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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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 우리가 이용할 수 기능과 재능에 대해 알아야 했다.
이 세계에는 게임처럼 레벨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이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건 순전히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용사를 해야 하는가? 태생부터 ONE(?)의 주민인 사람이 우리보다 레벨이 훨씬 높을 것 아닌가.
그건 맞지만, 그 레벨을 따라잡기가 너무나도 수월하다는 게 전송자의 이점이었다.
나와 ONE(?)의 기사단원이 고블린을 똑같이 죽인다면,
나는 레벨이 한 칸 오를 것이다. 하지만 저 기사단원은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
내가 1마리 잡을 걸 기사단원은 100마리는 해치워야 한다.
대충 이런 느낌이다. 확실히 전송자는 강해지는 데에 있어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고블린을 죽이는 수단 자체가 떨떠름했다.
내가 검술 용사라지만, 나는 검을 휘둘러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오러라는 것.
판타지 소설을 읽었던 적은 있으나 그런 소설에서 일반인이 오러를 사용하는 법 따위를 알려주진 않는다.
“주술 같은 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제단에 제물이라도 바치는 거야?”
“마법... 무슨 수학 같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마나라는 걸 제가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니까요? 무협지 내공 비슷한 건가? 아 여기에는 무협지 같은 거 없겠구나.”
내 일행은 나보다 더 난감하단 투였다.
여고생, 최세린만이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저는 모든 독에 면역이래요! 심지어 작정하고 뛰는 순간 순식간에 어딘가로 이동하는 게 무슨 닌자 같지 않아요? 여자 닌자를 뭐라고 하더라, 쿠노이치? 그거였나? 아무튼!”
그녀는 우리 중 가장 현실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형태의 독에 절대면역, 그리고 눈으로 쫓기도 힘든 재빠른 몸놀림.
우리 일행 중 나와 비니 모자 이재홍을 제외하곤 가장 강한 근력과 지구력까지.
강해지려면 오러나 마나, 생명력이라는 두루뭉실한 무언가를 다뤄야 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이 지닌 이점을 이해하기 유리했다. 그 때문에 용사 초반부에는 그녀가 우리를 이끌기도 했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건 남자 용사 3인방이었다.
최세린의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은 한정적이다. 독을 연구하거나 몸놀림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은 존재했으나,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물론 마왕군에게는 충분히 까다로운 전력 중 하나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까다로운’ 그 이상을 넘어서진 못했다.
그녀는 인간 형태의 몬스터나 작은 몬스터를 상대로는 누구보다 날렵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몸집이 커다랗고 독에 면역이 있는, 흡사 괴수를 상대로는 별로 힘을 못 썼다.
이건 우리가 매꿔야 할 부분이었다. 이재홍의 주술을 통해 마찬가지로 거대한 괴수로 몸을 변환하거나, 정윤상의 마를 새 없는 마나를 바탕으로 거대한 공격을 퍼붓거나.
[ 백금 기사단 검술 1번 파도타기 ]
내 오러를 머금은 막강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쓰러트려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금세 강해졌다. 일행의 레벨은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고, 머잖아 마왕 토벌에도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건을 빌미로 갈라서게 된다. 항복을 외친 몬스터를 나와 최세린이 죽였다는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어. 포로로 만들어서 마왕군에게 인질 교환을 요청했어도 됐을 일이야. 이번에 철수 형은 이성적이지 않았어.”
정윤상의 말이었다. 매번 그와 시시한 이유로 의견이 충돌하던 이재홍도 이번에는 그의 편에 서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 새끼 말에 동감해. 투항한 놈들을 상대로 괜히 힘 뺄 이유는 없지. 무력을 과시하고 싶은 거라면 납득하겠지만.”
“몬스터를 살려둬서 무슨 득이 있을까. 죽일 수 있을 때 죽여두는 게 더 득 되는 행동 아니야? 언젠가는 우리 발목을 잡을 거라고.”
“이미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잖아. 그리고 그동안 죽여온 몬스터를 봐서 알아. 살려둬서 발목을 잡는다라... 그러진 않을걸. 이미 눈빛부터 전의를 상실했던데. 애초에 덤벼들지도 않았고.”
“마왕군은 악이고, 인간은 그들에게 유린당했어. 더 설명이 필요해?”
“마왕군이 악이지, 몬스터가 악은 아니야. 착한 몬스터도 분명히 존재해. 그리고 넓은 카테고리로 보면 용족이나 요정족, 엘프 녀석들이나 정령도 몬스터의 일종 아니야? 그들은 고등한 종족이니 예외다 뭐다 떠들지만 실상 인간과 다른 존재는 모두 몬스터로 취급하잖아. 지성이 없는 몬스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마왕군에 전담했던 몬스터들 중에서도 선이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병사는 의지가 없어. 방금 투항했던 놈들을 포함해 여럿 몬스터들이 강제로 마왕군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단탈리온과 사천왕의 악명은 자자하잖아. 그들이 전력 보강을 위해 몬스터를 협박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은 너무 무른 거 아니야?”
