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54화 (54/152)

〈 54화 〉 마왕군은 부활한다

* * *

저 흔들림없는 전투귀를 제압하려면,

나도 죽일 기세로 달려들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χιονοθελλα ­ 눈보라

휘이이이­!!

하늘이 혼란해지고, 눈송이가 요동친다.

그 중심에는 김철수가 있었다. 시그니처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위력은 강력했지만, 이 마법의 주인은 실상 화이트 드래곤이다.

그 새하얀 용들의 우두머리였던 자이키릭,

그의 심장을 삼킨 현재로서는 이보다 매끄럽게 발동되는 마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빙결 속성에 특화되어 있다.

자이키릭과 내 상성은 최상이다. 위력이 발군이라는 말이다.

그 마법을 통해 발생한 여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자,

눈보라라는 아름다운 단어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기술이라는 걸 시원하게 인정했다.

흡사 재해에 가깝다.

태풍이 몰아치고, 강가는 얼어붙었으며 하늘이 그리는 새하얀 한 폭의 그림은 안정감은 커녕 공포를 심고 있다.

그러한 마법에 휩싸인 김철수, 제아무리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다. 본인 능력 밖의 일은 다짐이나 열의 따위로 극복할 수 없다.

[ 다르칸 류 방어술 제 1식 ­ 갑옷 ]

그러니, 결론은 이러하다.

오러를 터트리며 내 마법의 중앙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그의 발 뒤에는 눈이 구겨진 선명한 자국이 새겨졌으나 금세 새로운 눈으로 뒤덮여 발자국은 사라졌다.

그는 짙은 탄식을 뱉었다. 얼어붙은 땀방울을 오러로 밀어냈음에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쏟아지는 눈에 그의 몸이 뒤덮인다.

“...피곤하다. 너도 그렇겠지? 시간 끄는 거 질색이잖아. 피차.”

그는 다가오는 클론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내며 조금은 피곤하단 어조로 말했다.

내가 간을 봤듯, 김철수 또한 전력이 아니었다.

오러를 터트리는 것만으로 나름 각오하고 던진 마법을 단박에 깨부술 줄이야, 나는 저 건너편에 있는 사내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골머리가 아프다. 얼마나 더 밀어붙여야 겨우 죽지 않을 만큼만 저 사내를 제압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자체가 모두 부질 없는 짓일까.

궁지에 몰린 것처럼 내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내야 이 사내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김철수는 방금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지독하다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 나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 이유 모를 불쾌감은 언제 사라지는 걸까,

내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지만 왜 진정할 수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나에 대한 시험일까?

그분이라는 놈이 나를 가늠하고자 김철수를 자의로 쓰러지지도 못하는 좀비로 만드는 것일까?

어느 무엇도 확정할 수 없었다. 이 불쾌한 기분을 모두 김철수에게 찾는 것 자체가 멍청한 행동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도와줄까?”

그때 최세린의 한마디, 그녀는 날 보며 쿡쿡 웃고 있었다.

내가 김철수에게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다는 걸 포착한 그녀는 내 내면을 꿰뚫고 들어왔다.

이재홍은 검에 얻어맞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디안과 넬피도 마찬가지다. 그녀들도 내가 최세린의 말에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할 터였다.

‘도와줄까’라고?

김철수는 끈질기지만, 나를 포함해 2명의 용사가 달려들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용사뿐만일까, 넬피? 아니, 과하다. 거기까지도 필요 없다.

디안만 가세하더라도 단박에 그를 무릎 꿇릴 수 있다.

일행의 도움을 받아 이번 전투에서 김철수를 제압한들, 시초부터 그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온전치 못한 몸, 연이은 전투에 지쳐버린 체력, 또한 기억을 되찾은지 기껏해야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정신력.

어느 방면에나 그는 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요소가 없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도움을 구한다?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이미 내 클론이 달려들고 있다. 저런 클론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세린이 ‘그럴 것 같았어.’라 중얼거리곤 이재홍의 몸 뒤에 숨었다.

“...윤상아.”

내 대답을 들은 김철수가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퍽 꽂곤 멈췄다.

“푸흐... 아직도 다짐을 못했구나.”

클론 두 개를 동시에 베어내곤 빈혈에 걸린 것처럼 비틀거리곤 풀썩­ 한쪽 무릎을 눈바닥에 꿇었다. 그는 헥헥거리며 겨우 검에 지탱하며 숨을 쉬고 있다. 말을 내뱉는 것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더 말 할 힘도 없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야... 내가 문신에 갉아먹히던 시간에 너는 미래를 위해 정진했구나... 대견해, 한편으론 존경스러워.”

그가 멋대로 떠드는 동안 나는 그를 마무리할 최후의 마법을 준비했다.

이건 만화나 설화가 아니다. 비장한 대사를 일일히 듣고 있을 내적 여유는 없다.

거대한 두 개의 마법진이 회전한다.

8서클의 마법 대폭발과 영원 감옥.

이 마법이 발동하는 순간, 용사의 영웅담은 끝맺음을 지으리라.

나는 용사였던 주제에 몬스터를 해방할 테니까,

김철수의 문신을 지운 후 아직까지도 불쾌하게 남아있던 의문을 마침내 없애버릴 테니까.

“근데 말이야... 이런 생각은 안 해봤어?”

αινια φυλακ & Μεγλη κρηξη ­ 영원 감옥 & 대폭발!

콰아아아!

김철수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주변에 꾸멀꾸멀 다가가던 클론과 연계하여 내 마법이 작열했다. 거대한 폭발과 동시에 하늘을 뒤덮은 마법진에서 거대하며 두터운 철창이 쿵 떨어지며 그의 몸을 덮는다.

