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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38화 (38/152)

〈 38화 〉 악(?)!

* * *

몇 년째 백수로 지내는 건 여러모로 괴로웠다.

말 없이 출근하는 아버지의 좁아진 등을 보는 게, 마치 언제까지 그리 한심하게 살 것이냐는 말을 건네는 것 같아 가슴을 옥죄었다.

그뿐에서 그쳤더라면 괜찮았을까. 대학생 때부터 5년간 사귀어온 여자친구와의 결별은 더 끔찍했다.

여자친구는 스튜어디스였다.

그녀의 현 남자친구는 제법 나이가 젊은 항공사 직원이었고, 나보다야 모든 방면에서 나은 사람이었다.

SNS로 흘겨본 그는 훤칠했으며 미소가 상냥했다.

직업도 미래가 촉망한 것이었고, 얼굴도 반반했다. 무엇보다 사진 속 전 여자친구가 내게 어느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던 환한 미소를 그에게 보이고 있다는 게 가슴이 아렸다.

당분간은 폐인으로 지냈다. 술만 들이키고 새벽에 잠들어 다음날 점심에 일어나 어영부영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잠들고 아버지 배웅도 등한시하며 또 술을 퍼먹는 인생을 반복.

이 모든 건 내가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삶을 변화시킬 의욕조차 없었다.

그냥 죽을까란 생각도 이때 가장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입버릇처럼 뱉었던 적도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뱉었으면 안 되는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내 말에 너무 놀라 가쁘게 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셨고, 술에 조금 취하신 아버지는 내게 접시를 던졌다.

나는 묵묵히 가만히 있었다. 싸늘해진 분위기가 내가 실언했다는 걸 알려줬지만, 이 말이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말이어서 주워담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술에 너무 취해 사리분별도 못 하는 상황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내게 손찌검을 하셨다. 학생 때에는 그렇게도 아버지의 손길이 무서웠는데 그때 맞아본 아버지의 힘은 너무나 나약하셨다.

아버지는 날 마구 후려치셨지만 아드레날린이 이미 분포된 걸까.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얼얼한 수준에서 그쳤다. 피할 수도 있었고, 반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망가져 있었다. 그보다 망가진 건 부모님의 속과 이미 늙어버린 몸이지 않을까.

한참이나 얻어터지고 어머니는 눈물을 바닥에 쏟으시며 아버지를 만류하셨다.

씩씩거리시던 아버지가 내게 죽을 거면 나가서 죽던지 알아서 하라며 집에서 날 내쫓으셨고, 스물 일곱이 넘은 나이에 빈손으로 집 밖에 나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곧장 찾아간 건 친구의 집이었다. 그는 터덜터덜 들어오는 내게 눈길도 건네지 않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고, 적당한 자리에 이불과 배게 깔고 자라며 손짓으로 지시했다.

그에 난 바닥에 누웠으나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볼은 약간 뜨거웠다.

그 친구의 집에 이주일 정도 생활했을까. 술 마실 돈도 떨어졌고, 친구놈도 언제 집에 갈 거냐며 눈치를 하도 줬기에 활발히 면접을 보고 다녔다.

까지가 내 친구가 알던 생활. 면접장 앞에 서더라도 왠지 모를 현기증과 시도조차 하기 싫다는 무력감에 선뜻 발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가 편의점에서 집에서 챙겨온 꼬질꼬질한 정장을 입은 채 맥주를 까마시고 돌아오는 삶의 반복이었다.

오늘도 면접에서 떨어진 것 같냐는 친구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지긋이 날 바라보더니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자기가 일하는 물류창고에서 알바로라도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것.

친구는 그곳에서 한 부서의 팀장을 맡고 있었고, 내가 잘만 한다면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회사 생활은 자신이 없다지만 물류 창고라... 몸 쓰는 건 질색이지만 거절하기에는 친구의 눈빛이 너무 단호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입김인지, 나는 제법 괜찮은 보직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물건 옮기는 상하차와 비슷한 일이 더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재고도 관리하고 지게차 움직이는 법도 배우는 등 알바보다는 취급 좋은 일을 배울 수 있었다. 봉급도 그만큼 많아지고 있었고.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노력한다면 정직원이 되고, 부모님의 짐도 덜어드리며 떠나간 여자친구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무엇보다 삶에 활기가 생겼다.

