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악(?)!
* * *
마왕군은 물러났고, 우리는 알로켄에게 당한 정윤상을 둘러쌌다.
그의 온몸은 검은 마기에 찌들어 있었고, 우리는 흑마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이 탁기를 어떻게 거둬내야 하는가, 현재 정윤상이 얼만큼이나 위험한 것인가.
놔두면 죽을 수 있는 건가, 현재 우리들이 가진 힘으로 그를 치유할 수 있는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정윤상이 내 팔목을 꽉 붙잡았다.
“요정... 요정을 만나야... 으윽!!”
목적지는 정해졌다. 비이린을 향해 날아가고자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재홍의 등에 타서 쏜살같이 이동했다.
비이린까지 걸린 시간은 건물 위를 쏘다니다가 차원문을 앞에 두곤 사람을 밀쳐내며 먼저 이용한 덕인지 고작 1시간 밖에 안 걸렸으나, 그 1시간이 정윤상에게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끄아아악!!”
그의 몸을 두른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비이린에 막 도착하자 엘프 무리와 요정, 빛의 정령 등이 우리를 둘러쌌고 그들은 입을 틀어막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 커다란 충격을 먹은 듯했다.
그때 나타난 게 요정족 공주 넬피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녀에게 치유를 전담했다.
그리고 2시간 남짓, 그의 온몸에 있던 탁기는 없어졌다. 생명은 건졌다는 넬피의 말도 들려온다.
하지만 며칠간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행 사이에 암울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
“...개 씨발.”
쾅!
이재홍이 난폭하게 일어나 벽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형변도 하지 않은 맨주먹, 그 주먹이 부딪친 벽에서 새빨간 선 하나가 바닥으로 죽 그어졌다.
“강해졌다고 착각하고 있었어. 우리는 고작 사천왕 따까리 새끼 상대로도 밀리는 수준인데!”
“...재홍아.”
“판단이 조금만 늦었거나, 알로켄에게 보다 심하게 당했더라면 정윤상 뒈졌어. 씨발 지금 나만 좆 같아? 나만 기분 더럽냐고?!”
뭉쳐있던 고름이 터졌다.
ONE(?)에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죽을 위기를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몇 번 아찔했던 순간은 있었으나, 순발력이나 즉석에서 짠 작전으로 멋지게 해결해왔고, 적에게 크게 밀렸던 적은 없었다는 게 지금 일행에게 커다란 충격의 근원이었다.
알로켄에게 대차게 패배했다.
그의 변덕인지 엄살인지는 몰라도 퇴각하기를 포기하고 용사 절멸을 원했더라면 우리 이야기는 오늘 막을 내렸다.
“시간이 필요해... 더, 더 씨발, 아무도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을 만큼 레벨만 올리면 된다고. 그 마왕조차도 어린아이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존나게 강해져야 돼. 우린 아직도 부족해.”
“......”
입을 다물었다. 이재홍은 말은 거칠었지만, 이따금씩 상황을 꿰뚫는 말을 뱉곤 한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나도 알로켄을 상대하며 느꼈다.
우리의 기술은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험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격의 차이였다. 그리고...
“두 번째 하얀 거울.”
방심했었다는 게 이유.
그는 10대 마도구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정윤상이 전력을 다해 쏘아낸 마법을 향해 알로켄은 조그만 손거울을 비추었고, 환한 빛이 일행을 덮쳤다.
그리곤 모두가 쓰러졌다. 그때 알로켄이 정윤상의 머리를 당겨 강제로 시선을 맞췄고, 지금 이 사단이 난 것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우리는 알로켄을 만난 걸 천운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를 습격한 게 알로켄이 아니라 사천왕이었더라면 우리는 길가의 한줌 흙이 되었을 거다.
영웅이 죽었다?
세계는 멸망이다.
“강해질 방법을 찾으시나요?”
정윤상을 간호하던 넬피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들이밀며 방에서 나오곤 말을 걸었다.
“여러분들은 전송자니까 던전을 공략하면 될 거예요. 제가 알려드릴 던전들 주인의 흑마장의 부관과 수준이 비슷하거든요. 딱 여러분들이 합심한다면 겨우 승리할 수 있을 정도죠.”
“...알로켄과 동급.”
“그를 넘어서지 못하면 더 강해지지도 못 하겠죠? 라고 어머님이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건투를 빌게요. 마법 용사는 당분간 제가 돌볼 테니 걱정 마시고요. 아, 그리고 주술 용사님!”
