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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42화 (42/152)

〈 42화 〉 악(?)!

* * *

“카넬루아한테는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

정윤상의 말에 일행이 동조했다. 그녀가 내게 건네준 지도 덕에 쓸데없는 동선을 단축할 수 있었고, 급기야 주술 용사의 아티팩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의 아티팩트는 다름 아닌 세계수의 수액, 그리고 그걸 지키는 수호자는 타락한 드루이드였다. 이제는 엘프 사냥꾼으로 불린다던가. 그가 구축한 던전에는 확실히 세계수 수액을 회수하고자 덤벼든 엘프의 사체가 수두룩했다.

“구역질이 나는데. 딱히 아티팩트가 아니더라도 죽여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 없네.”

우리는 그가 구축한 던전의 함정은 하나둘 격파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과정은 꽤나 흥미로웠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 전의 용사 일행은 오합지졸이라는 인상을 버릴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1년이라는 시간은 나를 제외하고도 일행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에 대한 반증이 지금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이 던전이었다.

던전의 이름은 ‘구렁이의 숲’ 조금 오그라드는 감이 있지만, 이 이름보다 적절한 이름은 그다지 없었다.

[왔는가 미천한 족속들이여.]

이곳의 드루이드가 구렁이로 변하는 드루이드이기 때문.

북유럽 신화 속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를 떠올리게끔 하는 커다란 뱀이 하늘을 은빛 비늘로 감싸고 있었다.

[네가 구렁이 드루이드냐? 타락했다나 뭐라나.]

이재홍은 그에 비하면 조촐한 몸집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 변한 모습인 늑대도 흡사 코끼리와 비슷한 크기이지만, 저 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 본좌로 말할 것 같으면, 비이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세계수를 유린한­]

[닥쳐 병신아.]

픽­!

핏줄기가 솟구친다. 그의 비늘은 이재홍의 이빨에 갈갈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끄아아아­! 가만 두지 않겠다!]

[음망 사라서능(입만 살아서는) 덩치컷도 모 타능 새끼강(덩치값도 못 하는 새끼가).]

이재홍은 그를 놔주질 않았고, 우리는 굳이 나설 필요도 없다는 걸 느끼곤 각자 무기를 집어넣었다.

이재홍이 말했듯이 놈은 크기만 비대할 뿐, 덩치에 비해 실속이라곤 없는 놈이었다.

그보다는 이재홍이 덩치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것일까, 얼핏 느끼기에도 기의 레벨 차이가 극명확했다.

한 3분을 물고 뜯었을까, 피로 얼룩진 바닥에 피로 목욕을 한 이재홍이 철퍽 소리와 함께 착지했다.

그는 모습을 변환해 인간으로 돌아왔고, 정윤상은 눈치 좋게 거대한 물방울을 던져 그의 몸에 묻은 피를 걷어냈다.

“나는 끝.”

이재홍의 손에는 꽤나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작은 병이 하나 있었다.

저 안에는 세계수의 수액이 담겨 있으리라.

*

“어휴, 곰팡내. 철수 아저씨 방에서나 이런 냄새 날 것 같은데요.”

“...너 독설이 심해졌다.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저 원래 이러지 않았어요? 음... 아니면 죄송하고요.”

최세린이 쿡쿡거렸고, 이재홍도 그녀의 디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었다.

허나 그 미소가 쭉 이어지기엔 버거운 장소였다. 이곳은 냄새가 지독했다.

“부패된 시체가 강을 이루네요. 윽, 방금 뭔가 끈적이는 거 밟았어.”

이 장소는 최세린의 표현만큼 들어맞는 게 없었다.

암기 용사의 아티팩트인 ‘원한의 가시’가 잠들어 있는 곳.

그곳은 마왕군과 북대륙 인간들이 피터지게 전투했던 전쟁터였다.

흘깃 살펴보니 북대륙의 군인과 일반 시민이 뒤섞여 모두 붉게 옷을 염색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피해는 인간만 있던 건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 웨어울프, 고블린과 코볼트가 장기를 쏟아내거나 토막난 채 피의 강을 만들었다.

“시체라도 뒤적여야 하는 건가? 형, 요정족 여왕님은 연락 안 돼요?”

“애초에 연락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우리처럼 마도구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가지고 있더라도 여행하느라 바쁠걸.”

“참... 악취라도 어떻게 하고 싶네. 파리는 왜 이렇게 많은 거람. 아니지, 시체가 많으니까 파리랑 구더기가 꼬이겠지. 윽, 말하기 무섭게 저 고블린 몸에서 구더기 튀어나왔어.”

“그딴 거 중계하지 말라고.”

코를 틀어막으며 발로 툭툭 차며 무언가 있나 뒤적거렸지만, 이 피의 강에서 최세린의 아티팩트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찾기와 비슷해 보였다. 실제로 찾는 게 바늘이기도 하고.

“너는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여기 너 아티팩트 있다잖아.”

