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48화 (48/152)

〈 48화 〉 악(?)!

* * *

우리가 토텔리를 소환한 곳은 평야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그곳의 중심에 토텔리가 있었고, 완전한 평지였다.

그렇기에 함정을 더 숨겨두기 쉬웠는지 모르겠다.

평야의 바닥에는 정윤상과 최세린의 합작 함정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우리 눈에는 정윤상의 시야 공유 마법을 통해 그 함정의 위치가 보이지만, 토텔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게다가 부하도 대동하지 않은 완전한 4대1의 구도.

우리는 승리를 확신했다.

“...실수였어.”

절망이 도래했다.

정윤상과 이재홍은 피칠갑이 된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최세린은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을 내쉬며 밧줄로 그들의 몸을 끌어 조금이라도 토텔리에게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준비했어야지...”

평야는 설원에 크래바스가 생긴 것처럼 갈라졌고, 함정은 모조리 깨부숴진지 오래다.

검은 기를 풀풀 풍기며 내게 다가오는 토텔리, 나는 먹보를 강하게 움켜쥐며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내 결의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지, 대검의 끝을 바닥에 질질 끌며 무방비하게 다가왔다.

“너는... 강해... 하지만...”

카가가각­!

검이 부딪히며 내 몸이 뒤로 밀린다.

밀리는 건 몸뿐만이 아니다. 토텔리의 시커멓고 끈적한 기가 내 황색 기를 뒤덮는다.

“아직... 시기가 일렀지...”

[ ...다르칸 류 방어술 제 1식 ­ 갑옷! ]

콰아앙­!

겨우 끌어올린 기가 토텔리의 검은 기에 맞선다.

토텔리에게 조금이라도 인간 다운 면이 있더라면, 저놈의 기는 언젠가는 마를 것이다.

무한정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걸 기대하며 마지막 한줌의 기력마저 끌어내어 그에게 맞서봤지만,

“소용 없다니까...”

“쿠, 쿨럭!”

그의 기에 또 밀려나 입으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토텔리는 덜그럭거리는 갑옷의 신발로 내 등을 짓밟았고,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너희는... 내 동료를 죽였어... 봐줄 이유가 없잖아...”

“누가 봐달라고...”

기력을 끌어내 검을 콱 잡았고, 그대로 올려치듯이 자세를 잡으며­

“...말이나 했습니까!”

휘이이이­!

현재 내가 가진 기술 중 가장 강렬하다해서 오의라 이름붙인 3개의 동작, 그중 하나인 날개 찢기. 그 기술이 작열했고, 황야는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모래 파동이 일었다.

이대로 끝났어야 했다. 토텔리는 피를 토하며 죽었어야 했다.

“이건... 위험했어...”

모래 파동이 가라앉자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는 걸 느꼈다.

토텔리를 감싼 검은 기가 그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나보다 오러의 질과 양, 모든 게 적게 쳐도 3배는 차이난다는 걸 인정했다.

심지어 나는 단신으로 싸운 것도 아니었다. 분명 토텔리도 우리 협공에 지독하게 당해 온전치 못한 몸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기가 마르지 않았다는 것과, 놈의 검을 받아낼 때마다 내 몸이 쭉 뒤로 밀리는 것은 역시나...

놈은 나보다 한 단계 앞서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놈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검을 올렸다. 태양의 역광이 검에 비춰 내 눈을 찌른다.

나는 곧 죽는다. 검술의 경지도 차이나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보이는 격의 차이는 오러의 등급이었다.

내 오러 등급은,

“바보야... 소드 마스터가...”

토텔리의 오러 등급은,

“그랜드 마스터인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끝이구나. 조용히 눈을 감자­

[아직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선명한 목소리 한 줄기가 날 깨웠다.

카가각­!

먹보를 들어 토텔리의 검을 받아냈고, 그대로 힘싸움으로 밀고 가 녀석에게 대치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성장을...? 있을 수 없는데...”

토텔리의 당혹어린 눈이 보인다. 그에 이번에는 내가 싸늘한 시선으로 보답하며 검을 밀어내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팔을 내려다보자 놀랍게도 온몸이 개운하단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전투에 들어가기 전보다도 더 몸이 가벼웠다.

‘죽이자! 죽이자!’

먹보가 신나 외쳤고, 나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발을 제자리에서 몇 번 구른 후 보법을 통해 다시 토텔리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토텔리가 맞선다.

키기긱­ 내 검신이 놈의 가드까지 내려갔다. 토텔리는 겁 잡는 자세를 고쳐 이 구도를 끝내보려 했으나, 나도 그에 맞춰 팔을 비틀어 이 유리한 구도를 쭉 유지했다.

퍼석­

마침내 가드가 무너졌고, 그대로 토텔리의 좌수를 베었다.

