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49화 (49/152)

〈 49화 〉 악(?)!

* * *

정윤상의 마법진, 그 마법진에 대응하는 메이블의 카드 모양 마법진.

패배는 명확해 보였다. 체급이 다르다는 말이 와닿는다.

정윤상의 마법 경지는 전대륙에서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걸 알고 있다.

기술적인 면이나, 마력의 정도나, 그 마법을 다루는 센스나.

어느 하나도 뒤질 게 전혀 없다. 뛰어나다면 뛰어난 거지. 과거 영웅 중 한 명인 줄이 악쿤을 제자로 삼은 것부터가 그에 대한 증명이었다.

허나 메이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검은 화염,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녹여버리는 지옥의 업화같은 맹렬한 불꽃이 돔을 휘감는다.

다가서지 않아도 그 열기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고, 트럼프 게임에서 패배해 우리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드니 큰 도움이 되긴 어려웠다.

정윤상이 헤쳐나가야 했다.

“벌써 끝인가?”

메이블의 말했듯 ‘가능하다면’.

둘의 능력치 차이는 명확했다. 마력적인 면이나, 마법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났다.

정윤상이 현재 다루는 마법진은 최대 10개.

메이블이 다루는 마법진은 39개. 더군다나 15개의 마법진은 우리 일행의 발목을 묶기 위해 꾸준히 사용중이니 마법진의 갯수 차이만 해도 4배가 넘게 차이난다.

그렇다고 정윤상이 10개의 마법진을 메이블보다 더 탁월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다.

메이블이 정윤상에 비해 39개의 마법진을 더 둔탁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다.

정윤상의 10개의 짙푸른 마법진은 만들어지는 즉시 메이블에 의해 붉게 물들며 역산되어 무산되었고, 메이블의 마법진은 차차 완성되며 정윤상에게 노도 같은 공격을 쏟아냈다.

첫 번째 방패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잿더미가 되어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첫 번째 방패라고 한들, 메이블의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흑염을 언제까지나 버텨내리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심지어 첫 번째 방패를 가동하는 순간만큼은 메이블에게 공격을 쏟아낼 수 없다.

그걸 모를 정윤상이 아니다. 그는 메이블이 잠시 주문 읊는 것을 멈추었을 때를 솜씨 좋게 노려 첫 번째 방패를 거두고 마법진 10개를 여태껏 다루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재빠르게 회전시켜 역산을 불가능하끔 하며 공격을 준비했다.

“이 마법으로 끝내주마 메이블!”

“그래! 마음껏 발버둥쳐라!!”

치이이이...

시퍼런 냉기가 피어오른다. 메이블은 카드를 거두어 방어막을 준비했다.

마법진에서 짙푸른 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얼어붙은 창들이 가속하여 메이블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카드를 통해 방어막을 세워 모두 막아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정윤상은 마법진을 더욱 가동했다.

메이블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선다.

그가 반복된다. 하지만 점점 지쳐가는 건 정윤상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주저앉았다. 그에게 다가가 메이블이 말했다.

“악쿤 토든,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왜 포기할 수 없지?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용사의 사명 때문인가?”

메이블이 성큼성큼 다가와 곤죽이 된 정윤상의 턱을 당겨 눈을 맞췄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마왕군을 물리치면 너희가 무슨 명예를 얻고 어떠한 보상을 얻는단 말인가.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너희는 인간의 사냥개일 뿐이며, 그 이상의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메이블!”

“안타깝다. 용사라는 명성에 취해 앞날을 보지 못하는가. 나를 죽이면 마왕 단탈리온을 죽일 테지, 그 이후는 어떻게 지낼 셈이지? 세계를 구해낸 용사라고 대우받을 줄 아는가? 대단한 착각이라고 얘기해주고 싶군. 물론 나를 죽이지도 못할 테지만.”

메이블이 턱을 잡은 손을 내려놓고 뒤돌아 걸어가며 말했다.

“비루한 운명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대들은 어째서 앞날을 보지 못하는가. 내 동료를 전부 죽인 주제에 어찌도 이리도 약하다는 말인가. 나는 너희 용사가 원망스럽다. 너희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원망스럽다는 말이다.”

뒤돌아 돔의 중심을 향해 걸어간다.

이미 전투의 승패는 정해졌다. 우리는 메이블을 이길 수 없다.

그의 마법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우리는 세계를 구하지 못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랬어야 했다.

메이블의 돌발행동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한편으로.”