“나는 오빠들이나 아저씨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체질이 아니라서 팍 하고 오는 건 없는데.”

“어쩌면 다른 아티팩트보다 이번 아티팩트가 가장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뭘 찾으라는 건지...”

이곳에서 허우적거린지 30분 쯤 흘렀을까, 일행은 지쳐가고 있었다.

이곳은 악취도 심했고, 그 악취만큼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무언가를 죽이는 데에는 우리 일행 모두가 익숙해졌다지만, 시체를 보는 걸 즐기는 취미가 생긴 건 아니다.

심지어 코를 틀어막지 않고서야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에 부친다. 왱왱거리는 파리는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알겠다.”

최세린이 손바닥에 주먹 밑부분을 치며 말했다.

우리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어디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열기에 설탕이 녹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 당황함은 더 배가 되었다. 다시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와 정윤상의 등을 쿡 찌른 것이다.

“아야!”

“어때, 따가워?”

“야! 따갑기는 무슨, 겁나 아프잖아!”

“히히히­ 이거 맞나보네.”

그녀가 손에는 기다란 바늘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어디서 찾았냐고 이재홍이 묻자 그녀는 아까 몰래 시체를 도굴하던 인간을 발견했는데, 그의 목을 베어 죽이고 얻어낸 거라고 했다.

왜 우리에겐 말 안 했었냐고 되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한테 안 들키려고 발버둥치는 거 보고 싶었거든. 결국 나한테 죽었지만.”

*

정윤상의 아티팩트가 잠든 장소는 최세린의 아티팩트와 거리가 가까웠다.

북대륙 설산, 그곳에 조용히 살고 있는 설산의 고룡 자이키릭.

그의 심장이 그의 아티팩트였다. 심장이 마나의 근간이라고 했으니, 드래곤 로드의 심장은 마나의 정수라 칭해도 된다며 정윤상은 말했다.

우리가 간 곳은 자이키릭의 레어인 얼음 계곡이었다.

그곳의 수호자를 맡던 설인. 그는 이재홍과 최세린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시험해볼 좋은 상대였고, 결국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곤 크래바스 속에 들어온 듯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다행히 사전 준비를 탄탄히 하여 모두 두툼한 옷을 입었기에 추위는 느껴도 낙오되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계곡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확실히 막강한 기가 느껴지긴 했다.

그런 그가 내뱉은 한마디.

[...흥, 귀찮으니까 그냥 가거라.]

자기 부하를 죽였는데, 저런 태도라니.

거들먹거리는 건 용족이 최고라며 말했던 카넬루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확실히 로드 드래곤이라는 이름값은 했다. 거만한 면에서 말이다.

우리 일행 중 그런 태도를 가장 싫어하는 자는 단언컨대 이재홍이다.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였다.

“방금 막 당신 부하 죽였는데 무시하기냐?”

[벌레가 죽었다고 슬퍼해야 하나?]

어찌 보면 저 도마뱀이 나와도 사상이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곳을 지키는 자가 인간이었어도 똑같이 말했으려나. 그건 모를 일이었다.

나는 궁금하다는 듯 일행을 바라보며 혼잣말인듯 혼잣말이 아닌듯 애매한 태도로 말했다.

“용이란 녀석들은 원래 이런가.”

“공격하면 퍼뜩 일어날 새끼가 거드름 존나 피우네.”

이재홍은 살짝 흥분했는지, 주먹을 꽉 쥐며 자이키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세린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흠...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정윤상을 향한 질문이었다.

“나? 음... 관두자. 돌아가는 게 나아. 절대 못 이겨.”

웬일이지, 항상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보여주던 정윤상이 한발 빼는 건 나한테도 희귀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가 상태가 안 좋은가 낯빛을 살폈는데, 그다지 바뀐 건 없었다.

그는 침착했다. 되려 침착하기에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병신, 기껏 지 무기 구하러 와줘도 잔뜩 쫄아가지곤.”

곧바로 이재홍의 반발이 들어왔다. 그에 정윤상은 말을 잃은듯 침묵을 고수했다.

어째서? 드래곤 로드라는 걸 우리도 알고, 그의 강한 기는 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단순히 이름값에 쫀 건 아닐까.

“근데 오빠. 재홍 오빠 말대로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자고?”

“저 녀석이 워낙 극성이지만... 이번에는 나도 동감이야. 지금 얻어두지 않으면 언제 마왕군을 소탕하겠어.”

최세린의 의견에 힘을 싣었다. 정윤상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는데 일에는 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계란이 바위를 어떻게 이겨요?”

“그만큼 격차가 심해?”

“네, 우리 수준 용사 20명이 달려들어도 몰살이에요. 그만큼 심해요.”

자이키릭은 일행의 언쟁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흰자에 노란 눈동자. 예삿 파충류의 눈과 같았다.

감정을 읽어내기 버거웠다. 싸울 생각은 없어보인다는 걸 빼곤 말이다.