놈의 손에서 피가 요란하게 솟구친다. 잘려나간 손목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를 밟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한쪽 팔을 잃어버린 토텔리, 검에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검끼리 격돌하며 불꽃이 피어오른다. 철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만이 평야에 울려퍼지고 있었고, 놈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내가 몰아붙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콰창!

토텔리의 검이 부러졌다. 도신은 쿵 떨어졌고, 토텔리는 갑옷의 건틀렛으로 내 검을 받아내려 했지만 그마저도 잘려나갔다.

바닥이 피로 물든다. 나는 그치지 않고 그의 양팔을 완전히 절단했다.

놈은 비틀거리며 오뚜기처럼 기운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인지, 아니면 그의 온몸을 휘감은 검은 오러의 덕인지 놈은 기절은 커녕 비명조차 뱉지 않았다.

“...마지막은 진심이었는데, 터무니 없어...”

토텔리가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약 150합. 중간부터는 아비규환이었기에 정확히 세보지는 못했다. 아마 더 하면 더하겠지.

한쪽팔로 용캐도 버텨낸 토텔리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먹보도 지쳤는지 졸리다며 자러 갔기에 그가 얼마나 끈질겼는지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너희도 같은 전철을 밟겠지.”

“저주입니까?”

“저주... 그래, 어쩌면 저주일수도... 나도 그 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니...”

“당신 정도의 강자가 무엇이 두려웠단 말입니까.”

“...글쎄,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편해... 내 역할을 끝냈으니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이야...”

토텔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서서히 뒤로 몸이 기울어진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등을 받혔다.

하지만 고개를 절레는 모습을 보자 살며시 손을 놓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네...”

토텔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메이블과 단탈리온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내가 더 강했더라면... 너희가 감히 넘볼 수도 없... 게끔...... 강... 했...”

토텔리는 스르륵 눈을 감았고, 그가 드러누운 자리를 중심으로 피웅덩이가 진다.

승리했지만 기분이 석연찮았던 건 왜일까.

*

다음 사천왕과의 만남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체력을 모두 회복했을 때쯤,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지, 우리 앞에 시커먼 차원문이 열렸고 정윤상은 그 차원문을 역산하여 반대편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메이블, 대놓고 함정 파놓을 거 모를 줄 알아?”

“나는 너희를 증오한다. 허나 심장에 맹세하지. 차원문 너머에는 그 어떠한 함정도 설치하지 않았다. 군단과 몬스터는 물렸다. 우리간의 정면 승부를 원한다는 뜻이다. 내 동료의 복수는 오로지 내 손으로 이룩하겠다. 자, 오너라 용사들이여! 잿더미를 만들어주마!”

차원문 너머 꽤나 흥분한 메이블의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그는 굉장히 격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이재홍이 혀를 차며 차원문에 닭뼈를 던졌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믿으라는 거냐?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어요.’ 이거랑 다를 게 뭐냐고. ‘마왕성에 초대하지만 함정 따위는 없이 정정당당하게 붙을 겁니다! 비록 당신들은 제 동료를 3명이나 도륙냈지만 말이죠!’ 이봐 메이블, 좆까는 소리하지 마.”

“천박한 말투를 보아하니 주술 용사구나, 이리 같은 놈이 마법사의 맹세에 대해 알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개새끼 말 본새 봐라. 야, 뭐 던질 거 없냐? 음식물 쓰레기 봉투 같은 거 있었더라면 지금 던져줬을 텐데.”

“입 닫거라 주술 용사, 내가 대답을 기대하는 건 마법 용사 악쿤 토든이다. 네놈은 마법사의 언약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나를 포함한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정윤상을 향한다.

그는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맞아, 심장에 걸고 한 언약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해. 그 언약을 스스로 어기거나 파기한다면 메이블 토진은 지금 잿더미가 되어 죽고 말 거야.”

정윤상은 자이키릭의 심장이 박힌 지팡이를 들었다.

“이 심장의 주인처럼 말이야. 마법사에겐 심장이 생명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어. 마나의 근간은 심장이니까.”

“그럼 윤상아, 저 말을 믿어도 된다는 거야?”

“네, 믿기 어렵겠지만 메이블이 하는 말은 사실이에요.”

그렇단 말이지... 나는 차원문 너머를 바라봤다.

일렁이는 차원문. 정윤상의 차원문은 푸른색이었지만, 메이블의 차원문은 불길한 흑색이었다.

마나 성질의 차이인 건가? 사실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지금은 정윤상의 판단에 맡기는 게 좋을 듯했다.

“...가죠.”

정윤상의 말에 일행이 침묵했다.

마지막 사천왕 메이블 토진. 그리고 기다리는 건 마왕이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드디어 세계를 구해내는 것이다.

“네가 거짓말 하는 새끼는 아니니까.”