“내 생각에는 너랑 재홍이가 무른 것 같은데. 마왕군 휘하 몬스터들은 병사고 의지는 다를 수 있다 할지언정 그들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을 유린했던 악독한 놈들의 일환임에는 틀림 없어. 우리의 목적이 뭐야, 마왕군을 물리치는 거 아니야? 그를 위해 레벨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고, 몬스터를 해치우는 거 아니야. 저들은 우리의 양분이 됐고 우리는 마왕 토벌에 한발짝 가까워졌어. 이걸로도 부족해? 몬스터는 인간의 적이라고. 조금이라도 마왕군의 전력을 깎아먹는 게 바람직해.”
“악에 속해있다면 어쨌거나 죽여야 한다라... 오케이, 이해했어. 그럼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뭐를?”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정윤상을 바라보자 녀석은 천천히 입을 뗐다.
“도적단, 그 중 말단이었던 남자 아이.”
나올 게 나왔다곤 생각했다.
한 달 전, 우리가 용사 일행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무지몽매한 도적놈들.
그들을 무사히 소탕했고, 과정에서 여럿을 죽이기는 했으나 뒤늦게 항복했던 자들은 모두 살려줬던 그 사건이다.
정윤상이 말하는 건 그 도적단 가운데에서 제일 어렸던 남자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고.
“기억을 읽었을 때 녀석은 명백한 악의를 지니고 인간을 살해해 물건을 탈취했어. 비록 고등학생도 안 되는 어린 나이였다지만 놈은 명백한 악이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형은 녀석을 죽이고 레벨을 채우자는 우리 의견을 묵살했잖아. 아직 뭣도 모르는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난 마왕군의 의지에 따라 인간을 공격한다는 명을 받았지만, 실천에 옮길 담력이 안 되는 건지 침략이라는 게 그들에게는 낯설었던 건지 쭈뼛거리다가 우리를 마주한 즉시 항복했던 방금의 몬스터들이 그 아이보다야 선에 가까운 것 같은데.”
정윤상의 뜻은 확고했다. 그리고 나도 저 생각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내 주장은 단지 기분의 문제였다. 몬스터를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같은 가죽을 둘러쓰고 머리칼이 있으며 팔과 다리가 두 개인, 지구였더라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인간을 죽인다는 행위는 내게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그건.”
나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녀석은 남대륙에서 얻어낸 지팡이를 가방에 집어넣곤 말을 이었다.
“인간도 악한이 있어. 몬스터도 선한 녀석이 있고. 형이 무슨 감언이설을 쏟아내든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아. 어차피 살육이라는 감각에 무덤덤해졌고 인격도 망가졌다는 걸 느끼고 있는데, 나는 굳이 인간과 몬스터를 나누려는 형의 의도가 이해가 안 되네. 내 생각에는 이래. 인간도 경험치고, 몬스터도 경험치야. 종족 상관 없이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기준에서 악이라고 판명되는 것들은 모조리 죽일 거야. 그게 이 세계에 덩그러니 떨어져 마왕군을 죽이는 사냥개로 키워지는 내가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라고 생각하니까. 형은 언제나 인간 우월주의겠지만.”
잠시간의 정적. 최세린은 무표정으로 이 상황을 흘겨보며 찰랑거리는 액체가 담긴 독병을 정리하고 있었고, 이재홍은 나무 토막으로 만든 의자에 몸을 기대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궤변이라는 걸 알지만, 저 녀석들에게는 솔직하게 내 심정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 물론 너처럼 포괄적인 의미로 따지자면 모든 종족에 악한이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아. 어쩌면 인간이 몬스터보다 더 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조차도 악한 자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고.”
“......”
“솔직하게 말해줄게. 나는 얼마나 나쁜 인간이든 착한 몬스터든 언제까지나 차별할거야. 그러고 싶다 아니다 식의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야. 뭐가 옳다 그르다에 관한 도덕적인 문제도 아니지.”
“그럼 뭔데?”
입을 연 건 이재홍이었다.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이마에 힘줄이 드리운 것으로 보아 열이 받은 채였다.
예사 정윤상에게 시답잖은 이유로 으르렁거릴 때의 표정이 아니다. 진심으로 역겹다는 듯한 표정. 그 얼굴을 마주하자 내 뜻은 더 확고해졌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잖아 발톱을 내세우며 내게 달려들 게 눈에 훤했지만, 나는 방금 막 목을 잘라낸 몬스터와는 달리 저 녀석에게 아무런 살의를 풍길 수가 없었다.
“그럼 뭐냐고? 굉장히 간단해.”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마왕군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지금 내게는 더 도움이 됐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인간이라면 자유롭게 살아야 하고, 아무리 선한 자라도 몬스터라면 숨어 살아야 한다. 그 생각은 정윤상이 말을 쏟아냈음에도 조그만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니까.”
생리적인 거부감이다. 나는 정윤상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느꼈지만서도 몬스터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누가 뭐라던 그냥 그게 나였다. 고칠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시도조차도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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