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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51화 (51/152)

〈 51화 〉 마왕군은 부활한다

* * *

김철수는 오랜시간 잠들었던 먹보와 대화를 위해 녀석을 깨우고자 무언가 노력하고 있었고, 최세린은 날 조용히 쳐다본다. 그에 입모양으로 ‘왜?’라 물었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아무 말도 없었다.

이재홍은 넬피와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고, 디안은 아직도 오두막에 들어오길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몬스터 해방이라는 과제가 김철수라는 벽에 막혔다는 것을 느끼며 말이다.

좋아, 되짚어보자.

난 마왕군의 진의를 알기 위해 피땀나는 시간을 보냈고, 결국 9서클에 도달했다.

그리곤 과거로 시간 역행을 떠나 메이블과 직접 대화를 나눴고, 그의 일지를 가져왔다.

마침내 그들의 속내를 알아냈다. 일지와 메이블의 대답을 퍼즐 맞추듯 엮어보아 나온 결론은­

1. 마왕군은 멸망했었고, 그 마왕군을 다시 일으켜세운건 메이블을 포함한 4명의 사천왕이다.

2. 마왕 단탈리온은 실상 마음 여린 소녀였고, 간판에 불과했다. 마왕군은 사천왕을 필두로, 그 중에서도 메이블을 중심으로 이뤄졌었다.

3. 이들이 마왕군을 세운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세계의 평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마지막 4번.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거다.

4. 마왕군에는 악한 자가 없었다. 이들은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데미투에서 사람을 죽였던 고블린이나, 처녀를 윤간하고 청년을 고깃덩이로 만든 오크나, 군인의 목을 베어 창끝에 매달아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보냈던 다크엘프나.

‘너희는... 너희는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ONE(?)으로 향하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며어언......!’

암전의 단검 긴이나,

‘이,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 데...’

광포의 드루이드 브룩이나,

‘메이블과 단탈리온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내가 더 강했더라면... 너희가 감히 넘볼 수도 없... 게끔...... 강... 했...’

귀검사 토텔리 프리온이나,

‘부탁이다. 제발... 제발...! 제발 마왕만은 살려줘. 그대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재앙은 모조리 내가 계획했으니 마왕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른 마왕군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제발 마왕만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어줘. 부탁이다... 제발, 제발 마왕만은 살려주길 바란다. 제발, 제발...!!’

내 가장 큰 적수였던 흑마장이자 마왕군 참모장 메이블 토진.

‘...흑. 흐으윽... 메이블, 메이블...! 어째서, 날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당신이 어째서...! 메이블, 토텔리! 브룩! 긴! 어째서? 어째서어?! 나를 이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꼭 구해준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당신들이 어째서 이렇게 먼저 가버리셨나요?!’

아무런 반항도 없이 죽었던 비운의 마왕.

단탈리온마저도.

몬스터 해방을 다짐했던 순간부터 이들의 모순된 행동의 진위에 도달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알고 있다. 이들은 아무도 세계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는 걸.

세상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마왕군이라는 필요악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맡을 악역은 몬스터와 사천왕, 그리고 단탈리온이 유일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을 테고 몬스터는 핍박받았을 테니까.

세계는 암담해졌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들이 이유의 전부라면 난 여전히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보다 나은 방법이 많다. 몬스터를 해방하고, 사천왕과 마왕이 지켜내는 수준에서만 그친다던가. 인간에게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두던가.

이들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천왕은 9서클에 도달한 지금의 나도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니까.

왜 그리 멍청한 짓을 했지? 필요악이 필요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 누구도 원하지도 않는 인간 살상 명령을 내리고, 세계 지배 야욕을 내비치며, 용사가 성장하여 결국엔 저들을 죽일 수 있게끔 기다리는, 자신의 생명줄을 담보로 한 괴팍한 모험을 떠난 이유가 도대체 뭘까?

이윽고 난 한 가지 가능성을 도출했다.

이들이 마왕군을 설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이유이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김철수와 방금 넬피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자 촉이 왔다.