먼저 나선 건 이재홍이었다.

“난 원래 오빠 믿어. 아, 이상하게 들으면 안 된다?”

그다음은 최세린이었고,

“...그래. 지금껏 윤상이 너 덕에 살아남았으니 이제 와서 의심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나도 발을 뻗었다.

머잖아 정윤상도 차원문을 통과했고, 우리를 반긴 건 거대한 돔이었다.

마왕성의 중심, 기를 탐지해봤지만 메이블의 말이 진실이었는지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 두 개만 빼고 말이다. 아주 강렬한 기운.

하나는 건물의 위에서, 아마 마왕성의 꼭대기겠지. 기다리는 건 단탈리온일 테고.

그렇다면 앞에 느껴지는 존재는...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나는 너희를 지독히도 바라봐왔지만.”

토텔리보다도 더욱 강한 기운이 눈앞에 풀풀 자태를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돔의 빛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 그는 찰랑이는 흑발을 쓸어넘기며 우리를 마주했다.

“...어라?”

이재홍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나이키 후드티 아니야? 그 위에 입은 건 항공점퍼... ONE(?)에 쇼핑몰이 있었나?”

“환각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마법도 아니야.”

정윤상도 혼란에 빠졌다.

마왕성 참모장의 복장은 지구에서나 볼 법한 복장이었다. 그게 우리를 당황케 했다.

그에 메이블이 의뭉을 떨며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왜 그런가? 내 옷이 별론가? 이 세계에 발 디뎠을 때 입었던 오­ 끄, 끄아아아아­!!”

갑자기 메이블이 주저앉으며 비명을 지른다.

지금이 기회다. 나와 이재홍은 검끝과 발톱을 메이블에게 향하며 달려들었는데, 눈앞에 거대한 얼음 벽이 생겼다.

“왜! 지금이 기회잖아 병신아!”

“...아니야, 잠시만.”

자멸할듯해서 내버려두려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 게 지금 공격하면 메이블을 순식간에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메이블이 브룩도 아니고, 그리 튼튼하진 않을 것이다. 저 몸부림 자체가 함정이라기에는 이질감이 있다.

[아직 때가 아니다.]

‘...?’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텔리와의 싸움 때도 들리던 목소리, 그땐 환청이었을까 넘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슨 때가 아니라는 겁니까?”

[의심하지 마라.]

“저 사람 왜 또 혼잣말하냐.”

“먹보랑 얘기하는 거 아닐까.”

머릿속에 울리는 중압감 넘치는 음성.

애타게 그 목소리의 정체를 향해 목놓아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지금 마지막 결전을 앞에 두고 신경쓸 대상은 아니었다.

메이블에게 집중해야 한다. 몸부림치던 메이블이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가며 비명을 멈췄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추한 꼴을 보였군. 유감이지만 이 옷에 대해서는 얘기해줄 수 없다.”

“웃기는 새끼네, 먼저 말 꺼낸 게 너야.”

이재홍 특유의 욕설을 듣자 메이블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우리를 살피곤 뒤의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마왕성의 2인자 참모장 메이블 토진이다. 흑마장(???)이라는 이명을 지니고 있지.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다만, 마왕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름이다.”

“마지막 전투에 앞서, 그대들이 마왕성에 방문해줬으니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하고 싶네.”

“간단한 게임이니 긴장하진 않아도 좋다. 같이 즐길 수 있기를 바라지.”

찹찹찹­

찰진 소리가 돔에 울린다. 기둥이 쿠구구구 소리와 함께 뒤흔들리며 돌조각과 먼지를 떨구기 시작한 것도 같은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그니처? 모, 모두 물러나!!”

정윤상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그는 첫 번째 방패를 펼쳐 일행의 앞을 틀어막았지만, 우리는 이미 메이블의 거미줄에 빠졌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 πρωττυπη μαγεα! ­ Trump. }”

사전동의도 없이 메이블이 마법진을 가동했다.

그러고 3분 남짓.

“이, 이게 무슨...”

얼마 안 가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게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말이다.

“메이블! 무슨 짓을 한 거냐!”

“간단해, 게임을 했을 뿐이야. 너를 제외한 검술, 주술, 암기 용사는 패배했고, 너만 승리했으니 살아남을 수 있던 거지.”

메이블이 빙긋 웃으며 트럼프 카드 같이 생긴 마법진을 정윤상에게 향했다.

그에 맞서는 정윤상의 마법진, 그 모든 마법진이 컴퓨터 파일을 이전으로 돌리듯 모두 역순으로 문자가 지워짐과 동시에 모형을 잃어가며 흐지브지 사라졌다.

“...역산.”

“마지막 전투야. 힘 좀 써보길 바라지.”

메이블의 마법진이 번쩍 빛났다.

“가능하다면 말이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