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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43화 (43/152)

〈 43화 〉 악(?)!

* * *

이제 남은 건 내 아티팩트였고, 우리는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아티팩트.

그건 과거 파라소스와 용족을 지배하던 수장이자 타나토스의 아비인 블레드의 유품이다.

그걸 수호하는 것은 타나토스를 비롯한 다크 드래곤들이다. 그들에게서 유품을 강압적으로 빼앗는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고룡 자이키릭만 봐도 다 죽어가는 용이었음에도 박력이 넘쳤다.

아직 현역인 용들은 어떨까. 입 아프다.

이번 아티팩트는 최대의 난관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용사들의 무기를 빠르게 얻어내 최대한 파워업을 해둔 거였다.

“...근데,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정윤상이 우두커니 멈춰서서 말했고, 앞서 걸어가던 나를 포함한 일행은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뭐 때문이냐며 물었다.

“마왕군은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지금은 또 잠잠해지다니... 시기가 너무 수상하지 않아? 마치 우리가 아티팩트를 모두 얻고 강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야.”

“기우 아니야? 걔네가 우릴 기다려줄 이유가 뭐가 있는데.”

“없으니까 더 찝찝한 거지. 1년 전에도 그래. 사천왕이 직접 나타났다면 우리는 쪽도 못 쓰고 개죽음을 당했을 텐데, 어째서 자기 부하들을 보내는 거지? 그것도 우리 수준에 약간 버거울 정도로만 말이야. 처음부터 강한 부하를 보냈어도 우린 개죽음이었다고.”

“...나도 의심은 해봤는데.”

이재홍이 질겅질겅 씹던 오징어 버터 구이를 쫙 뜯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기다려주면 좋은 거 아니야? 저들끼리 ‘아티팩트라도 얻어야 그나마 우리 노리개 역할이라도 할 수 있지’ 라든가 개 시건방진 소리 내뱉으면서 팝콘이나 뜯고 있을 수도 있잖아. 방심한 놈만큼 죽이기 쉬운 놈이 없지.”

“...그래,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넌 항상 쓸데없는 걱정이 존나게 많아. 왜 시발, 스승 집에 선풍기는 끄고 나왔는지 걱정 안 되냐?”

“비꼬지 말고 새끼야.”

이재홍의 농담 덕에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우리는 지금 동대륙으로 가기 위해 차원문 행렬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직원으로 보이는 자가 크게 소리치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용사님들! 지금 바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줄 엄청 긴데 우리 먼저 타라고요?”

“예! 손님들도 이해하실 겁니다. 다름 아닌 이 세계를 구원할 용사님들이니까요!”

용사라는 말에 반응했는지, 행렬을 이루던 손님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더니 우레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용사님이다! 저분들이 용사님이었어!”

“어쩐지 늠름하더라! 용사님! 먼저 이용하세요!”

“진짜 용사야? 짝퉁 같은 거 아니야? 용사 사칭범들이 한둘이어야지.”

“아니야! 저 사나운 인상 남자가 주술 용사고, 나이 많은 사람이 검술 용사고, 미묘하게 잘생긴 사람이 마법 용사고, 저 예쁜데 굴곡 없는 사람이 암기 용사야! 분명해!”

한 행인의 말이 절묘하게 함성이 끊길 때쯤 들렸다.

최세린은 조용히 바늘을 손에 쥐었고, 정윤상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만류했다.

“죽여버릴 거야.”

“세린아, 보는 눈이 많아. 모르는 척 넘어가자.”

“괜찮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죽일 수 있어.”

“아냐, 제발... 제발 넘어가자. 응? 너 얼굴 예쁘다잖아. 그 부분에 초점을 두라고.”

“...저 사람 오빠 덕에 산 거야.”

최세린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우리는 재빨리 차원문에 몸을 던졌고, 여러 차례 차원문을 건넌 후 드디어 동대륙 미로라는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느냐.”

최악의 용 타나토스를 어떤 방법으로 설득하는 게 좋을지 우리는 머리를 싸매며 숲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그렇게 길을 잃었고 3일을 넘게 표류했다.

*

빌어먹을 숲에 진저리가 나고 있을 때쯤 또 마왕군 잔당인지, 자연 발생한 몬스터인지는 몰라도 저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 재홍, 세린아 주목해주세요! 이번에 빠르게 단판으로 갑니다.”

“오케이, 가위... 바위... 보!”

“개씨발­!! 또 나야?”

