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마왕군은 부활한다
* * *
“비록 마지막은 아쉽지만.”
콰앙!
김철수의 검이 내 몸을 지나가기 전, 첫 번째 방패를 그의 검 경로에 가져다대니 그의 검에 내 몸이 짓눌렸다.
“그 시그니처를 다시 쓸 수는 없나 보네.”
쾅! 쾅!
내 방패를 망치질하듯 강하게 내려친다. 난 그의 검을 겨우 막아내며 바닥에 짓눌리고 있었고, 제아무리 10대 마도구라고 한들 노도 같은 공격을 막아서는 건 언제까지나 가능하지 않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불안정하다.
비늘이 탈피하듯 후두둑 떨어져 나가고 있으며, 머리의 뿔은 혹 정도의 크기가 되었고, 날개는 다 찢어져 볼품없다는 말을 떠나 거적때기가 되었다.
“궁지에 몰렸구나, 이렇게 끝이야?”
“...{ χορ με σπαθ 칼춤 (θ) }”
카드드득!
얼음 검이 김철수를 난도하려 달려들지만, 그는 최적의 경로로 검을 휘둘러 모든 얼음 검을 깨부쉈다.
겨우 기어다니며 김철수에게서 벗어나본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그렇게 느리지 않았다.
그는 내 머리칼을 확 붙잡았다. 방패를 들어 그의 검을 막아서봤지만, 그는 발로 방패를 밀쳐 바닥에 떨어트리곤 내게 검을 뻗었다.
“우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구나.”
길었던 이야기, 총 7년이 넘었던 용사 영웅담.
그 마지막이 같은 동료이자 내 버팀목이었던 철수 형에게 베어져 죽는 거라면,
이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다.
그는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ONE(?)에서의 내 모든 삶이 모두 허구였다면,
그분이라는 놈의 뜻이었다면 어떨 것 같냐고.
상상하기도 역했지만,
그분이라는 놈의 존재가 메이블과 마왕마저도 관통하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메이블이 마왕군을 부활시킨 것과, 그들을 물리친 내가 마탑에서 벗어나 시간 역행과 실렉티스의 자취를 쫓는 등 멍청한 삽질을 통해 도달한 몬스터 해방이라는 답마저도.
모두 거짓이라는 걸까,
나 또한 짜여진 각본 속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걸까.
“윤상아, 너는 언제나 자신만의 정의를 뚜렷하게 관철했었지.”
차가운 검날이 목에 닿는다.
스르륵 그 날 벼린 검날에 닿은 내 피부가 부드럽게 잘린다.
그의 도신을 타고 내 피가 바닥에 점을 찍는다.
뚝, 뚝, 뚝뚝, 뚝뚝뚝, 뚝뚝뚝뚝.
핏방울 떨어지는 속도가 가속된다.
김철수가 검에 힘을 실을 수록 내 살점은 더욱 깊숙하게 잘려나갔으며, 차가운 도신과는 역접되게 나는 목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 굳건한 너만의 정의가 곧 너 약점이야.”
석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검은 내 목을 파고든다.
나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처박고 눈더미에 뉘여있을 뿐이다.
“...날 죽이려고 했어야지 멍청아.”
찰팍
머리칼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목에서 무언가가 치솟는다. 검이 내 목을 관통한 것일까?
아니다, 나는 급하게 목을 부여잡고 울컥이는 피를 붙들고 있었다.
“마탑주님!!”
“상처가 너무 깊어요!”
디안과 넬피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피에 얼룩져 떡진 머리카락과 시뻘겋게 물든 갑옷과 얼굴, 코피를 주륵 흘리며 추위에 조금은 둔하게 움직이는 김철수가 눈물에 범벅이 돼 엉망인 얼굴로 날 바라본다.
“...네가 유일했어.”
김철수는 고개를 붕붕 휘두르곤 무언가 다짐했다는 듯 검을 정직하게 잡았다.
내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김철수의 손에 들린 붉게 물든 검이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선명해졌다.
휭!
검 휘둘리는 소리.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
*
“멍청한 윤상 오빠. 도와주냐고 물어봤을 때 고개 끄덕였어야지.”
‘...?’
몸이 편안해졌나 싶었는데, 죽은 게 아니었다.
어느샌가 일행은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게 아닌가?’
가만보니 내 곁에 일행이 다가온 게 아니라, 일행 곁에 내 몸이 옮겨진 거였다.
저 멀리에는 인수(人?)형으로 김철수를 붙든 채 이빨을 들이미는 이재홍이 있었고, 최세린과 디안, 넬피는 내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다.
“시그니처 쓴 순간부터 가뿐하게 이길 수 있었잖아. 멍청하게 간보다가 시기 놓쳐서 죽을뻔하니까 기분 좋아?”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안 하고... 괜찮아지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예요. 정말이지, 마법 용사님 죽는 줄 알고 간 졸인 거 생각하면...”
“......”