그녀는 이재홍에게 다가와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아쟈홍의 표정이 꾸겨잔다.
“......너 엄만지 누군지 어디있냐?”
“덤벼들면 좋을 게 없을 텐데요? 라고 전해달라시네요.”
“......빌어먹을 씨발.”
“재홍아?”
여지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표정을 잔뜩 구긴 이재홍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빠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갈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가자.”
“괜찮은 거야?”
“아마도. 어, 괜찮아. 그러니까 묻지 마.”
뭐지.
캐묻고 싶진 않았기에 곧바로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2달.
우리는 마왕군이 출몰한 지역을 견제하며 총 12개의 던전을 깨부쉈고, 정윤상이 합류한 건 13번째 던전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지옥이었어.”
이재홍이 비이린을 떠나기 전 보였던 표정과 비슷했다.
뭔지 묻지 말라는 식의 표정. 그렇기에 정윤상을 제외한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듣게 된 얘기지만, 넬피가 극도의 새디스트라서 정윤상을 ‘은혜 갚으셔야죠?’라는 서두를 꺼내며 그렇게 괴롭혔다고.
하지만 놀고만 있던 건 아닌 듯했다.
요정은 마법과 관련한 종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나에 관한 것에는 일가견이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과 주술 사이의 기술, 축복과 저주는 자연에 있는 마나와 생명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넬피가 싫어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녀에게서 마나에 대한 걸 더욱 배워야 정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여 강해질동안 정윤상도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던전에 대한 최신 정보를 주인님에게ㅅ... 이 개 씨발!”
발작하듯 입을 후려치는 정윤상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는 바닥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쉬곤 품에서 여지껏 피지도 않았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말을 이었다.
“주인 어쩌고가 아니라 요정족 공주 넬피와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님에게서 정보를 얻어왔어.”
“쓸만한 것 좀 있디?”
정윤상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가로챈 이재홍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정윤상의 손에 들린 지도를 바라봤다.
“우리의 레벨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어. 용사 전용 아티팩트의 덕이겠지. 물론 전송자라는 이점이 가장 크겠지만 이미 알로켄은 넘어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거야. 하지만 사천왕을 상대로 압승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은 불명확해. 특히나 알로켄이 두 번째 하얀 거울을 지니고 있던 만큼 사천왕이 10대 마도구, 혹은 그보다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위협적인 마도구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건 예상 범주 안에 넣어야 해.”
“요점이 뭔데?”
최세린이 코와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표정은 찡그려진 채였다. 단순히 냄새가 싫은 모양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도 똑같이 간다.”
“무슨 말이야.”
“내가 정보를 얻어온 2가지의 던전은 10대 마도구가 잠들어 있는 곳이야. 하나는 첫 번째 푸른 방패.”
그가 가리킨 곳은 파라소스를 넘어서 있는 황야였다.
그는 지도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북대륙의 어딘가를 향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붉은 팔찌.”
마왕성과 인접한 지역 주피아, 그 지역을 품은 제국 칼리킬립스.
그가 가리킨 곳은 칼리킬립스의 총독이 머물고 있는 군사기지였다.
정확히는 그 속 지하.
‘...근데.’
일행 모두가 당황치는 않았다.
첫 번째 푸른 방패야, 던전을 깨부수면 되는 것이고.
칼리킬립스에서 우리에게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몰래 침입하지 뭐.”
일행 모두가 최세린을 바라봤다.
*
던전을 공략해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첫 번째 푸른 방패를 품은 던전은 정윤상의 한층 강해진 냉기 마법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칼리킬립스의 지하 던전에 잠들어있는 다섯 번째 붉은 팔찌는 최세린이 그곳의 군인을 모두 수면독을 바른 바늘로 모두 잠재워 손쉽게 진입했고, 이재홍과 내 활약으로 무너트렸다.
“첫 번째 방패는... 마나를 사용해야 하는 아티팩트네. 이건 내가 가지고, 다섯 번째 붉은 팔찌는... 딱히 조건이 없네. 이건 나 제하고 셋 중에서 가지면 되겠는데, 누가 좋으려나.”
“방패는 너만 쓸 수 있다라... 존나 수상한데? 솔직히 말하자, 너 알고 그랬지 개새끼야.”