이재홍이 투덜거리며 팔 부분만 형상을 변환해 날카로운 발톱을 드세웠다.

우리는 그를 등지고 주저앉아서 숲에 관련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정윤상은 공간 지각 능력을 무너트리는 마법이 씌워져 있을 거라 했었는데, 파훼법은 아직 모른다고 했기에 무작정 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너 뭐야. 몬스터야?”

그때 이재홍이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이재홍의 정면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 재처럼 회색 빛깔인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대들이 이번 용사들인가?”

“이번은 또 뭔데? 아무튼 용사는 맞아. 너는 뭐냐고 묻잖아.”

“난 안내역이다. 따라와라, 검 쓰는 용사의 무기를 수장님이 지니고 계신다고 하더군.”

자세히 보니 사내의 머리 위에는 조그마한 뿔이 두 개 있었고, 엉덩이 부분에서 쭉 이어져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는 꼬리도 있었다.

용족이라는 걸 눈치채자 입을 연 건 정윤상이었다.

“...수장이라면 타나토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이번 놈들은 눈치도 느리군. 이런 놈들에게 어째서 우리가 지원을 해줘야 하는 건지... 쯧.”

“야, 들려 개새끼야.”

“따라오라고 말했다. 또 미아가 되고 싶진 않겠지.”

“......”

천하의 이재홍도 이 미로에는 진절머리가 났는지 이를 빠득 깨물며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

[한참을 헤매더라고. 기다리기 지루해서 가이드를 보냈어.]

고개를 한참 올리고 나서야 성 외곽에 자리잡은 다크 드래곤의 수장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 진녹색을 반씩 섞어놓은 용. 외형과 풍기는 위압감만 봐도 저 자가 타나토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맨 꼭대기에서 용의 모습을 한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진작에 도와줄 걸 그랬나봐.]

붉은색과 흰색을 반반 섞어놓은 용이 옆에서 거들었다. 타나토스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는 걸로 보아, 그의 아내 산미기엘이 틀림 없다.

[머저리들이 내 친구 송곳니 가져가겠다는데 심지어 떠맥여 줘야 하다니. 기가 찬다, 기가 차. 그깟 숲 하나 건너오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삼촌. 그러지 말라니까. 저래 보여도 세계 구할 영웅이라고.]

[넌 알아서 무기도 구하고, 노젤루스 그 새끼 목도 스스로 땄는데. 쟤네는 뭔데? 왜 얌전히 우리가 저 더러운 인간 새끼들을 도와줘야 되는지 난 이해가 안 된다는 거다.]

[카넬루아가 말했잖아. 저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나야 이제 관심도 없지만.]

타나토스의 옆에서 으르렁거리며 우리를 바라보는 이재홍과 비슷한 성격의 갈색 용.

척 봐도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글락이리라. 그는 우리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심도 다른 용들에 비해 가장 거대했다.

[아버님, 저도 작은 할아버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저들에게 어째서 할아버님의 유품을 드려야 하는 건지요.]

이번에 입을 연 자는 온몸이 시커먼 용이었다.

글락, 타나토스, 산미기엘에 비해 뿔도 작고 몸집도 작았지만, 느껴지는 기는 강력했다.

저 검은 용이 최강의 혈통을 이어받은 차세기 다크 드래곤의 수장 카이루스라는 걸 알아채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넌 아직 어려서 몰라.]

그에게 타나토스가 어르듯 말했다.

카이루스는 약간 움찔하더니, 조금은 경직된 어조로 반박했다.

[다른 고룡들에 비해 확실히 제가 어리지만 저 용사라는 자들보다는 몇 세기나 더 살아왔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건 파멸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도 인간들의 전쟁을 통해 알고 있죠.]

[...흐음,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의견이려나.]

[직접 아버님께 말씀드리지는 못 하겠지만, 저들도 저와 뜻을 같이 합니다.]

타나토스의 내려가는 시선을 따라 우리도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서 위협 섞인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용족이 수두룩했다.

하나하나만 따져봐도 지금까지 죽여온 몬스터와는 격이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용족이 괜히 최강의 종족으로 불리는 건 아니구나, 실감했지만 저들은 우리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저 갈색 도마뱀 새끼 아까부터 뭐라는 거냐?”

그때 이재홍이 끓는 기름에 물을 부었다.

[감히 글락님께 욕설을 내뱉다니!]

[더러운 인간 주제에 건방지게!! 당장 저 무뢰배들을 죽여야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글락님, 허가만 내려주십쇼!]