나는 눈을 꿈뻑이며 이들을 바라봤다.
죽은 줄 알았더니, 용케도 살았다.
최세린이 구해준 것일까? 그녀의 피가 엉겨붙은 손바닥을 보자 의혹은 사라졌다.
“재홍이도 저러고 있지만, 철수 아저씨 안 죽게끔 생명력 나눠주는 중이거든.”
고개를 다시 이재홍에게로 돌려보니, 그는 확실히 김철수를 제압한 채로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웃기는 양상이지만, 김철수 또한 조금 난폭하게 치유받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솔직히, 오빠가 양념 다 쳐둬서 나 혼자서도 아저씨 제압할 수 있었어. 죽이는 건 더 쉬웠고.”
최세린이 끄응 소리를 내며 내 몸을 일으켰다.
근력이 모자라진 않을 텐데, 그냥 추임새 같은 게 아닐까 속으로 삼켰다.
“재홍 오빠도 마찬가지였겠지, 나보다도 더 이를 악물고 있었거든. 오빠 목에 검 들어갔을 때에도 말이야. 금방이라도 달려들기 직전의 야수 같았는데... 가만 보면 야수 맞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상관 없나.’라 중얼거렸다.
“우리는 애써 참았어. 오빠가 철수 아저씨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거든. 설령 실패하여 죽는다 한들, 그게 오빠가 자초한 길이라고 믿었어. 오빠 제자랑 공주님도 끝내 참았지.”
“...하지만 난 실패했어.”
“맞아, 오빠는 실패했어. 어르고 달래기에는 이미 아저씨 깊은 곳에 그분이 자리하고 있었고, 제압하기에는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지. 끝내 오빠 시그니처는 부작용을 보였고, 결과는 아저씨가 역할의 끝맺음을 맺을 뻔했어.”
“...뻔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저씨도 동시에 기절했거든. 조금만 늦었어도 오빠는 듀라한 신세였을 텐데.”
동시에 쓰러졌다고?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무언가 등골이 시리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같은 용사를 상대로 봐준다는 생각이 가당키나 할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촌철살인(???人),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빠진 면상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최세린.
그녀는 내 볼을 어루만졌다.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조금만 고개를 뻗어도 입술이 닿을 거리.
뜨거운 숨이 볼에 닿자 침이 꿀꺽 삼켜진다.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최세린은 얼굴은 천천하고도 끈적하게 더 다가왔다.
나는 숨을 꾹 참으며 왜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
입술에 느껴지는 촉촉한 감각.
...당혹감과 백지에 물감을 쏟은 듯 얼룩진 감정에 천천히 눈을 떴다.
“푸후후... 바보야, 뭘 기대한 거야?”
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내 목을 홱 잡아당겨 입을 귀에 가져다대곤 속삭였다.
“이번에는 꼭 이겨.”
“...실패한다면?”
“글쎄? 하나만 말해둘게. 우리가 주는 마지막 기회야. 아저씨를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으면, 오빠 선에서 끝내라고. 나는 오빠 죽이려고 했던 아저씨 용서하기 힘들 것 같거든.”
그녀는 손가락으로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법진을 같이 머금은 채 최세린을 겨냥하는 디안을 가리켰다.
“얘도 마찬가지고, 재홍 오빠도 마찬가지야. 모두 아저씨 내버려둘 생각 없어.”
‘디안은 너를 노리는 것 같은데.’
디안이 왜 분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세린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헝클였다.
그와 동시에 최세린은 눈으로 쫓기도 어려운 무슨 동작을 펼쳤고, 마법진은 모두 부서졌다.
“건드리지 마세요.”
디안은 손길을 홱 뿌리치며 성질을 부렸다.
그에 최세린은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을 뒤로하며 저 멀리의 김철수를 바라보자 확실히 나와 비슷한 상태였다.
이재홍이 생명력을 사용하여 김철수를 치유한 것이다.
심지어 공정성을 위해 나와 비슷한 강도로 치유했다는 게 감각으로 느껴졌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건 김철수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나에 대한 것이다.
대등한 조건에서 승리해야만,
그래야만 내 의견이 설득력을 가진다.
“뭐해? 철수 오빠도 일어났잖아.”
최세린이 손끝으로 김철수를 가리켰다.
“확실히 해. 이번에도 봐준 거 티냈다간 내가 숨통 끊어버릴 거니까.”
“...알았어.”
휘이이이
마법진을 둥실 띄우며 푸석푸석 눈을 밟으며 김철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재홍도 혀를 차곤 김철수에게서 비켜섰고, 그는 바닥에 꽂힌 검을 집어 내게로 다가왔다.
이게 마지막이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
내 마법이 폭발한다, 그에 김철수의 검격이 맞선다.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의 오러, 내 마력, 비단 그것만 포함한 얘기가 아니다.
“그래! 이제야 마음먹었구나!”
김철수가 광기에 찌들어 외쳤다.
그의 검이 내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려고 했다.
