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41화 (41/152)

〈 41화 〉 악(?)!

* * *

검을 휘두른다.

아니? 이건 내 몸의 일부다. 팔을 휘적이는 감각. 내 팔의 길이는 검의 길이를 더한 길이다.

주머니에 손을 잠시 넣어두듯 검집에 검을 넣어두는 것일 뿐이다.

검은 내 몸의 일부다.

“그렇죠.”

­서걱

팔을 휘둘러 나무를 베어냈다. 그 나무를 자르는 감각, 나이태 하나하나 까지 베는 감각마저도 내 지문이 점자를 읽어내듯 선명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잘 하고 있어요.”

­퍼석!

이번에는 바위를 잘라냈다. 아까보다는 조금 묵직한 감각, 하지만 중간까지 베어내자 탄력을 얻어 마침내 거대한 바위를 두부 가르듯 잘라낼 수 있었다.

이 감각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옆에서 재차 말했다. 나도 이 감각을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고자 팔에 온 신경. 아니, 작디 작은 세포 하나마저도 집중했다.

“조금만 더 부드럽게. 제가 알던 홀라의 검술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ONE(?)을 구해낸 과거의 세 영웅.

그 중 줄 처럼 막대한 마나도 없이, 타나토스(피아)처럼 막강한 혈통도 없이.

오직 검만으로 그들과 어깨를 견주는 검호, 그리고 귀신.

홀라의 검술을 카넬루아가 내게 지도하고 있었다.

옆에서 플라티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전송자란 하나같이 괴물들이군요! 본래 검술이라는 게 느낌만 알려주면 따라할 수 있는 거였던가? 내 지식 선에서는 금시초문인데, 전송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건지... 이 늙은이의 굳은 뇌로는 당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영주님도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이구, 여왕님! 큰일 날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자칫 다르칸이 제게 대련이라도 신청했다간 영주의 체면이 무너진단 말입니다! 하하하!!”

그들의 농담을 들으며 잠시 검을 내려놓자 어느 순간 내 움켜쥔 손 모양에 따라 손잡이마저 변해버린 육중한 철검이 눈에 들어왔다.

군대에서 총기를 애인 다루듯 하라는 말이 떠올라 이 검을 내 애인 다루듯 소중하게 날을 갈아왔지만, 세월의 풍파는 무시하지 못하는 듯했다.

슬슬 버릴 때가 되었나. 그렇다기엔 이보다 손에 잘 맞는 검이 있으려나 싶다는 마음이 든다.

익숙한 걸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내 단점이다.

그만큼 싫증을 느끼지 않는 건 내 장점이지만.

ONE(?)에 도착하고 검을 다룬지 2~3년 정도 되었다.

밥 먹는 시간과 잠 자는 시간마저도 줄여가며 검을 휘둘렀고, 전대륙의 검술을 몸에 조금이라도 익히는 것은 내 일과가 되었다.

내게 검술의 기초를 알려줬던 서대륙의 두 기사단장에겐 더 배울 게 없었다.

오러라면 몰라도 내 검술은 이미 그들의 경지를 넘어섰고, 그들이 내게 퍼부었던 칭찬은 어느샌가 시기감과 질투심이 되었다.

평생 검만 휘둘러온 자를 2년만에 앞질렀다. 이 사실은 내게 자신감이라는 모닥불에 던질 장작이 되었다. 나는 검술의 천재였다.

어쩌면 모든 걸 집어삼켜 내 피부와 피로 만드는 괴물에 가까울지도. 동작을 곧장 따라하는 건 내 특기니까.

‘나 정도로 검을 다룰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곧장 생각나는 자는 단 한 명 뿐이었다.

사천왕 중 한 명이자 귀검사라는 이명으로 통하는 토텔리 프리온.

그를 제하곤 지금 내 경지를 따라잡을 자가 있냐는 자신감, 더군다나 나는 전송자다.

내 성장도는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머잖아 검으로는 모두가 내 발 밑에 있지 않을까.

이런 자신감.

오늘 홀라의 검술을 간접 경험해보자 이것은 오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와 결이 달랐다. 단지 따라해보는 것뿐인데도 그녀의 검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카넬루아가 마법을 통해 내 뇌에 영상으로 보여줬던 그녀의 검술은,

물 같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

아니, 흐른다기보다는 웅덩이 진 것 같다. 그 크기가 작다는 건 아니다.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깊은 우물. 아니, 호수? 아니다.

바다다.

만약 바다보다 더 큰 단위가 있다면 그 단어를 채택하리라.

저 끝이 어디인지 감히 가늠도 안 가는 아주 넓고 고요한 바다.

그녀의 검술은 그런 거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라면 내 장기 중 하나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뽐내는 살생 기술.

마치 초 단위로 시간을 되돌려 움직이는 것처럼.

나는 정밀하고도 누가 보아도 완벽하다는 말 말고는 아무런 감상도 내뱉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마왕군을 물리쳐왔다.