첫 월급을 받고 친구와 맥주에 곁들여 뜯었던 통닭 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나는 회사에서 해고됐다.

친구는 그닥 미안하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내게 해고를 통보했을 때 난감하단 표정은 지었지만 그 속에서는 ‘드디어 골칫덩이를 해치운다.’ 이런 식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일을 실수했던 건 아니다. 분명하다. 나는 아무것도 실수하지 않았다.

왜 내고되는 물량이 1,000개에서 100개로 바뀌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출고되어야 하는 물건에도 0 하나가 빠졌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몇 번이고 검토했다. 심지어 처음 있던 실수로 사람을 짤라내는 것도 이해가지 않았다.

2년간 열심히 일했다. 직원들과 사이도 원만했고, 알바생들에게도 나는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충분히 잘해줬다고 생각했다.

“참... 이렇게 된 게 안타깝다. 내가 윗선에도 얘기해봤는데 뜻이 강건해서 어쩔 수가 없더라. 이해하지? 그래도 아직 30살도 안 넘었으니까 어디든지 일할 수 있을 거야. 다른 곳에서는 잘 지내길 바란다.”

내 친구놈이 가운데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놈이 재고관리를 실수한 걸 굳이 내가 검토해서 과장에게 털리지 않게끔 커버해줬어야 했다는 거. 예전에 괜히 검토했다가 하도 지랄했었기에 그다음부터는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그걸 왜 내가 검토하지 않았냐는 놈은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따졌다. 그에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하게 사과했었지.

또, 머리 벗겨져가는 과장놈이 회식 때 여사원에게 껄떡거렸던 것에 취김에 뭐라고 한 마디 말했던 거.

그때부터 그 과장은 나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었다. 매번 쎄한 눈길. 실수 한 번 걸리기나 해봐라는 듯한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

그 말고도 여러가지 짚이는 이유가 있었으나, 그때 내가 도와줬던 여사원이 귀뜸 준 바에 의하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나이 서른 비슷하게 처먹고 정직원이 된 주제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등, 사람이 굼뜨다는 등, 커피 한 번 산 적이 없다는 등.

커피? 사겠다니까 안 마시겠다며. 또 사왔더니 카페인 몸에 안 좋다고 손까지 절레며 거절했었잖아.

사실 알고 있다. 사람 하나 까내리는 건 쉽다는 거.

인간은 모여 사는 동물이고, 모이면 누군가를 험담하기 마련이다. 그보다 재밌는 놀이는 몇 없다. 특히나 서로 공적인 관계 아래 모여사는 회사에서는.

언젠가부터 내가 그 표적이 되었고, 이번 실수는 날 꺼트리기 좋은 방아쇠가 되었다.

난 회사에서 짤렸다. 다시 백수로 돌아왔고 이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싶다.

모아둔 돈? 별로 없다. 애초에 정직원이라지만 월급 220받는 주제에 무슨 저축을 할까.

앞길이 막막해졌다. 29살 먹은 알바를 뽑는 데도 있으려나, 다른 물류 창고로 가볼까.

그냥 생각하기도 싫었고, 진절머리가 났다.

그날은 백주대낮부터 편의점에서 소주를 까마시며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잠들었고, 환한 빛에 부스스 눈을 떠 일어났다.

“오오, 잘 와주었네 용사들이여...!”

내 앞에는 믿기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의 궁전 같은데? 저 하늘에 반짝이는 결정 같은 건 뭘까.

난 분명 편의점에서 자고 있었을 텐데... 숙취는 보란듯이 사라져 있었고, 어딘가 몸이 가벼운 느낌마저도 들었다.

“이 세계, ONE(?)은 마왕군에 위협받고 있고, 인간은 그들 앞에 무력하다네. 허나 그대들은 예외지. 다른 차원에서 온 전송자라는 이점이 빠른 시간 내에 그대들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것이네. 그대들은 ‘선택받은’ 자들일세, 부디 짐을 도와 이 세계를 구해주게!”

