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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37화 (37/152)

〈 37화 〉 악(?)?

* * *

“몬스터를 죽일 때에는 그보다 귀신에 가까운 용사는 없었지만, 그의 본성은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아니, 몬스터 입장에서는 그보다 악한 사람이 있을까란 생각도 드네요. 그는 언제나 인간 우월주의였으니까.”

계단을 오르며 산미기엘이 뱉은 말이다. 그녀와 우리 일행의 뒤에는 한가득한 용이 뒤를 따르고 있다. 그 중 행동대장인 글락. 그는 표정이 뚱했지만 산미기엘의 뜻을 따르는 듯했다.

“더러운 인간 새끼들이 우리 둥지에 오게 될 줄이야.”

온전히 따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의 태도는 떨떠름했다. 저보다 공격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기절하듯 자고 있는 이재홍 말고는 곧장 떠오르지 않는다.

“지나가는 길이잖아요? 너무 핏대 세우면 곤란해요 삼촌.”

“너 생각은 알겠는데, 마법 용사를 비롯해 떨거지들, 너네 잘 기억해. 소란 피우면 내가 직접 죽여주겠다는 걸.”

철컹.

최세린이 단검에 손을 서서히 뻗어 검 손잡이를 잡았을 때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세린아.”

“...푸후.”

그녀는 겨우 참아내는 듯하였다.

대신 차가운 무표정으로 글락을 죽어라 노려보곤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마저 계단을 다 올랐을 때까지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글락을 제외한 다른 용족은 우리에게 적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으나 시선이 따끔따끔한 걸로 보아 적대심이 없지도 않았다.

드래곤과 요정족은 친밀한 사이다. 특히나 이곳 타나토스와 넬피의 어미 카넬루아는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이 정도의 적대심이면 김철수가 카이루스를 먼저 공격한 것은 확실히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증이었다.

지금 우리는 까딱 손 한 번만 잘못 놀리면 둘러싸일 입장이었다.

디안이 약간 떠는 게 느껴진다. 넬피도 조금 겁먹은 채였고, 그 긴장을 풀어주고자 내가 입을 열려 했으나 먼저 말을 꺼낸 건 산미기엘이었다.

“검술 용사는 마법 용사님의 생각대로 확실히 황야로 갔을 거예요. 제 남편과 아들이 그곳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그를 막기 위해 가신다는 건 잘 알겠지만, 우리도 무리의 수장과 차기 수장의 목숨이 위태로운만큼 이건 대사건이죠.”

“인간 따위가 내 조카를 이기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글락이 불쾌한 웃음을 지으며 거들먹거렸다. 그에 똑같이 반응해주려다가 꾹 참았다.

성격 사납기로 소문이 자자한 글락이다. 굳이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심지어 산미기엘조차도 나처럼 생각하는지 그녀 또한 싸늘한 눈초리로 글락을 바라봤다. 최세린 못지않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당신들만 보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산미기엘은 손으로 글락을 가리켰다. 저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속으로 고개를 절렜다.

글락을 동행시키겠다는 거다. 나야 상관없고, 글락도 자기 수장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움직이는 것이니 우리끼리 마찰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재홍은 다르다. 글락과는 상극인 성격. 옛적 타나토스를 찾아왔을 때에도 글락과 이재홍은 마찰이 잦았고 그걸 말리던 건 나와 김철수였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글락 정도는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겠지만, 피곤한 건 다른 문제다. 용족과 동맹 관계가 형성됐다. 그 관계는 김철수를 치유하기 전까지는 유지해야 한다.

과연 이재홍이 얌전히 있어줄까에 대한 고민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카넬루아의 말에는 어째서인지 순종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란 막연한 믿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거지만.

“검술 용사를 살리고 싶다 하셨죠? 저희 행동대장인 글락의 뒤에 타서 이동하세요. 우리도 한시가 급한 입장이니 더 잡담할 시간도 없겠군요.”

“산미기엘님은 직접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집은 지켜야죠?”

그녀는 또 빙긋 웃었지만, 그 미소는 가식적이었다.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다. 지금도 계단을 올라 반대편 황야로 향하는 돌길 위에서만 움직이기만 할뿐, 성 근처나 다른 파라소스의 구경거리와는 거리가 먼 길로 빙 둘러서 가고 있었다.

혹여나 김철수를 통해 일부러 소동을 피운 후 파라소스를 점령할까봐 걱정하는 걸까.

아예 가능성 없는 말도 아니었기에(실제로 침범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으니, 또 김철수가 사고 치지 않았다면 그게 현실이 됐을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정작 당사자인 글락은 기분이 더러워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 갈색 머리칼. 사나운 얼굴까지. 거대한 정육칼을 들고 핏기 가득한 앞치마를 두른 채 커다란 고깃덩이를 등에 메고 있으면 어울릴 인상이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변한 게 없었다.

“제길, 줄이나 아콜드도 아니고 이런 새끼들을...”

성격 더러운 건 똑같지만 말이다.