메이블이 정윤상에게 겨눴던 마법진을 거뒀다.

“나는 너희를 동정한다.”

그는 울컥거리는 듯 고개를 돌리곤 말을 뱉었다.

“너희는... 너희만큼은 이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메이블은 정윤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라 ‘어딘가의 대마법사’ 악쿤 토든이여.”

“어딘가의 대마법사?”

“이 기구한 운명을 내 세대에서는 끊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끄, 끄으으­!!”

메이블이 또다시 몸부림치며 고통에 호소한다.

그 모습에 정윤상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나, 겨우 몸을 일으킨 이재홍이 범의 형상으로 변환하여 메이블의 허리춤을 물어뜯었고, 최세린이 바늘을 던져 그의 온몸에 마비를 걸었다.

공격당한 메이블은 휘청거리곤 나머지 한쪽 무릎마저 털썩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안간힘을 끌어내어 겨우 일어나 그의 목에 검을 겨눴고, 최세린과 이재홍은 바늘과 발톱을 그에게 겨눴다.

기적이라고 치부하기엔 의미심장했으나, 이 기회를 놓칠만큼 우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재홍의 송곳니에 물린 메이블의 옆구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최세린의 바늘이 박힌 메이블의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린다. 내 서늘한 검날이 닿은 메이블의 목이 경직되는 게 느껴진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우리는 승리했다. 메이블은 모종의 이유로 또다시 두통을 겪었고, 그덕에 우리는 마지막 사천왕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런 메이블.

그는 어느 순간부터 두통이 멈췄는지, 머리를 감싸안은 손을 풀며 목 놓아 외쳤다.

“끄, 끄으으으­! 이, 이제야 만족하십니까!! 끄, 끄으으으­!! 이, 이제야 만족하냐고 물었습니다!!”

허나, 대화의 대상은 우리가 아니었다. 메이블은 고해성사하듯 돔의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지긋지긋했습니다! 이 빌어처먹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결국 죽음 뿐이라니!!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린 것입니까!!”

메이블이 손을 꽉 움켜쥔다. 이미 마법진은 다 거둔 채였고, 우리는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는 드디어 죽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은 다음 순번에게 계승되겠죠! 이 빌어먹을 신이시여! 나는 당신을 저주할 겁니다! 반드시 당신 삶의 끝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끄, 끄아아아­!!”

그는 절망하듯 몸을 털썩 뉘였다.

머리를 싸매고 제자리에서 몸부림친다.

우리는 조용히 그의 몸부림을 지켜봤다. 머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고해성사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우리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특히 정윤상을 마주하며 말이다,

“악쿤, 아니... 정윤상. 부탁이 하나 있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정윤... 끄으으...!!”

메이블의 몸이 심장을 중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오징어 탄내가 진동한다. 정윤상이 말한 심장을 잃은 마법사의 최후, 그 최후를 메이블이 겪기 시작했다.

“끄, 끄... 하, 하나만 부탁하지! 부디, 부디!!”

화염에 휩싸인 그가 바닥에 기어다니는 채 어렵사리 손을 내밀어 정윤상에게 뻗었지만, 그는 손을 뿌리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에 메이블은 잠시 허망한 표정을 짓다가 머잖아 겸허한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온몸이 불타는 사내에게 나오기엔 힘든 반응이라 생각했지만...

글쎄. 죽음을 앞둔 적이 없기에 메이블이 지금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정윤상에게 말했다.

“부탁이다. 제발... 제발...! 제발 마왕만은 살려줘. 그대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재앙은 모조리 내가 계획했으니 마왕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른 마왕군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제발 마왕만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어줘. 부탁이다... 제발, 제발 마왕만은 살려주길 바란다. 제발, 제발...!!”

눈빛이 흔들리는 정윤상, 그의 앞을 가로막은건 이재홍이였다.

“개소리, 우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해한다. 그대들 생각은 누구보다 이해하지만, 제발 내 마지막 부탁을 들ㅇ­”

퍼석­

정윤상의 마법진이 메이블의 목을 통과했고, 그의 머리는 주르륵 미끌어져 바닥에 퉁 떨어졌다.

그리곤 붉은 웅덩이가 진다. 정윤상은 저도 모르게 나간 행동인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메이블은 죽였어야 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정윤상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잠시 후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마왕만 죽이면 끝인가.”

메이블의 시체를 뒤로하고 마왕성의 꼭대기로 올랐다.

거대한 마기를 앞에 두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그 안에는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단탈리온이 있었다.