푸슉!
그때 몰래 바닥에 설치한 마법진에서 날카로운 얼음 송곳이 턱을 노렸다.
가볍게 막아낸다. 아니, 녹여냈다.
치이이...
그 주변에는 이글거리는 열기가 가득했고, 그 열기에 녹아내리는 눈더미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물씬 새어나왔다.
메이블의 흑염이나 타나토스의 폭염처럼 짙은 맹렬한 화염,
그의 오러 성질이냐고? 아니다.
지금 그의 팔목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내 마법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거 네가 준 거야! 기억나 윤상아?”
“같이 쟁취한 거야. 내가 준 게 아니야.”
“아니! 우리 용사 일행의 리더는 너였어! 재홍이가 진득한 욕을 뱉고, 세린이도 툴툴거렸지만 우리는 너 덕에 마왕을 죽일 수 있었어! 네가 없었더라면 몇 년이나 더 걸렸겠지! 어쩌면 지금도 물리치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분도 얼마나 안심했는지 알아? 마법 용사 덕에 전개가 빠르다고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화륵.
잔잔한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팔목은 더 뜨거운 화염을 분출했다.
“다섯 번째 붉은 팔찌.”
모든 걸 불사르는 불의 정령왕을 담고 있는 10대 마도구 중 하나.
다른 정령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가장 포악하기로 유명한 화염의 정령왕 샐리온.
녀석은 전설의 대장장이 맥라룬 드파니온과 지독한 악연이다.
샐리온은 맥라룬의 마을을 불살랐다.
주제에 뻔뻔하게 그의 용광로가 아늑하다며 안방처럼 눌러앉았다. 그게 맥라룬을 분노케 했다.
그 포악하면서도 멍청한 샐리온이 용광로에서 코까지 골며 자는 사이, 맥라룬은 재빠르게 팔찌에 샐리온의 몸을 쑤셔박았고, 그 결과가 다섯 번째 붉은 팔찌가 되었다.
““이 덕분에 위기도 많이 넘겼거든.””
그것이 김철수의 팔목에 있었다.
내 첫 번째 푸른 방패와 동시에 쟁취한 아티팩트.
“...동화(?化) 상태구나.”
““역시 알아보네?””
김철수의 목소리가 끓는 기름 같은 샐리온의 목소리와 겹쳐 울린다.
지독한 열기와 새하얀 연기는 어느샌가 시커먼 연기가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열기에 땀이 질질 흐른다.
마법진이 일렁거리는 게 아닐까 착각마저 일었고, 어지러움도 겪었다.
치이이이
도신이 용광로에서 꺼낸 듯 시뻘겋게 물들었고, 그 검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곳의 눈바닥은 타내렸다.
어색하게 푹 패인 땅도 마찬가지다.
검은 연기와 함께 땅마저도 매마른다. 끔찍한 열기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그분이 말씀하셨어. 이게 마지막 한 합일 거라고.””
그분이라는 놈에게는 끝없는 살의를 느끼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에 동감했다.
나도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 다르칸 류 오의 만월(?月) ]
김철수가 검을 둥글게 휘둘렀고, 그 반경에 뜨거운 아지랑이가 핀다.
만월보다는 태양에 가까운 공격, 그 기술이 내게 조금씩 다가온다.
“{ βαρ χινι 폭설 }”
내 속성에 가장 걸맞는 마법진을 준비하자 김철수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이미 파훼법을 알아냈다는 듯이 달려들던 자세를 잠시 무르곤 검을 고쳐잡는다. 공격을 회피하고 다음 마법진을 준비하는 사이 날 베어내겠다는 거다.
그에 나도 빙긋 웃어줬다.
“{ Ματαωση 캔슬 }”
마법진이 사르륵 사라진다. 그에 김철수는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달려들어보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냉기 속성 다음으로 자신있는 속성을 몇 년만에 꺼내들었다.
“{ χρωση 충전 }”
파직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심장 박동 뛰듯 내 주위에 새하얀 무언가가 번쩍인다.
김철수의 검이 내 앞까지 다가왔고, 열기에 어지러웠지만.
“{ βροντ 천둥 (α, υ+τ, ρ, ε) }”
쩌억!
강한 빛줄기 하나가 번쩍였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어깨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치이이이
푹신한 눈바닥이 녹아내리며 차가운 물을 쏟아냈고, 내 어깨는 시커멓게 물들었다.
“끄아아아!!”
어깨가 통째로 베였다. 고통에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이번에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겨우 붙들고 있다는 게 맞겠지, 무언가 한가닥만 놓치면 그대로 혼절할 것만 같았다.
겨우 버텨낸다.
죽을 것만 같다. 아니, 죽는다.
“......네가...”
내가 더 빠르지 못했더라면.
파직, 파지지직,
시커멓게 물든 몸에는 새하얗고 난폭한 전류가 흐른다.
“...이겼네......”
김철수는 머잖아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