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악(?)?
* * *
“알겠어.”
검술 용사 다르칸. 그러니까 김철수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타락했다는 것.
그는 몬스터를 학살하고, 심지어 드래곤에게까지 피에 굶주린 구울처럼 달려들었다는 것. 앞으로의 행보도 비슷하지 않겠냐는 것.
“알겠으니까.”
그를 막아서고자 이재홍이 달려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지금은 그가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와 카이루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
지금 이재홍이 부상당했으니 남은 용사끼리라도 그를 막아서고 정화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 대륙에 몬스터는 도륙이 나는 게 기정사실이라는 카넬루아의 예언.
까지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좀 떨어지면 안 되겠어? 부탁이야.”
“왜요오~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좋은데...”
넬피는 내 가슴팍에 안겼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껌딱지처럼 붙어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간에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포근한 침대에 몸을 맡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에 닭살이 올라왔다. 그녀에게 당했던 대가라는 이름의 고문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이 미친 요정, 확실히 살은 많이 빠졌지만, 그 추악함이 살과 같이 빠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깊은 탄식을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넬피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암두시아스를 제게 맡기셨다는 게 너무나 감격스러웠답니다. 비록 용사님과 저는 서로 사랑하지만 제 종족의 특성 때문에 결실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관계잖아요?”
넬피는 내 손바닥만한 요정이니 말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어질 일은 없겠지만. 이런 생각을 알아챌리 없는 넬피는 신나서 눈을 반짝이며 말을 쏟았다.
“암두시아스를 통해 결실을 맺다니! 그녀는 악마지만 저는 정말로 사랑하고 있답니다. 제가 용사님을 사랑하듯이...”
“...어, 그래.”
별로 반응해주기도 싫었다. 과한 반응은 그녀를 더욱 복돋을 뿐이다.
나는 다시 최세린 일행에게로 향했다. 블링크를 또 남발하기에는 마나를 제법 많이 썼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넬피가 무어라 떠든다지만, 꿋꿋히 무시했다.
그러길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바닥에 엎어져 코까지 고는 이재홍을 볼 수 있었고, 나는 최세린과 디안에게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를 얘기했다.
“카넬루아의 말을 무시해서는 안 돼.”
그녀는 김철수가 몬스터를 도륙낸다고 말했다. 몬스터 해방을 위해 움직이는 지금,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는 것만처럼 멍청한 짓이 없으니 몬스터 해방보다도 우선 막아서야 하는 게 김철수라는 말이었다.
그를 강제 차원문으로 보낸 카이루스.
그가 연결했던 공간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한다. 넬피는 모른다는 표정이었고, 이재홍도 마법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 추측만이 유일하게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급하게 만든 차원문이니 멀리 설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심지어 그 차원문을 만든 건 드래곤이다. 종족 특성상 자기 레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텐데... 이 주변에 망가져도 상관 없을 지형이 있던가?’
파라소스를 지나면 있는 아무것도 없는 황야가 떠오른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철언.
몬스터가 드글드글한 곳이다. 마왕군조차도 건드리지 않았던 아주 포악한 몬스터들이 말이다.
그곳이 가장 유력해보였고, 그게 맞기만을 바랬다.
그곳이 아니라면 ONE(?)에서 김철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차원석을 통해 대륙 대 대륙으로 이동하니 감각이 최근에 무뎌졌지만, 대륙 하나만해도 걸어서 왕래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드넓은 곳에서 김철수를 찾아낸다라, 사막에서 바늘찾기랑 뭐가 다를까 싶다.
“넬피, 카넬루아는 어디로 갔다는 등의 말은 없어?”
“주무시는 것 같아요.”
“미치겠네.”
김철수를 죽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태도는 이질적이었다.
숙제만 띡 던져주고 신경 꺼버리는 건 담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용사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안일함이었다. 책임감이 없거나.
“파라소스를 지나야겠어.”
타나토스, 카이루스가 없는 지금이 파라소스를 지나기에 제격인 타이밍이다.
허락을 구하고 만약 안 된다면, 용족과 한바탕 전투를 벌일 지도 모를 일이다. 파라소스에서, 다크 드래곤 무리에서 가장 강한 두 용이 김철수를 쫓아 따라갔으니 생각보다 용족 제압은 쉬울 것이다.
마찰이 아예 없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나도 먼저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고.
인간 제물과 몬스터에 관한 건 잠시만 넘어갈 생각이다. 일에 순서가 있고, 지금은 김철수를 구출해내는 게 최우선이다. 타나토스와 카이루스와 한판 붙게 되는 건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운데 괜한 곳에 힘 빼는 건 사양이다. 다크 드래곤들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고.
난 드래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일시적 휴전이다.
이렇게 말해봤자 드래곤은 내가 저들을 죽이리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나 혼자만의 휴전이라 부르는 게 타당하다.
인간 제물, 몬스터에 관한 건 잠시만 눈 감는다.
하지만 김철수를 구해내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파라소스로 들어가는 것도 세계수의 그늘인 비이린에 들어가는 것처럼 꽤나 까다로운 절차가 있다.
우선 평범한 사람은 이곳에 차원문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이곳은 비이린 만큼이나 까다로운 이계에 가깝다. 미로 숲에서 빠져나와 이 정문을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된 작업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의 둥지, 레어로 향하는 계단을 찾아내려면 지옥 같은 미로에서 벗어나야 하며, 설령 벗어났다고 한들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렴한 예시를 들자면 숨은 그림 찾기.