내 검술은 완벽했다. 모두가 고개를 주억인다. 내 검술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그 위의 경지가 있을 줄이야.

홀라의 검술은 아름다웠다. 검을 휘둘러 무언가를 죽이고 사방에 피를 흩뿌리는 잔혹한 장면이 아름답다고?

문장 자체가 굉장히 역설적이지만 그녀의 검술은 아름다운 게 맞았다.

그녀의 검에 대적한 자는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하고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검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베인다면,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검을 쓰는 자에게 죽는다면 홀라가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저 경지에 내가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전송자이고, 검의 천재라지만 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망감이나 우울함을 느끼진 않았다. 되려 재미가 붙었다.

나는 흥분했다. 신문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카넬루아가 보여준 그녀의 검술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그녀의 검술을 따라하여 마침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내 과거가 부끄러울 만큼이나 먼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마왕마저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검. 그걸 완성하고 싶었다.

“좋은 태도에요. 강해져서 나쁜 건 독재자밖에 없죠.”

약 1년을 그녀의 검술을 따라하며 지냈다.

그때쯤 마법 용사인 정윤상에게 서신이 왔다.

이제 시기가 다가온다고. 잠잠하던 마왕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슬슬 네 명의 용사는 다시 뭉쳐야 한다고, 마왕을 죽일 시기가 다가왔다고 말이다.

“배운 걸 써먹을 기회네요. 그전에 이걸 가져가세요.”

“이게 뭐죠? 지도?”

ONE(?)의 세계지도...인데 어느 부분에는 x자 표시가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카넬루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각 용사들의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어요. 그분의 뜻에도 마왕군은 용사에 의해 무너져야 하니까 이 무기들이 꼭 필요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 모든 건 그분을 위하여.”

그녀에게 지도를 받아들곤 정윤상이 적어놓은 집합지를 가기 위해 플라금의 공용 차원문을 가동했다.

“언제나 자아를 잃지 말길.”

“예?”

“어머! 기도였으니 못 들은 척 해주세요.”

카넬루아는 차원문에 빨려들어가는 날 향해 빙긋 웃었고, 플라티넘은 마왕군을 토벌한 후 플라금에 오면 극진히 대접해준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용사 생활을 재개하러 떠났다.

*

용사 일행의 집합지는 남대륙 동측에 있는 도시 알리시아(αλθεια)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일렁거리는 차원문 너머, 그곳에 도착하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마법에 있어 가장 발달한 대륙인 남대륙이라고 해야 할까, 하늘로 고개를 올려보자 크리스탈로 만든 뚜껑이라도 덮었는지, 햇빛을 받아 형형색색의 빛을 뿜으며 반짝이는 하늘이 보였다.

관문도 타대륙과는 결이 달랐다.

골렘 두 마리가 태산같이 문을 지키고 있으며, 그곳에 있는 용 모양의 마도구는 눈에서 마나를 흘리며 관문을 통과하는 자들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옷차림도 사뭇 달랐다.

앞섬이 잘려나간 듯한 셔츠 같은 걸 겉옷 삼아 입고 다니는 것도 이질적이었지만, 더 이질적인 건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였다.

심지어 남자인데도 말이다. 영국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까, 글쎄. 영국 남자들이 치마를 평상복으로 입진 않으니 비할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모자가 더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볼 수 있겠다.

모자의 높이가 높은 건 권위의 상징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일종의 챌린지 같은 걸까.

안에 기다란 막대라도 들어있는 건지, 남대륙은 모조리 끝내주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들인지, 자기 키보다도 기다란 모자를 태연하게 쓰고 다니는 건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하, 하하 시발. 여기 애들 키다리 알바 같은 거 존나게 잘 하겠네.”

옆에서 누군가가 이죽거렸다. 사실 뒤돌아보기 전부터도 알기 싫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방대한 기였기에 그의 첫마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을 웃도는 한량 같은 화법이었다.

“1년간 잘 지냈냐? 검술 용사 씨.”

“오랜만이다 재홍아.”

이어지는 건 정적.

어색함에 서로 괜히 먼저 합류했나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을 때쯤 타이밍 좋게.

“뭐야? 둘이 같이 온 거예요?”

차원문을 막 건너오는 최세린과,

“뭐야, 내가 꼴등이네? 제일 가까웠는데 미안 미안.”

관문에서 막 빠져나오는 정윤상이 보였다.

“푸, 푸흡!”

정윤상을 보자 일행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머리를 매만지더니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꾸며 가방에서 커다란 모자를 꺼내 머리를 완전히 덮었다.

“너 병신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푸, 푸하하!”

“닥쳐 재홍아 제발...”

“아니, 오빠. 폭탄이라도 맞은 거야?”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 스승님한테 순수하게 욕만 처먹은 게 1달 정도 될 거다. 알려줄 거 다 알려줬는데 왜 또 찾아왔냐고 말이야. 난 거기서 끝난 줄 알았어.”