눈먼지가 떨어진 후 서서히 보이는 건 감옥에 갇힌 김철수의 모습이었다.

그는 눈더미에 몸이 뒤덮인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나? 탐지 마법을 발동하자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아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눈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잖아.”

후웅­ 후웅­

그는 검을 두 번 휘둘렀고, 눈더미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여기에서 그쳤을까, 그의 검 반경에서 벗어나 있던 클론 마저도 검격에 잘려나갔다.

침을 꼴깍 삼켰다. 김철수는 몸을 뒤덮은 눈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그 모든 게 그분의 뜻이라면 어떨 것 같아?”

βαρ χινι! ­ 폭설!

후두두둑­!!

마티고스를 쓰러트린 마법이 김철수에게 명중한다.

그는 다시 검을 휘두르며 눈을 떨쳐내곤 내게 한 발짝 다가온다.

“최세린을 찾아간 것도 그분의 뜻이라면­”

ικρωμα ­ 단두대 (τ,ε)

쿵!!

거대한 얼음 칼날이 그의 목에 떨어진다.

꽈장창! 그는 검을 세워 그 단두대를 부숴버리곤 내게 한 발짝 다가온다.

“시간 역행을 통해 마왕군의 진의를 파헤치는 것도 그분의 뜻이라면­”

Ταχεα ψξη ­ 급속 냉각 (α,τ,ρ)

싸아아아...

그의 경로에 설치해둔 마법진이 빛나며 그의 몸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눈 하나 꿈뻑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그의 제압은 끝날 테지.

콰창­!

그런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김철수는 오러를 터트리는 것만으로 내 냉기를 깨부수곤 다시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악마를 과거에서 데려온 것도 그분의 뜻이라면­”

[안 닥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법을 무작위로 그에게 던졌으나,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검을 휘두르며 터덜터덜 내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내가 한 행동이 모두 그분이라는 놈의 레일 위를 걸었을 뿐이라고?

헛소리, 모두 내가 선택한 길이다. 모두 내가 개척한 길이고, 모두 내 능력으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뤄낸 것이다.

“이그니스를 설득해 비이린에 악마를 맡긴 것도, 너의 제자가 정신 마법에 당한 것도, 그를 알고 네가 격분한 것도, 실렉티스의 흔적을 찾아 허우적 대던 것도, 이재홍을 만나 플라티넘을 협박한 것도,”

[마지막 경고야.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몬스터가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몬스터 해방을 꿈꾼 것도, 그를 위해 다시 동대륙에 발을 디딘 것도, 나를 만나 설득하고자 파라소스를 건너온 것도, 심지어.”

철컹­

눈에 뒤덮인 그의 에고 소드가 빛나기 시작한다.

“너와 나, 그리고 재홍이와 세린이마저 이 세계에 전송된 것마저도 그분의 뜻이라면. 마왕군에게 대적하기 위해 사냥개로 길러지는 것 또한 그분이 설계하신 것이라면.”

[난 분명히 말했어. 그만하는 게 좋을 거라고!]

“ONE(?)에서 우리가 겪은 모든 게 모두 그분의 뜻이었다면, 앞으로의 삶도 그분에게 선택되어야 한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날 흔들려는 생각이거든­]

쿵­

말을 잇기도 전, 내 심장이 요동친다.

‘...아직, 아직 안 돼.’

속으로 되뇌인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쿵­ 심장 박동 소리, 그 박자에 맞춰 내 몸이 모래사장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유일한 변수는 너의 성장이었어. 원래 나는 너를 단박에 제압하고, 끝내 비틀거리다 쓰러졌어야 했거든. 그게 그분이 원한 시나리오였지.”

[이, 이럴 수는...]

“내가 너에게 존경스럽다고 했었지? 내가 그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너는 그분을 놀래켰거든, 그래서 그랬어. 나는 네가 존경스러워. 너는 이 세계를 바꿀 힘을 지니고 있거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5분만... 아니, 1분만이라도...!“

시간을 끌었음 안 됐다.

아직 내 시그니처는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불안정한 상태다.

부작용이 존재한다. 그 부작용을 아는 건 나와 최세린 뿐이다만, 이건 누가 알고 말고를 떠나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자 내 미숙함이다.

비늘이 뒤틀리더니 바닥에 투둑 떨어진다.

날개가 불타버린 재처럼 파스스 사라진다.

클론 태반이 고통에 몸서리치며 녹아내린다.

심장이 흐릿하게 빛난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꾸멀꾸멀 새어나오며 텅 비어버린 지팡이 윗부분에 형태를 잡아간다.

자이키릭의 심장이 다시 아티팩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행됨과 동시에 내 시그니처와 내 몸은 파괴되고 있었다.

“...저거, 형변 풀릴 때 같은데.”

이재홍이 말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세를 잡았다.

“맞아, 윤상 오빠 시그니처가 끝나가는 거야.”

최세린은 담백하게 대답하며 날 구하고자 허벅지에 매달린 바늘 가방과 독 가방에 손을 뻗었고, 디안 주변에 요란하게 뒤틀리는 마법진은 그녀의 감정을 대변했다.

두 여인 모두 당장이라도 김철수에게 달려들 기세다.

최악의 타이밍에 내 마법이 풀려간다. 이렇게 황당하게 위기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현실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제 내 차례네.”

터벅 터벅­

한 발짝, 한 발짝씩.

차근차근 내게 다가오며 김철수는 검을 잡았다.

“너는 그분의 기대 이상이었어. 비록 마지막은 아쉽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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