그것보다 더 고등한 숨은 입구 찾기이다. 마나를 느낄 줄 모르는 자라면 계단 근처도 오지도 못할 것이거니와 설령 근처까지 온들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눈앞에 계단을 두고도 말이다.
인식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미로에 걸어둔 마법처럼 사람의 감각을 비트는 마법.
미로에 걸린 마법의 등급이 내 임의로 3등급 이라고 한다면, 이 계단에 걸린 마법은 1등급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 마법을 적용한 것은 타나토스의 아내라고 말했다. 그녀는 눈 뜬 장님 만드는 걸 즐기는 녀석이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조금은 짓궂은 용.
“손님이 오셨네요?”
붉은색과 흰색을 반씩 섞어놓은 여성, 기다랗고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몸매는 부각되었고, 나이는 세기를 관통할 것인데, 아직 앳된 20대로 보였다. 최세린과 비슷한 나이? 그보다 더 적어 보일 수도 있었다.
‘외형은 어째 변하질 않냐.’
난 저 여성과 구면이다.
나만 그럴까, 디안과 넬피만 제외하면 우리는 다 저 여성을 봤던 적이 있다.
이름은 산미기엘. 그녀는 계단에 걸터앉아 턱을 괴며 날 바라보고 있었고, 눈이 마주하자 빙긋 미소 지었다.
“파라소스를 지나시려고요?”
“...역시 이미 알고 계셨네요.”
“내 남편이랑 아들이 집을 나갔는데, 안주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아야죠.”
그녀는 어딘가 떨떠름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나와 최세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 마나 조작에 의해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이재홍, 그를 바라보자 표정이 더욱 알 수 없을 미소로 변한다.
“푸후후... 주술 용사도 아주 용맹하다고 알고 있는데, 검술 용사의 강함에는 비할 바가 못 되네요.”
“......”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두 용사님 모두 못 본 사이 많이 딱딱해지셨네요?”
“잡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타나토스와 카이루스가 지금 다르칸을 쫓으러 갔단 말입니다.”
“먼저 검을 휘두른 쪽은 다르칸 아니었던가요? 그에 대한 해명을 해줘야 길을 비켜줄 수 있겠는데요.”
산미기엘의 뒤에 일렁이는 차원문이 보인다. 저 차원문의 건너편에는 여럿 드래곤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오고자 대기하고 있을 게 너무나도 뻔했다.
산미기엘은 지금 우리에게 선택지를 던지는 것이다.
다르칸을 쫓으러 가고 싶거든, 본인을 만족시킬 대답을 주길 원하는 것이고.
그걸 따르지 못하겠다면 덤비라는 거다. 하기야 우리가 환대받기는 어려운 입장이기는 했다.
용사가 뿔뿔히 흩어져 저들만의 삶을 산 게 3년하고도 몇 달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냥 남으로 돌아섰다고 말 할 수준이었다. 특히나 김철수는 믿기지 않는 행보를 남기며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으니 더 이상 동료라는 인식을 갖기 힘들었다.
근데 어쩌라고? 타인의 눈에는 용사는 한 묶음이다.
마왕군을 물리친 건 4명의 용사의 합작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 기분 더럽지만, 우리 용사 일행 개개인은 아무런 공로를 남긴 게 없다. 몬스터를 부순 것도 4명의 용사 합작이었으며, 사천왕도. 마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기 떨어졌을 때 무언가를 거룩한 게 없다. 마왕군을 물리치고 나서야 나는 마법 교본을 완성했고, 김철수는 검술 교본을 완성했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다.
“검술 용사는 왜 저러는 거죠?”
산미기엘의 질문도 용사는 한 묶음이라는 인식에 대한 연장선이다.
검술 용사 다르칸, 김철수가 저리 된 것에는 너네들의 책임이 있지 않겠냐는 눈빛.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할까. 그 선하던 김철수가 왜 몬스터를 죽이고 다니고, 드래곤에게 덤볐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냐고. 카넬루아마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를 쫓아서 뭘 하려는 생각인지 말해줘야겠어요.”
“말릴 겁니다. 드래곤에게 덤비지 못하도록요.”
“제 남편이 그를 죽이길 원한다 하더라도 말릴 자신이 있나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합니다. 검술 용사는 지금 죽으면 안 됩니다. 지금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에요. 그가 어째서 카이루스를 공격했고, 몬스터를 학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자의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정신계 마법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넬피에게 듣기로, 김철수는 탁기에 물들고 있다고 한다. 지금 그의 행동은 그의 자의가 아니라고 말이다.
“...”
이 타이밍에 어째서 절로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S자 뱀 문신을 지닌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과 연류되었을 것 같아요. 그들은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거든요. 검술 용사가 약해진 틈을 타 마법을 걸지 않았을까 예상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검술 용사의 편에 서서 제 남편과 아들을 공격할 건가요?”
물론 상황에 따라 나중에는 덤빌 거지만, 우선순위가 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검술 용사를 쓰러트리러 가는 길이죠. 여기 요정족 공주님이 있습니다. 다르칸을 제압하고 그녀에게 탁기를 걷어내달라 부탁할 겁니다.”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산미기엘은 내 대답에 갸우뚱한 표정을 지으며 골똘히 고개를 처박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에서 비켜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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