‘...당신들이군요. 4인의 용사.’

그녀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건 깨닫지 못하는 건가.

그럴 것도 같은 게, 느껴지는 마기와 달리 마왕에게서는 아무런 투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천왕보다 더 강하리라 예상했던 그녀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었다.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끝입니다 마왕.”

나는 그녀에게 검끝을 들이밀었다.

“시발! 드디어 끝이구나­!!”

이재홍은 부분 형변으로 발톱을 드세우며 마왕을 조롱하듯 외쳤다.

“너무 힘들었지만... 드디어 끝났어요...”

최세린은 단검과 바늘은 고쳐잡으며 짙은 탄식을 뱉었다.

곧바로 따라붙은 건 정윤상의 마법진이었다.

머잖아 마왕의 목에 금빛 오러를 가득 두른 장검, 화염이 이글거리는 발톱, 독이 뚝뚝 떨어지는 단검, 냉기가 시퍼렇게 드리우는 마법진이 드리웠다.

이유 모를 고양감이 몸을 휘감는다. 우리는 아무런 반항도 없는 단탈리온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대들의 앞에 평화가 오기를...”

“...저주 치고는 이상한데? 인간의 평화를 해친 건 당신이야. 그런 주제에 평화를 운운하다니 정신이 나갔군. 우리는 차근차근 당신의 소중한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면서 성장했고, 마침내 그 강력한 사천왕마저도 찢어죽였다. 그런 우리의 평화를 바란다고?”

“...네. 부디 지금까지와는 달라지길 소망해요. 부디... 부디...”

“이게 뭔 개소리야? 나만 이해 안 돼?”

“걱정 마세요. 머지않아 이해하실 겁니다...”

“단체로 약이라도 했나? 방금 메이블도 너만은 꼭 살려달라고 그렇게 빌던데.”

“...흑. 흐으윽... 메이블, 메이블...! 어째서, 날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당신이 어째서...! 메이블, 토텔리! 브룩! 긴! 어째서? 어째서어?! 나를 이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꼭 구해준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당신들이 어째서 이렇게 먼저 가버리셨나요?!”

“...눈 뜨고 못 봐주겠네.”

그리곤 내 검이 불을 뿜으며 아무런 열의가 없는 단탈리온을 죽였다.

이렇게 용사 영웅담은 끝났다.

*

그런 줄만 알았다.

마왕군을 토벌하고, 플라금의 영주를 찾아가 지냈던 수년간.

나는 검술 교본을 완성하고 내 인간 우월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몬스터 사냥을 나섰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나는 몬스터 학살자라는 이명까지 얻어냈다.

그 이명에 더 신이 나 몬스터를 죽였다.

10마리? 아니, 100마리. 아니? 1,000마리! 아니지! 그보다 더, 더! 더! 더­! 더어어!

“안 돼, 안 되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되잡았다.

가슴팍의 문신이 내 정신을 지배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미쳐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허나 이 몬스터를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의 근간은 어디에서 비롯한 건지 생각하려면 너무 많은 걸 고민해야 했다. 나는 그런 행위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머리 아픈 일이라, 검을 휘두르면 멀끔해지는 걸.

그 검을 휘두르기에 가장 좋은 상대는 몬스터다.

나는 몬스터 학살을 멈추지 않았고 그 삶에 자부심을 느꼈다.

왜냐, ONE(?)은 인간이 지배해야 하니까.

인간에게 적대적인 몬스터는 죽여 마땅한 존재들이니까.

그게 전부였다. 날이 갈수록 몬스터를 향한 내 혐오는 짙어져 갔다.

그때 내게 다가온 충격은­

“이 모든 게 그대의 덕이네! 그대의 검술 교본이 나를 왕의 자리에 앉혔어! 아! 인사하게! 이 두 아이는 그대의 제자나 다름없으니 말일세!”

플라금의 영주... 아니, 플라금의 왕이 된 사내가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을 때다.

“양입니다.”

“음입니다.”

두 아이의 인사를 뒤로하고 플라티넘에게 다가갔다.

그는 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비틀거리고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왕관 비스름한 것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와락 껴안았다.

잠시 몬스터 학살을 다녀왔던 그 찰나의 순간,

플라티넘은 여행을 떠났던 그 며칠 사이 내 검술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인명을 해쳤다.

