

그는 기다란 머리칼을 모자 위로 다시끔 정돈하며 말했다. 격양된 어조가 그가 흥분했음을 알렸다.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말이 많군요, 늙은이.”

마찬가지로 장발, 허나 피보다도 짙은 붉은색의 머리칼을 뒤로 묶어올린 장정.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하다. 민소매 갑옷 덕인지 더욱 부각되는 우락부락한 근육, 칼로 찌르면 칼이 부러질 것만 같은 탄력 넘치는 몸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그 흉이 진 팔 안쪽에 얌전히 누워있는 폴암, ‘전갈’이라고 불린다.

“뭐, 뭐? 잡견 주제에 본좌에게 그 무슨 말버릇인가?!”

대마장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의 씰룩거리는 새하얀 눈썹은 장정을 향했다.

“잡견... 늙은 여우한테 듣기에는 썩 반갑지 않은 소리인데.”

“지금 본좌를 모욕하는 겐가! 명에 여한이 없나 보지!”

“그쪽이야말로 슬슬 관 짤 시기 되지 않았나? 다 늙어서 곧 저 국왕님처럼 되겠지.”

장정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초점이 풀린 채 멍하게 앉아있는 서대륙의 제국 필라기리아의 국왕 아들러 프리브룩스가 있었다.

“......”

“영유아랑 다름 없는 게 보이십니까? 내 좁은 소견으로는 대마장님 미래이지 않을까 싶은데.”

“한 치 앞도 못 보는 눈 먼 잡견이 잘도 떠드는구나, 내 직접 입을 찢어주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여우, 끝내 줄을 시기질투하다가 명을 다하겠지. 괜히 움직여서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기를 권하오.”

“주둥이 놀리는 걸 보면, 머잖아 본좌에 의해 네놈 명이 다하겠군!”

“자신 있다면 건너오시죠? 쌍수 들고 환영할테니.”

“그만들 하시오.”

각 잡힌 제복과 군모를 쓴 북대륙의 총독이 말하자 분위기가 싹 얼어붙었다.

그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곤 장정과 대마장에게 말했다.

“어차피 화상 회의이지 않소. 괜히 감정 붉힐 바에야 서로 영상을 차단해두면 될 것 아닌가.”

“이봐 미련 덩어리, 본좌가 어째서 저 경박한 개한테서 물러서야 하는지 납득 되게 설명하게.”

“......”

미련 덩어리라 불린 총독이 지긋하게 대마장을 바라봤다.

“귀 먹은 늙은이, 나부터 차단하도록 하지.”

“큭큭...”

총독의 말을 듣자 장정 옆에 있던 황색 머리칼을 지닌 강아지상 미인이 입가를 가리고 베시시 웃었다.

그에 장정이 묻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절렜다. 허나 자존심 강한 대마장은 쉽사리 넘길 생각이 없었다.

“네년은 뭐가 웃긴가!”

“어머 뻔뻔하셔라. 뭐가 웃기냐뇨? 대마장님이 개그 남발하시잖아요?”

“본좌가 무슨 농을 했다는 겐가!!”

“윽, 귀 아파. 노망난 늙은이는 나도 차단!”

여성은 싱글벙글 미소를 띄우며 대마장을 차단했고, 그녀의 시야에서 한 명이 슉 지워졌다.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독 작은 여성 한 명,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이제야 진정된 것 같군요.”

요정족의 여왕 카넬루아,

그녀가 말하자 잡음이 사라진다. 총독 이상으로 그녀는 목소리가 컸다.

“늑대 길드장님과 대마장님은 만날 때마다 다투시네요.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에요.”

“크. 크흠... 본좌가 어린 개를 상대로 못난 모습을 보였군.”

“저도 늙은 여우한테 너무 반응했군요, 주의하겠습니다.”

“독수리 길드장님도 기름 붓는 행동은 자제하세요.”

“앗, 죄송합니다~”

장정, 늑대의 길드장.

여성, 독수리의 길드장.

이들을 비롯해 그자존심 강한 대마장마저도 카넬루아에게 꼬리를 내렸다.

“그분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그전에, 이번 회의부터는 다르칸을 볼 수 없을 거예요.”

“......”

모두가 침묵한다. 카넬루아는 고개를 갸웃하곤 오색으로 빛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입을 열었다. ‘통보 사항은 전달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지 않았을까.

“다르칸은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제 실렉티스로 있을 이유가 없죠. 더군다나 그는 우리 에텔론티코스(εθελοντικ)처럼 자의로 그분을 따른 게 아닌, 의도치 않게 그분을 따르게 된 롤로스(ρλο)니까요.”