“그럼 뭐가 더 있어? 또 ‘딱밤’이라도 맞았냐?”

“어, 오늘 떠나간다고 통보하니까 1년치 정산은 해야겠다고 작별 인사로 8서클 마법을 던지는데...... 간담이 서늘하다. 아무튼 겨우 도망쳐 나왔다. 너네는 어떻게 지냈어, 수련 좀 했어?”

정윤상은 아직 내가 어색했는지, 질문을 최세린과 이재홍에게 돌렸다.

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우리의 끝맺음이 좋았던 건 아니니까. 그 원인은 대부분 나에게 있었고.

이런 생각에 잠겨있기도 잠시, 이재홍이 질렸다는 투로 말했다.

“술 처마시고 놀다가... 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마냥 놀진 않았나 보네. 그치 철수 형?”

“어? 아, 응. 기가 몇 배는 강해진 게 느껴지더라. 더 놀라운 건 세린이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놀랐지만, 이게 정윤상의 좋은 점 중 하나다.

마찰이 있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걸며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 편안하고 배려심 있는 성격.

“세린이?”

그는 내가 최세린을 언급하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뿐만 아니라 나와 이재홍도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 아니라는 걸 이재홍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헤어지기 전에 얘기를 하자면,

이재홍과 정윤상에 비해 느껴지는 기가 터무니없이 약했던 게 최세린이다.

내가 기를 느낄 수 있는 만큼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는 주술 용사.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와 정윤상에 비하면 그녀의 생명력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무슨 소리예요. 난 더 약해진 것 같은데.”

“이 고삐리가 이제는 뻔뻔해지기까지 했네. 기가 찬다.”

“재홍 오빠는 더 용감해진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그거 무슨 뜻이냐?”

“멍청하면... 아니에요!”

이재홍이 최세린에게 어금니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렸고, 최세린은 능청스럽게 그의 공격적인 질문에게서 요리조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 실랑이를 볼수록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일행 중 성장의 끝을 볼 수 없는 건 그 누구도 아니라 최세린이다. 이재홍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녀에게선 소름이 돋을 만큼 아무런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재홍에게 살가우면서도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몸짓하는 행동을 함에도,

그녀의 기척은 정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허공을 보는 기분이다.이재홍도 그를 느꼈는지 1년 전과는 달리 최세린과의 말싸움에 더 힘을 빼진 않았다. 그도 최세린이 떨떠름한 것이리라.

그러자 깔깔거리던 최세린이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으음... 철수 아저씨는 동아리 같은 걸 들은 것 같네.”

“뭐? 못 들었어.”

“아니에요! 이것도 혼잣말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그녀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촐싹거리는 움직임으로 정윤상에게 슬금슬금 팔짱을 끼더니 검지를 척 피며 허공을 가리키곤 발랄한 톤으로 말문을 열었다.

“자! 마법 용사님 말해주시죠! 우리 용사 영웅담 2부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는 마왕군 견제야. 그들의 모든 계획은 우리에 의해 막혔고, 그들은 1년이라는 준비 시간을 가졌어. 당연히 더욱 전력을 보강했을 테고,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장치도 여럿 준비했을 거야. 물론 우리도 놀고만 있지 않았고, 철수형이 말했듯 눈에 띄게 강해졌다지만 마왕군이 그걸 계산에 넣어두지 않았을리 없어.”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들의 예상을 웃도는 강함을 얻을 필요가 있지. 재홍아, 질문 하나 할게. 레벨업이 필요한 RPG 게임에서 레벨 다음으로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템빨.”

정윤상이 보기 드물게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뼉을 짝 쳤다.

잠시 행인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린다. 그에 아랑곳않고 정윤상은 말했다.

“맞아! 우리도 슬슬 강한 무기를 얻을 필요가 있어. 우리는 아티팩트를 찾아 이동할 거야. 세린이 표현을 빌리자면, ‘템을 갖추자!’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겠네.”

“으엑, 오빠 작명 센스 정말 지옥적이다.”

“......지옥적이라는 없는 표현을 알아듣는 게 더 열 받네. 아무튼 정보를 캐러 다녀야 해. 우리 아티팩트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말이지.”

“어디로 갈 건데?”

“남대륙에 ‘모든 알려드립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마법사 한 명이 있어. 약간 사짜 냄새가 나긴 하는데... 밑져야 본전이니까 남대륙 관문인 이곳을 집합지로 정한 거야. 여기서 차원문 2번 정도만 타면 될 거야.”

정윤상이 호쾌하게 말했고, 이재홍은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나는 카넬루아의 혜안(??)에 감탄하며 품 속으로 손을 뻗어 지도를 최세린에게 보여줬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고, 내가 조용히 이 지도에 대해 말하자 눈을 휘둥그레 뜨곤 호들갑을 떨며 정윤상과 이재홍을 불러세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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