나는 서둘러 가방 속에서 메이블 일지를 꺼냈다.

20p 언저리 초반부.

계속 읽고 또 읽어도 묘하게 이해가 안 됐었던 그 구절. 그래, 여기였다.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 또한... 그분이라는 놈에 의해 계획되고 있다니, 썩 불쾌하기 짝이 없다.’라는 구절 말이다.

‘...설마?’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난 이재홍을 치우곤 넬피에게 말했다.

“아이 씨발, 왜 밀치고 지ㄹ­”

“넬피. 그분이라는 자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을 실렉티스라고 부른다고 했지?”

“앗... 지금 말씀하시면...”

넬피는 고개를 살짝 돌리곤 어색하게 웃으며 검술 용사를 바라봤다.

“곤란한...데...”

“윤상아 뭐라고?”

김철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뭐라고 했어?”

“실렉티스라고 했어요. 형이 좀 알 것 같은데요?”

“...글쎄,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분’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들, 그들의 몸 어딘가에는 문신이 있고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형 가슴팍에도.”

고개를 살짹 빼어 그의 가슴팍을 흘깃 바라보자 여전히 검은색 S자 문신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문신이 있네요.”

“...하하, 방금 들킨 것 같네. 아니, 들켰다는 표현도 이상해. 애초에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당황해서 말이 헛나온 거지, 이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흐리멍텅한 김철수의 표정이 바뀐다.

부상당했던 그때의 위압감, 그것이 지금의 김철수에게서 느껴진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지금 그는 정신 지배 마법에 당한 채가 아니라는 것.

지금 김철수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라는 것.

“물러나.”

나는 손짓으로 넬피와 최세린, 이재홍에게 물러날 것을 경고했다.

“전부 나가있어. 디안, 듣고 있지? 너도 멀리 떨어져.”

“윤상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섭섭하게 왜 그래.”

“섭섭한 건 저라고 말하고 싶네요. 언제부터 그 문신이 있었던 거죠?”

“이 문신이 왜 궁금해?”

“얘기하자면 길고요, 어쨌거나 그 문신을 지닌 놈들이 당최 뭐하는 놈들인지 지독하게 알고 싶었는데, 꼬리가 안 잡히더라고요. 드디어 꼬리를 잡았네요.”

“...역시 네가 제일 먼저 알게 되는구나.”

“나도 거의 동시에 알았으니까 정윤상 새끼 비행기 좀 태우지 말라고.”

이재홍이 투덜거리자 최세린이 그를 달래듯 팔을 잡아당겨 오두막 밖으로 끌었다.

그에 성질을 부리며 제발로 오두막 밖으로 향한다.

“그래, 방해꾼은 빠지면 되지? 옘병.”

“재홍아, 아주 멀리 떨어져서 디안이랑 넬피 지켜. 곧 위험해질 테니까.”

“알아서 할테니까 너 앞이나 신경 써 등신아.”

이재홍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긴장의 끈을 풀어선 안 된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표정이 바뀐 순간부터 느껴지는 위압감, 그리고 온몸에서 풀풀 풍기는 연황색 기와 흑빛 기.

태극처럼 그것들은 뒤섞여 김철수의 몸과 검을 뒤덮었다.

“실렉티스가 뭐냐고 물었지?”

“말해주시겠어요?”

“그래, 어차피 너도 언젠가 알아야 했으니까.”

철컹­

김철수가 검에 오러를 집중시킨다.

플라금에서 마주한 양과 음, 그들과 자세는 같았지만 긴장감이 차원이 다르다.

사천왕... 아니, 그 이상이다.

내 스승과 동격. 이미 증명했지만 타나토스와도 동격이다.

“‘그분’에 대해서는 아직 말해줄 수 없어. 순서가 아니거든. 네가 지금 알아야 할 건 딱 하나야. 그분은 나에게 어떤 역할을 원해왔어.”

“마왕군을 물리치는 거... 그다음의 역할을 말하는 거겠죠.”