“그럴듯한 주장이군, 이제 그는 쓸모가 없어졌다는 건가?”

“네, 그는 실렉티스에서 탈퇴했습니다. 실상 추방이라 표현하는 게 더 맞겠죠. 실렉티스에 관련한 모든 기억을 지울 것이며, 그 기억을 끄집어내려 시도한다면 강한 두통을 느끼게 될 것이고, 정도가 심해진다면 정신병자가 될 것입니다. 저 정도의 요정이 아니고서야 없앨 수도 없는 지독한 주술을 적용한 상태죠.”

카넬루아는 날갯짓이 피곤했는지 바닥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기품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또다시 울렸다.

“다시 본론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6세대 악이 탄생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말이죠.”

“흠... 마왕역을 누가 맡는 게지? 흑마장 때 모든 악마는 사형당했지 않는가. 마계에 신 세대 악마가 태어났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법 용사가 악마를 소환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어떻게 유도할 셈이지?”

“후후후... 대마장님은 역시 우수하세요. 정말 똑똑하시죠.”

깔깔깔!

대마장을 제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는 이유 모를 비웃음에 얼굴로 물음표를 띄웠지만,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는 없었다. 카넬루아만이 차분한 설명을 이어갈 뿐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마법 용사는 철두철미한 사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다음 마왕이 누구냐고 묻는데 어째 동문서답인가 여왕!”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죠. 대마장님은 더 배우셔야겠어요. 회의에 집중하시거나.”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었잖는가!”

“참 답답하셔라, 귀 똑바로 열으세요. 다음 마왕은 말이죠­”

*

암두시아스,

그녀는 비이린의 주민들과 상당 친해졌다.

음악을 사랑하는 악마로서,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삶에 만족을 느꼈다.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면 모두가 꺄르르 웃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를 보탠다.

그것은 하나의 노래가 돠었고, 비이린에서는 언제나 신나는 선율이 울렸다.

암두시아스는 완전히 비이린에 적응했다. 오히려 그 중심이라기에 손색 없다.

1년이라는 시간은 이들의 따스한 사랑에 슬슬 익숙해지기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과거 마왕성에서 당했던 그 끔찍한 기억은 모두 사랑과 평화, 풍족이라는 사랑스러운 단어에 뒤덮여 모습을 감췄고, 암두시아스의 얼굴에는 불안과 걱정 대신 웃음과 행복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 삶이 즐거웠다.

인자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이그니스를 비롯한 빛의 정령과 숲의 정령들.

가끔씩 놀러올 때마다 먹을 걸 부랴부랴 싸들고 오는 그린 드래곤.

곤충이나 작은 새와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엘프.

언제나 밝은 요정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고 따스했다.

그녀는 이 삶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길 간절히 바랐다. 세계수에 손을 얹고 밤마다 기도했다.

더는 마왕 같은 존재가 부활하지 않길, 이 비이린이 부디 언제까지나 평화를 뜻하는 장소가 되길.

*

“이곳도 오랜만이네, 그치 오빠.”

“1년도 안 됐지만... 너 말대로 시간이 많이 흐른 기분이야.”

“그야 우리는 많은 일을 했으니. 준비는 모두 끝났고, 마지막 계단만 오르면 이제부터 2막 시작이야. 이말은 해두고 싶네. 고생 많았다. 윤상, 재홍, 세린아.”

“지껄이는 중에 실례지만, 그쪽이 기억 잃어서 더 좆고생했어요 씨팔.”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거진 10개월 만에 보는 이들.

조금은 낯빛이 바뀌어 있었다. 모르는 얼굴도 섞여 있었고.

“내 이름은 다르칸이야. 악쿤, 바비룬, 진 처럼 용사 중 하나였지. 검을 주로 사용해. 반가워 암두시아스.”

“끼에­ 끼에­!”

등에 검을 든 사내는 누구이며, 그의 어깨에 붙어 있는 검은색 작은 용은 누구일까?

암두시아스는 퍽 붙임성 좋은 성격까지는 아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달갑지 않다.

그녀는 아는 얼굴을 찾아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그녀의 시야에 맺힌 건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

그는 답지 않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홍아, 얼굴 풀어.”

“...너는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모르냐?”

성질 사나운 강아지 같은 바비룬 필라이트,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구겼다.

오랜만에 본 얼굴인데, 제대로 인사하기는 커녕 구긴 얼굴이라니, 암두시아스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허나 반응이 시큰둥했다.

“...내가 준 옷 입고 있었네.”

“시끄러!”

바비룬을 마구 때려봤지만 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제대로 때린 것도 아니니 풀릴 턱도 없었다.