“글락을 통해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우리 용족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삼가해주세요.”

“어차피 다르칸 정화가 목적이니까요.”

알겠다며 산미기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글락은 서서히 몸을 변환시켜 거대한 용으로 돌아왔다. 둥글게 말아진 뿔, 내 알기로 저건 오래된 고룡의 뿔 특성이다.

군데군데 찢어진 날개, 비행에는 문제가 없으니 상관은 없다만, 그의 과거를 보여주는 날개였다. 온몸에 난 흉터. 마찬가지로 그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동한다 쓰레기들.]

과격한 언행은... 잘 모르겠다. 드래곤 형상과 인간 형상의 성격은 다르다는 게 정설이다.

주피아의 마티고스도 인간 때에는 비록 건방졌지만 끝까지 상대방을 존대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다가, 드래곤 형상 때에만 오만함의 끝을 보여주며 격분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글락은 아니었다. 용일 때나 인간일 때나.

똑같다. 저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

황야로 이동하는 건 글락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그의 등은 넓었고, 그의 비행은 아주 힘이 넘쳤다.

“꺄아악­!”

[엄살 피우지 마라.]

하지만 태도 문제는 존재했다.

방금 급격히 방향을 꺾어서 넬피가 날아갈 뻔했음에도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떨어지면 죽는다. 넬피야 날개가 있으니 논외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분명히 죽는다.

[떨어질 생각들은 없나봐? 저 아래에 재밌어 보이지 않냐?]

오히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일까?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글락의 말에 따라 밑을 바라보니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저곳에 우리를 밀어넣고 싶은 것이 틀림없다.

그어어어­

마왕군조차도 손을 못 댔던 몬스터들.

대표적으로는 근처의 자잘한 몬스터를 씹어먹으며 지상과 지하를 활개치는 웜이었다.

눈은 없고 그로테스크한 이빨만 존재하는 놈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걸신 들린 아귀처럼 모든 걸 씹어 처먹는다.

덩치는 드래곤에 필적하며 먹성은 그보다도 더하다.

맨 스콜피온, 전갈의 몸통에 사람을 가져다 붙인 듯한 켄타우로스와 비슷한 형상의 녀석은 맥도 못 쓰고 방금 웜의 뱃속으로 짓이겨져 들어갔다.

지금이 웜의 아침 식사도 아닌 듯, 주변에는 맨 스콜피온의 피투성이 사체가 자자하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낼 수 있었다.

“...슬슬 가까워지는 게 느껴지네요.”

[나도 알아. 하강할 거다. 알아서들 죽던지 말던지 하라고.]

쐐애애액­!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붙들며 이재홍을 흘깃 바라보자 최세린과 넬피가 치료에 전념한 덕인지 외상은 다 없어졌고, 김철수의 오러에 베인 상처만이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부분이야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러를 통한 김철수의 검술은 뼈나 장기 같은 개념이 아닌 사물의 근간을 베는 기술이니까 치료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끄으­”

방금 그런 그가 꿈틀거렸다.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는 것이리라.

주술을 다루는 자원, 생명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술 용사.

그를 이토록 몰아세웠다는 건 김철수가 못 본 사이 더 성장했다는 증거다.

만약 드래곤을 만나게 되더라도 저 상태의 이재홍은 전력이 되어주기 힘들겠지. 최세린도 용 같이 거대한 놈들을 상대로는 맥을 쓰기 힘드니 이제는 나 혼자만의 전투 양상이 펼쳐지리라 직감이 들었으며, 동시에 입가에 쓴맛이 느껴졌다.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바람 가르는 소리를 제하곤 고요했다.

머잖아 어떤 폐허 하나가 보였다. 거미줄이 가득하며 무너진 조각상이며 건물이며 수없이 많은, 밴시 같은 쾌쾌한 몬스터들이 딱 살기 좋을 공간.

안개가 자욱하다. 황야를 지나자 이런 공간이 나온다는 게 미심쩍었지만 ONE(?)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때 글락이 전력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듯 문득 멈춰섰다. 그러자 반동에 의해 우리는 폐허로 날아가졌고, 놀람에 뒤를 돌아보자 글락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마법진을 휘감으며 바닥에 얼음 바닥을 만들까 싶었는데, 워낙 난폭하게 던진 터라 디안과 이재홍이 괜찮을리 만무했다.

“디안­! 재홍!!”

“­!! ­?”

목소리가 흩어져 들리지는 않지만, 디안은 침착하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재홍은 막 잠에서 깨어난 채라서 상황이 뭐가 뭔지 모르는 듯한 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최세린이고,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방금 눈이 마주했다.

나는 디안이 만드는 주문식을 살폈고, 씩 미소를 지으며 내 마법진에 신경을 할애했다.

얼음 기둥을 만드는 마법진이었다. 워낙 익숙한 마법이기에 순식간에 두꺼운 얼음 기둥을 여러 개 만들었고, 디안도 성공적으로 거대한 물방울을 허공에 쏟아냈다.