“말이 잘 통하네. 내 역할이 뭔지 알아?”

김철수가 내뱉는 건 목적어도 불확실한 너무나도 추상적인 얘기지만, 어째서인지 대화가 진전이 된다.

‘어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지.’

내 말버릇 중 하나다.

“그분이 지금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몬스터 부활을 꿈꾼다는 거. 그리고 지금쯤 내가 몬스터를 학살해왔다는 사실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거라는데, 맞아?”

“...그분은 정체가 뭐죠? 신이라도 됩니까?”

“아직 말 못해. 사실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도 않고.”

스릉­

서슬벼린 날이 내 얼굴을 향한다.

내 주변에 시퍼런 마법진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분이 내게 원한 역할, 그건.”

순간적으로 김철수가 시야에서 벗어났다.

[ 다르칸 류 공격술 제 4식 ­ 만원 통닭 ]

카가가각­!

첫 번째 방패와 그의 검이 부딪친다.

이 검끝에서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날 죽이겠다는 군더더기 없는 살의가 말이다.

“용사와 대립하는 용사! 지금 이 상황이 그분이 내게 원한 그림이었지!”

“...크으윽! 형, 지금 제정신이야?!”

“물론이지! 나는 몇 년동안 이 순간만을 고대해왔어! 같이 사슴을 사냥해 식량을 확보하고 안도했을 때에도! 서로 땀범벅이 되어 물 젖은 생쥐 꼴이라며 깔깔 웃었을 때에도!”

카가가각­!

첫 번째 방패의 방어막과 김철수의 검이 요란하게 상호작용하며 오두막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잡초가 태풍이라도 맞은 듯 고개가 꺾인다. 오두막의 잔해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충격파의 여파를 증명했다.

얼룩진 강가에 강렬한 파동이 진다. 반격을 준비하던 마나조차도 방어막에 모두 쏟아냈다.

이성은 반격하라고 소리치지만,

왜일까.

지금은 이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진심을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김철수가 여지껏 품어온 썩은 고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물러서지 않는 건 그에 대한 존중이다.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같이 사선을 넘나들고 병에 담긴 술을 나눠 마시며 모닥불에 장작을 넣었을 때에도! 북대륙에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다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에도! 던전을 공략하고 주먹을 맞대며 우정을 확인했을 때에도!!”

억양은 고조되었지만, 그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 게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잘 전해져왔고, 그의 쓸데없이 정직한 성격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나올 수 있는 답이다.

“긴을 죽였을 때에도, 브룩을 죽였을 때에도, 토텔리를, 메이블을, 마왕을 죽였을 때마저도! 그전부터 내게는 그분이 하사하신 역할이 있었다! 이 세계에 변화를 꿈꾸는 너를 가로막는 가장 거대하면서도 친근했던 장애물이 될 순간만을 고대해왔다는 거야!!”

“함께 보냈던 모든 시간이 형에게는 가식이었다는 거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콰창­

무언가 깨지는 섬뜩한 소리,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안 돼!”

저 너머에서 들리는 디안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상황을 설명한다.

방어막이 깨졌다. 여지껏 느꼈던 것 중 가장 확실한 죽음을 직감했다.

“어쩔 수 없었어.”

푸우욱­

심장이 뜨겁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숨이 막힌다.

고개를 내려 가슴팍을 향했다.

“나는 네가 참 좋았어. 그래서 그럴까? 더 안타까워. 진심이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뇌가 따라가지 못한다.

이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커, 커헉...”

김철수의 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쿨럭, 입으로 피를 토했다.

“왜... 그분은 내게 널 막아서라는 역할을 주신 걸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겨우 손을 뻗어봤지만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원망스럽게도...”

눈가가 붉어져 있다.

철퍽­!

검이 뽑혔고, 묘한 시원함과 함께 바닥이 가까워진다.

쿵!

코가 얼얼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조금은 편했다.

눈꺼풀이 무겁다.

졸음이 쏟아진다.

“스승님­!!!!!”

눈이 감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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