허나, 이렇게 까불 때마다 바비룬은 장난스럽게 암두시아스를 딱밤을 때리거나 저속한(이그니스의 표현이다.) 말을 많이 뱉어서 재미있었다. 그 반응을 기대했던 것인데 지금의 바비룬은 너무나도 반응이 딱딱했다.

“힝.”

암두시아스는 제풀에 지쳐 바비룬에게서 벗어났다.

그러자 표정이 더욱 미묘해졌다. 그 의도를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기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진!”

“그래, 언니야~ 잘 지냈지?”

진 키아라의 품에 달려들자 그녀는 영차 소리와 함께 암두시아스를 꽉 끌어안고는 이리저리 몸을 흔들거나 허공에 잠시 던졌다가 받는 등 그녀를 놀아주고 있었다.

암두시아스는 진 키아라가 참 좋았다.

애교를 잘 받아주는 점도 있지만 너무 예쁜 사람이기에 저절로 끌렸다.

“진! 만져봐도 돼?”

“응? 뭘 말하는 걸까?”

암두시아스는 문득 자기 가슴팍을 어루만지더니 짧은 팔을 뻗어 진 키아라의 가슴을 만졌다.

잠시 눈을 감고 두 가슴을 비교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바닥에 척 내려오곤 중얼거렸다.

“역시 비슷해.”

“...푸핫­!”

스릉­

그녀의 옆에 있던 바비룬이 기습을 맞은 듯 너무나 크게 웃었다가 진 키아라의 바늘이 목에 닿자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비룬에게는 이미 토라진 채다. 암두시아스는 시선을 돌렸다.

진 키아라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빛나는 외모를 지닌 푸른 머리칼의 여성.

심지어 그녀에게 안기면 진에게 안긴 것보다 훨씬 부드럽다. 암두시아스는 눈앞의 여성의 가슴팍을 가장 선호한다.

“디안!!”

“...오랜만이야.”

그녀는 왠지 힘이 없었다.

암두시아스가 쪼르르 달려와 허리춤을 껴안자 마지못해 받아주기는 했으나 바비룬 비슷하게 시원치 못한 반응이었다.

“디안.”

그때 암두시아스가 가장 껄끄러워 하는 남성이 다가와 디안을 불렀다.

“...네 참모장님.”

“고마워.”

디안은 암두시아스를 살짝 밀어내 자리에서 벗어났고, 그 찰나의 순간 보였던 표정은 바비룬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암두시아스. 나 기억 나?”

“짜증나는 사람.”

“...큼큼,그런 기억으로 남았을 줄은 몰랐는데.”

악쿤 토든,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다리를 구부려 암두시아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에 벗어나려 뒤로 돌았지만, 악쿤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끄으응­ 힘을 써보지만 악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으으, 이거 놔! 놀러 갈 거야!”

“그건 곤란해.”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빼보지만, 조그만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줄다리기와 양상이 비슷한 힘싸움, 결과는 일방적이었고 암두시아스는 팔목이 아팠다.

“흐에엥­!”

암두시아스는 히끅 소리와 함께 펑펑 울기 시작했다.

“...말할 게 있어. 아니, 있습니다.”

우는 그녀를 달래기는 커녕 어느새 생긴 나무 의자에 앉혀두곤 악쿤은 암두시아스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울음을 그치세요. 이제부턴 품위를 지키셔야 합니다.”

“......?”

의미 불명의 소리를 내뱉는 악쿤, 눈물이 맺혀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뒤에 있는 디안과 바비룬, 진을 바라봤지만 이들도 암두시아스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사드립니다.”

악쿤은 머뭇거리다가 한 박자 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근엄하게 말했다.

“신 마왕군 참모장 악쿤 토든입니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신 마왕군 군단장 다르칸입니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신 마왕군 그림자 수색대 대장 진 키아라예요. 잘 부탁해 마왕님.”

“...신 마왕군...... 씨발.”

바비룬이 못해먹겠다는 듯, 연이은 인사를 잇지 않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암두시아스에게 다가왔다.

“생소한 말이 많지? 존나 간단하게 설명할게. 내가 오늘부터 널 지킬 방패야. 언제까지나 죽는 그날까지 널 지켜낼 거야. 빌어처먹을 운명이지만, 개 좆 같지만 씨발...”

그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흐른다. 분을 겨우 삭히고자 노력해봤지만 핏방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주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지만 암두시아스를 불안에 떨게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애써 미소를 지어보려 노력하고 있었기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고, 그에 암두시아스가 꺄르륵 웃으며 기분이 풀어졌다.

“바비룬! 얼굴 완전 우스꽝스러워!!”

“...그래, 웃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잘 부탁할게 암두시아스.”

그는 어색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아니, 마왕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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