그에 격분하자 플라티넘은 어깨를 으쓱하곤 술이나 마시라며 넉살 좋은 척 딴청부릴 뿐이다. 주먹을 불끈 지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허나 양과 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상처투성이 소년 두 명이 내 앞을 가로막자 나는 검을 뽑을 수 없었다.

[ 다르칸 류 발도술 제 1식 ­ 출근길 ]

[ 다르칸 류 발도술 제 3식 ­ 마늘 빻기 ]

두 꼬마가 펼친 것은 내 검술이었다.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존재해왔던 내 검술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르칸!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이게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한 번은 용서할 테니 자리에 앉게!”

껄껄 웃으며 플라티넘은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손을 저으며 두 아이에게 신호를 보내자 이들도 검집에 다시 검을 꽂아넣고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하, 하하...”

나는 허망함에 털썩 주저앉았다.

같은 실렉티스, 플라티넘만은 내 사상과 같으리라 믿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했고, 몬스터를 증오했다. 그에서 그쳤어야 하지만, 플라티넘은 그러지 않았다.

인간을 죽였다. 내 검술 교본을 무기삼아 전쟁을 펼쳤고, 대살육을 벌였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플라티넘을 죽일까 고민했으나, 어째서인지 의욕이 나지 않아 관뒀다.

그날 나는 이프카리스토를 벗어났다.

그리곤 몬스터 학살의 삶을 이어갔다. 마치 내 검술에 죽어간 인간에 대한 속죄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길 2년,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몬스터를 병적으로 증오한다는 것을, 인간을 병적으로 우대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가슴팍을 바라봤다. 내가 몬스터를 마주할 때마다 심장 박동뛰듯 두근거리며 붉게 물드는 문신, 이 문신이 지금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몬스터를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글쎄.

어쩌면 나는 인간을 증오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어디서부터 문신의 영향인지, 어디서부터 내 자의인지.

나는 헛갈렸다. 그러나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생각을 그만뒀다.

얼마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없이 많이도 죽였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했다.

몬스터를 죽였고, 과거 마왕성으로 단신으로 처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었다.

떠돌이 용도 죽였다. 던전의 아티팩트를 지키는 수호자는 모두 도륙냈다.

그때만큼은 내 머리가 개운했으니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리라.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

다 죽이면 이 살의가 잠잠해지려나, 그렇다면 다크 드래곤들의 레어로 처들어가야겠다.

계획은 세워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멈춘 먹보를 손에 꽉 쥐고 파라소스로 다가갔다.

“어이, 오랜만이네 형.”

주술 용사가 찾아온 건 그때였다, 그는 옆의 조그마한 요정과 내가 타락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고, 나는 대꾸할 이유도 찾지 못했기에 말을 무시하며 파라소스로 다가갔다.

주술 용사는 나를 다시 말렸으나, 나는 완강했다.

저 용들마저도 다 죽인다면 이 끝없는 살의가 잠잠해질지도 몰라. 이 생각에 다다르자 멈추는 방법을 까먹었다.

나는 다크 드래곤의 수장과 그의 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무아지경으로 싸웠다. 내 투기를 내세우며, 내 살의를 거침없이 보여주며.

피가 살벌하게 튀기는 전투를 펼쳤다. 내 몸도 성치 않았으나, 적의 몸도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그리곤 슬슬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내 검이 먼저 다크 드래곤 로드, 타나토스의 목을 꿰뚫느냐. 그의 발톱이 내 목덜미를 찢어발기느냐.

간단한 문제였다.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검을 겨눴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마법... 용사...’

그는 내게 손바닥을 보이며 피투성이 타나토스를 진정시키곤 말했다.

“검술 용사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를 위해 바비룬과 요정족 공주 넬피도 그를 막아섰던 것 아닙니까.”

[저 자는 내 가족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압니다. 허나 그게 다르칸의 본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그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정신 계열 마법에... 더 설명하자니 시간이 없습니다. 검술 용사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파라소스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만­]

쿠웅­!

그때 갈색 용이 하늘에서 떨어져 타나토스의 몸을 짓이겼다.

그는 콧방귀를 뀌곤,

[큼, 우리 수장은 데려갈테니 알아서들 지지고 볶아라.]

갈색 용은 양쪽 어깨에 타나토스와 부상당한 카이루스를 업고 자신들의 레어로 돌아갔다.

그때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마법 용사,

“형 오랜만이에요.”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마법진을 겨누며 말했다.

“잘 지내진 못한 것 같네요.”

휘이이...

마법 용사를 중심으로 시퍼런 냉기가 소용돌이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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