촤라락­!

최세린의 열 번째 사슬이 내 얼음 기둥에 묶이고, 또 넬피를 제한 일행의 몸을 하나둘 휘감는다. 그대로 물에 떨어진다. 이재홍은 비명을 질렀으나, 머잖아 사어의 형상으로 변환했고 우리를 하나둘 입 안에 밀어넣으며 물방울 속에서 탈출했다.

“허억­ 허억... 이 시발! 잠 한 번 요란하게 깨운다 개새끼야.”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 없다. 글락이 제멋대로 우리 내던진 거니까.”

“글락? 어쓰 드래곤? 아니, 그보다 여기는 어딘데?”

“마탑주님! 괜찮으세요?”

“어, 너는 다친 곳 없지?”

“용사님­!!”

물기를 털어내며 넬피를 무시하곤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역사서에서만 봤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감회가 조금 새롭기는 했다.

이곳은 인간을 마력으로 변환하여 세계 전체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했던 미친 왕 노젤루스를 상대로 과거의 영웅이 대전쟁을 펼쳤던 장소다. 이코국의 궁전.

과거 영웅은 세 명이었다.

대 제국 이코국에서 대마장의 자리를 거머쥐었음에도 자기 사랑을 찾으러 과거로 떠났던 미련한 마법사. 동시에 내 마법 스승이자 현존하는 마법사 중 최강이라 칭송받는 전격 마법의 대가 줄.

자신이 인간에게 길러졌기에 인간이라 믿으며 살아왔던, 마력이 부족했음에도 기사단원이 아닌 마법사를 꿈꿨던 멍청한 영웅 피아.

지금은 최강이자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로 통용되지만, 그때만큼은 나라를, 세계를 구해냈던 영웅.

드래곤에게 부모가 죽었음에도 드래곤을 길렀던 한심한 인간. 자기 손에 수없이 묻혔던 피와 과오를 자기 품에 있는 아이만은 물려받지 않길 원하면서도 그 아이가 기사단이 되겠다 다짐했을 때 말리지 않았던 모순 덩어리.

그 아이가 영원히 인간이기를 바랬고, 인간의 삶을 살길 바랬지만 한편으로는 용의 핏줄임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리라 직감했던 여자.

그래서일까, 그녀는 검을 든 순간부터는 종족 관계 없이 최강이라 칭송받는 이 왕국의 총 기사단장이었음에도 끝없는 수련 끝에 검호라는 호칭까지 얻어냈다.

지금도 그 칭호는 유지되고 있다. 몇 세기나 지났음에도, 그녀의 전성기는 마왕군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임에도 말이다.

피아를 길렀던 인간 어미 홀라. 이명은 검호와 귀신.

“...왔구나. 마법 용사.”

피칠갑이 된 채 정신력인지 내가 모르는 오러의 힘인지는 몰라도 카이루스와 타나토스 둘을 상대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다르칸, 김철수가 눈에 들어온다.

그를 보자 왜 홀라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다. 검을 다룬다는 일차원적인 공통점 때문일까.

[듣거라 검술 용사! 노젤루스처럼 네놈의 목도 뜯어서 죽여주리라! 뼛조각도 남지 않게 모조리 불사르리라!]

김철수는 강했지만 타나토스와 카이루스 둘을 상대로 버텨내는 건 힘겨운 짓이었다.

둘도 분명히 부상당했다. 타나토스가 서 있는 바닥에는 시뻘건 피가 가득했고, 카이루스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더 지독하게 당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게 아니었다. 김철수는 내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죽을 운명이었다는 걸 보여주듯 온몸이 카이루스보다도 만신창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타나토스님. 아니, 이곳에서는 피아라고 부르는 게 향수가 짙으시려나요.”

나는 김철수와 타나토스의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고, 타나토스의 이글거리던 눈빛이 조금 변했다는 걸 감지했다.

그의 이빨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녹색 독, 온몸을 휘감는 맹렬한 화염.

저 두 마나 속성이 타나토스를 최강의 드래곤으로 부르는 이유 중 하나다.

직접 마주하니 확실히 엄청난 박력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비켜라.]

“검술 용사는 같은 용사로써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비켜라.]

“과거 줄 스승님과도 자주 티격거리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김철수 상태가 그때의 스승님과 같습니다.”

둘이 앙숙이었다는 건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제가 맡겠습니다. 그를 위해 바비룬과 요정족 공주 넬피도 그를 막아섰던 것 아닙니까.”

[저 자는 내 가족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압니다. 허나 그게 다르칸의 본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그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정신 계열 마법에... 더 설명하자니 시간이 없습니다. 검술 용사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파라소스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만­]

쿠웅­!

그때 언제 없어졌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던 글락이 상공에서 날아와 타나토스의 몸통을 찍어눌렀다. 바닥이 쩌적쩌적 으깨진다. 문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니 글락이 하강한 부분만이 안개가 걷혀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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