“의도한 건 아닌데 의도했으면 또 어떻겠냐. 사천왕과의 전투에서 방어 마법은 내가 전담하면 되지. 어쨌거나 다음 던전으로 이동하자.”
“이 새끼 넬피랑 뒹굴더니 뻔뻔해졌네.”
“...씨발 새끼야, 너 뭐라고 했냐?”
둘의 다툼은 잦아졌으나, 이제는 예전처럼 치고받고 싸우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알로켄의 덕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 일행의 팀워크가 대단히 향상됐다.
그렇게 알로켄에게 패배한지 1년이 지났다.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알로켄의 오합지졸이라는 평은 정확했다. 우리는 4명의 협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서로에게 삐걱거리는 톱니바퀴들이었다.
그걸 조율했다. 조율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완전한 팀이 되었다고 자신한다.
정윤상은 일행의 무기에 출력 강화라는 마법 문자를 발동시켜 우리 공격을 한층 강하게 해주었고, 이재홍은 주술을 발동해 우리 일행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켰다.
나는 그들의 지원을 통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귀신같이 싸웠고, 최세린은 일행이 잘 싸울 수 있게 적을 묶어두거나 혈을 독 묻은 바늘과 단검으로 찔러 병신을 만드는 등 보조하는 데 전념했고, 이 사냥 방법은 아주 효율이 좋아 우리 평균 레벨은 알로켄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780 언저리에 도달했다.
그리곤 57번째 던전 공략을 축하하며 한 잔 걸치고 숙소에서 잠들었던 때였다.
‘당장 내 방으로 와, 적습이야.’
최세린이 단독으로 쓰는 방에서 원격 의사 전달을 통해 잠을 깨웠다.
마치 연습했던 것처럼 검을 챙겨 벽을 부숴버리고 최세린의 방에 도착하자 마찬가지로 벽이나 문을 부수고 최세린의 방에 침입한 정윤상과 이재홍이 보였다.
문 밖에는 요란하다. 손님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1층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점원은 잠시 올라왔다가 이재홍의 눈빛을 보곤 깨갱 물러나는 듯했다.
“어라, 수면제를 먹였는데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어.”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칠흑같은 검은 옷, 입에 헝겊을 두르고 생기 없는 잿빛 머리칼을 뒤로 묶어올린 호리호리한 사내.
그는 우리를 무표정으로 훑었다. 그에 정윤상이 대답해줬다.
“세린이가 눈치 줬거든. 점원이 수면제 먹이는 거라고.”
모든 독에 절대면역, 모든 독의 성분을 맛보는 것만으로 곧장 분석할 수 있는 암기 용사.
그녀가 우리에게 눈치를 주며 해독제를 주었고, 그걸 수면제 뒤섞인 맥주와 함께 목 너머로 넘겼다.
그리곤 자는 척, 역시 예상대로 적이 습격했다.
하지만... 저 사내일 줄은 몰랐다.
“너희는 나 초면이겠다. 맨날 분장하면서 따라다녔는데... 눈치채질 못하더라고. 이쪽 암기 용사도.”
“끄으으...”
태연하게 말하는 사내의 팔목에 힘줄이 드리운다.
사내의 손에 꽉 쥐어진 날카로운 비수는 침대에 누운 최세린의 가슴을 찌르고자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 반대쪽에서 비수를 집은 팔목을 붙잡은 채 표정을 구기는 최세린.
방을 살피니 창문이 열려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휘이
밤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
그 커튼이 잠시 사내의 몸을 가렸다.
스슥 스스슥
정윤상은 마법진을 그렸고.
철컹
‘적? 적이야?’
나는 검을 고쳐잡았다.
크르르륵...
이재홍이 주술을 통해 서서히 몸을 조그만 범으로 변환시키던 그때.
“내 이름은 긴이야.”
푸슉!
이재홍의 가슴팍에 여섯 개의 비수가 꼽혀 있었고, 그가 가슴팍을 내려보자 핏줄기가 여섯 갈래로 쏟아져 카펫을 적셨다.
어느새 이동한 거지? 주위를 둘러봤을 때 최세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내 방향으로 바늘을 던졌다.
킹, 키깅!
어둠 속에서 바늘 쳐내는 소리와 함께 달빛에 비친 쇠붙이가 반짝였다.
정윤상이 마법으로 방을 비추자 조금은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하잖아...”
사천왕 중 한 명인 암전의 단검 긴,
그는 기존의 내 방 테이블에 있던 마늘빵을 진귀한 물건인양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