[건방지다! 무엄하다!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지상에 있는 용들이 발작을 일으키듯 각자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에 난처함을 느낀 정윤상이 이마를 짚으며 주저앉았다.

“...아오, 재홍아 제발... 너 불 같은 건 알겠는데, 제발 상황 좀 보고...”

“언제까지 참아? 저 회색 대가리 용 새끼부터 시작해서 이게 뭐냐? 뭐 했다고 씨발 우리가 푸대접 받아야 되는 건데.”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금수 같은 놈아.]

“내가 드루이드라는 건 알고 있네? 네가 행동대장 글락인지 뭔지 하는 늙다리냐 씨발아?”

용족이 경악한다.

일행도 경악했다.

분위기는 급변한다. 타나토스는 땅이 꺼지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정윤상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격인지 뭔지 모르겠고, 우리도 하고 싶어서 용사 짓 하는 거 아니니까 일단 너 좀 맞자 늙은 도마뱀 새끼야.”

[내게 도전하다니! 차블도 그러다가 내게 된통 깨졌지!]

이재홍이 서서히 몸을 변환했고, 세계수의 수액 덕인지 그 늠름함과 기의 강도는 몇곱절 상승했다.

이 정도면 타나토스에는 못 미쳐도 카이루스나 글락에는 비할 바가 됐다. 확실히 용사의 아티팩트라는 건 마왕군을 물리칠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아버님, 저 입 더러운 인간에겐 제가 직접­]

[놔둬라. 삼촌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싶으시단다.]

[하지만 용족의 명예가 바닥에 실추되고 있습니다!]

[하고,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호전적일까...]

[자기지 누구겠어?]

[너도 그닥 온화한 성격은 아닌데...]

카이루스는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며 우리에게 달려들 기회만을 옅보고 있었고, 글락은 이미 저 하늘로 상공해 바닥에 쿵 떨어지며 붉은 봉황으로 변한 이재홍의 앞에 섰다.

˚ 형변(??) ­ 봉황(??)모델 주작 ˚

[고깃덩이로 만들어주마. 오늘 저녁은 새고기겠군.]

글락에게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드세우며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이재홍.

그를 보며 정윤상은 한탄하듯 말했다.

“그래, 아티팩트만 조용히 얻어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겠지...”

“머리 아파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저건 어떡해? 난 저런 거대한 거 상대 못해. 인간형이라면 모를까.”

최세린이 가리킨 건 카이루스였다.

그는 아직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어쩐다. 내 스승님이랑 타나토스랑 지독한 인연이어서, 굳이 용이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해야지.”

철컹­

낡은 철검이 내 허리춤에서 뽑혔다.

그대로 카이루스에게 검끝을 향했다. 그러자 녀석은 눈썹을 씰룩거리며 성 외곽에서 몸을 던졌고, 재빠르게 하강하더니 내 앞에 섰다.

“내가 너 상대다. 그리고 이번 아티팩트의 주인이지.”

[검 쥐는 자세는 그럭저럭 완성된 것 같구나.]

“내 검술 배경이 엄청난 사람이거든. 너 할머니쯤 되는 사람.”

틀린 말은 아니다.

홀라는 피아(타나토스)를 길러낸 양부모였으니.

[건방지게... 그 자존심을 무너트릴 수 있는 방법이 방금 막 생각났다.]

카이루스의 모습이 종이 구기듯 순식간에 수축한다.

10초도 안 되어, 그의 모습은 180 중반 언저리의 키에 꽤나 잘생긴 인상의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덮수룩한 흑발을 뒤로 묶어올린 모습.

오른 주먹에는 타나토스의 영향인지 마법 문자가 새겨진 뼈로 된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다.

“인간 형태로 네놈을 피떡을 만든다면, 그 자존심에도 금이 가겠지.”

“마법이라는 이점을 포기하고 검술 용사랑 육탄전을 굳이 하겠다니, 날 너무 바보 취급하는 거 아니야?”

“그래봤자 인간일 뿐. 첫 합은 네놈에게 양보하지. 덤벼라 미천한 놈아.”

카이루스의 온몸이 마법진으로 휘감긴다.

정윤상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흠칫하곤 서둘러 외쳤다.

“형! 신체 강화야!”

그의 말에 따라 검을 뽑아 아래에서 올려치듯 놈을 겨냥했다.

[ 다르칸 류 공격술 제 4식 ­ 만원 통닭 ]

콰과과과­!

찬란한 황색 오러를 휘감은 내 검은 정확히 놈의 턱을 노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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