[흐아아암­]

그는 지독한 하품을 뱉었고, 그 자리에 싸아악 서리가 졌다.

이때 이재홍이 폭언을 빙자한 설교를 시작했다. 대상은 정윤상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병신이라는 거야.”

“너 시발 자꾸 딴지 걸래?”

“계란으로 바위 어쩌고... 또 도망칠 이유만 찾는 꼬라지 지겹다 지겨워. 바위도 바위 나름이야. 등신아.”

“그럼 어쩌자고, 너랑 똑같은 새끼 20명이 와도 못 이긴다니까.”

“너 말투대로 말해볼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어쩌고 저쩌고... 크큭, 병~신.”

익숙한 장면이었기에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얘기가 과열되기 시작할 때쯤 내가 찬물을 끼얹어줘야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순조롭게 과격한 토론이 진행된다.

“야야! 둘 다 싸우진 말고!”

“말리지 말라고. 야, 병신아 더 지껄여봐. 저 도마뱀 마력이 그렇게 많아?”

“내 스승과 동격이야. 됐냐?”

“그런 말 알아? 제일 무서운 새끼는 책을 아예 안 본 놈이 아니라 한 권만 본 놈이라고. 마력이 많든 적든 그게 어쨌다고. 넌 그것밖에 못 보잖아.”

크르륵!

세계수 수액의 영향인지, 전보다 훨씬 빠르고 또한 늠름하게 늑대로 변한 이재홍은 정윤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자이키릭인지 하드캐리인지라는 놈 생명력이 다 꺼져가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저 도마뱀 새끼 툭 치면 뒈져.]

“...근데 윤상아. 나도 얼핏 느끼긴 했어. 기가 많이 약해져 있다는 걸.”

아아, 어쩌면 정윤상이 마력은 느낄 수 있어도 기나 생명력을 느끼지 못했기에 저렇게 움츠려 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재홍은 그걸 간파했던 것일까. 항상 망나니같지만 의외로 일행 중 가장 시야가 넓은 건 이재홍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뇌었다.

[마왕군 물리칠 생각은 있냐?]

“없을 리가 없잖아.”

[그럼 마법진이나 만들어 시발아. 시원하게 마법 한 방 후려갈기고 싸우면 되잖아.]

[흐으음... 재밌는 병아리들이구나.]

그때 자이키릭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곧 죽어도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 로드구나. 그가 내비치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사천왕이 저 정도 되려나. 그럼 지금쯤이면 마왕을 죽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자이키릭은 지독하게 늙은 용임에도 엄청났지만, 못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나만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이재홍이 앞발의 발톱 하나를 세워 그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닥쳐 파충류 새끼야. 이렇게 큰 병아리 본 적도 없잖아.]

[크하하...! 네놈보다 더 큰 병아리도 많이 봤단다 애송아. 그래서, 추잡하게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덤벼들 테냐?]

[어, 내가 직접 목덜미 물어뜯어 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포부는 좋군. 허나 그냥 죽이진 못할 게다. 목숨 따위 포기하면 네놈들을 궤멸 상태로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지.]

올 게 오는구나.

나는 검 손잡이에 손을 뻗었고, 최세린도 바늘에 손을 뻗었다.

그때 자이키릭은 풀썩 몸을 떨구더니 정윤상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주마!]

일행 모두가 벙쪘다.

혹여 노망이 들었나? 그럴만한 나이라고는 알고 있는데...

“뭘 준다는 겁니까?”

[내 심장을 그쪽 마법 쓰는 병아리에게 주마! 대신 네놈은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한다.]

“조건이라고?”

[그래, 그 조건은... 내 아들에게 내 심장을 건네주는 거다. 어렵지 않겠지.]

“죄송한데, 우리가 원하는 건 자이키릭님 심장이에요. 이쪽 마법사 오빠가 쓸 아티팩트거든요.”

[멍청하긴, 인간과 용의 평균 수명을 아느냐?]

“...아하.”

기간은 딱히 상관없는 듯하다. 정윤상이 죽기 전에만 돌려주면 된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내 말도 함께 전해다오. 그건 다른 병아리들이 못 들었으면 하는군.]

정윤상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이키릭에게 걸어갔고, 그는 인간 모습으로 변환했다.

그곳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있었다. 백발, 새하얀 피부, 그리고 가슴팍까지 오는 기다란 수염.

산타가 저런 모습일까, 복장마저도 빨간색이 아닌 하얀색이니 조금은 다른 느낌이겠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일행과 같이 정윤상을 기다리자 그는 자이키릭과의 대화를 끝마친 후 돌아왔다.

[......]

자이키릭의 온몸은 화염에 불타고 있었고, 저건 자연 발화한 화염이라는 걸 일행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게 심장이 빠진 마법사, 드래곤의 최후다.

정윤상은 그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 행위는 자이키릭을 향한 마지막 존중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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