“지랄.”

내 옆에 있던 사나운 인상의 대학생 뻘 남자가 말했다.

탈색을 한 건지, 빗자루 같은 금발이었다. 청자켓에 빈티지한 검은 바지, 영어로 뭐라 써 있는 비니 모자를 쓴 그는 연신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바닥에 모자를 집어 던졌다. 그의 링 모양 귀걸이가 찰랑였다.

“좆까, 마왕인지 뭔지 몰라도 난 안 해.”

“주술 용사! 어전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전송자는 예법이라는 걸 모르는가!?”

“예법이든 뭐든 지랄할 시간에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멋대로 지들 세계로 불러 놓곤 마왕을 물리치라고? 샤워부터 시켜줘야 될 거 아니야 씨발놈들아.”

“샤, 샤워?”

“목욕 시발. 아무튼 다른 사람 알아봐. 번지수 틀렸으니까 빨리 샤워하게 돌려보내.”

그는 씩씩거리며 국왕의 가신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거, 좋지 않은 태도일 텐데. 저리 당연한 말을 하는 건 여러모로 주변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심지어 내가 몇 시간 전 뼈저리게 겪은 거잖아.

“그... 그건 불가능하다. 고등 차원 마법을 사용하려면 송신처, 발신처의 주소가 존재해야 하는데... 한 세계에서의 송신, 발신 주소는 원래 다르다...”

“뭔 개소리야.”

“그... 자네들은 돌아갈 수 없네. 우리는 지구라는 곳의 발신 주소를 모르거든...”

“거짓말 아닙니까? 송신처 발신처의 주소 다르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묶어두는 거일지 저희가 어떻게 압니까.”

그때 말을 뱉은 건 방금 말했던 남자의 또래였다.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펑퍼짐한 자켓에 안에는 검은색 박스 맨투맨을 입고 있었는데, 십자가 모양의 은색 목걸이. 수수하면서도 젊은 티가 나는 게 대학생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맞아요, 그리고 전송자든 뭐든 간에 저희는 평범한 인간인데 어떻게 이 세계의 마왕을 물리치나요?”

이번에는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데 흰색에 지퍼가 주렁주렁 달린 가방은 어딘가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풍겼다.

단발 머리의 차가운 인상의 고등학생은 왕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있었고, 그에 힘을 싣어 주술 용사라는 남자와 맨투맨 대학생도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돌려보내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그 차원문 어쩌구에 관해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불러주시던가. 어쩌면 당신들만 지구 좌표 모르는 걸수도 있잖아요? 자,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가 누굽니까?”

“몰라~ 아무렇게나 싸질러놓고 마왕인지 뭔지를 죽여라? 시발,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저씨도 뭐라 말 좀 해보세요. 억울하지도 않아요?”

고등학생은 내 옷깃을 꾹꾹 당겼고, 왕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네. 세계를 위해 부디 힘써주게... 그대들이 아니면 이 세계는 멸망한단 말이네.”

“우리 알 바 아니라니까?”

“제발... 그대들이 적임이네. 부디 우리를 버리지 말게.”

“돌려보내달라니까요.”

“제발...”

“폐하! 고개를 숙이셔선 안 됩니다!”

“권위가 뭐가 중요한가! 지금 저들의 입장을 고려해보게,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때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때가 있는 법이네. 지금이 그 순간이고.”

왕의 애처로운 태도. 그리고 이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용사.

내 옆의 3명은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날 원한다는 걸 그토록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선 내가 쓸모가 있는 건가.’

나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이 세계에서 버려질 수 없는 존재다.

‘참나, 영웅 놀이에 취하고 싶다는 건가. 곧 서른을 바라보는 주제에.’

알고는 있다. 자위한다는 거. 혹은 현실 도피. 아니면 이것 자체가 꿈일 수도.

그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무언가가 채워지는 걸 느꼈다. 공허함이 사라지는 건가.

“...용사, 하겠습니다. 방법만 알려주세요.”

내가 어렵게 입을 뗐고, 남자 2명은 경악하며 날 쳐다봤다.

그때, 순간적이지만 여고생이 빙긋 웃었던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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