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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35화 (35/152)

〈 35화 〉 악(?)?

* * *

바비룬은 파라소스로 진격하는 다르칸을 막아섰고, 그는 검을 뽑아 대항했다.

이어진 전투는 난전이었다. 넬피는 말릴 능력이 안 되기에 물러서서 소리치는 게 최선이었고, 둘의 전투는 한동안 이어졌다.

바비룬의 앞니가 다르칸의 갑주를 깨부쉈고, 그의 검이 바비룬의 살을 찢어냈다.

사방에 피가 튀긴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상처는 짙어졌고, 이들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화려하게도 싸우네.]

그때 두 용이 나타났다.

녹색과 붉은색을 아수라 백작처럼 반씩 나눠 색이 진 비대한 드래곤, 그의 눈두덩이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다.

[그래봤자 아버님 꼬리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용사라는 수준도 알만하군요.]

그의 옆에 있던 검은색 드래곤, 차기 다크 드래곤의 수장으로 불리는 최강의 혈통.

타나토스의 아들 카이루스였다. 그는 같잖다는 듯 다르칸과 바비룬을 바라보며 코웃음쳤다.

그들은 전투를 관망했다. 자기들 일도 아니거니와 숲에서의 전투이지 파라소스 안에서 난동을 피우는 건 아니기에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고, 용사라는 자들의 전투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끼어들지 않은 게 다행이라기에는, 전투에서 벗어난들 저 두 용이 얌전히 보내줄지 의문이었다.

이미 서로가 지친 상태였다. 그로도 모자라 용까지 상대하라니, 심지어 그냥 용도 아니고 로드 드래곤과 로드급 드래곤으로 취급하는 최강의 드래곤이다.

바비룬은 절망을 느꼈다. 넬피도 불안감을 느꼈고, 오직 다르칸만이 침착했다.

그는 바비룬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그에게서 검을 거둬 용들에게 향했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먼저 찾아왔네.”

그는 검에 흑빛 가득한 오러를 둘렀다. 그 검기는 점차 육중해지더니, 이내 하늘의 용을 바닥에 떨어트릴 수 있을 크기가 되었다.

그에 바비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본인과 합을 나눴던 건 그의 전력이 아니었다.

바비룬의 생각보다 다르칸은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에 대한 대가일까, 인격은 어째서 무너진 건지 당최 짐작가지 않았다.

[덤빌 거야?]

타나토스가 말했다. 비웃는 태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말리는 것에 가까웠다.

언제든지 전투를 받아줄만큼 그는 전투광이다. 허나 상대가 약해진 틈을 노리는 불한당은 아니었다.

인간 시절 피아라는 이름을 쓸 때 그가 서대륙의 기사단 출신이었기 때문일까? 타나토스는 기사도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 지금도 다르칸이 송곳니를 내비춘들 덤벼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다르칸 류 오의 ­ 날개 찢기 ]

[감히 아버님께 칼끝을 들이밀...어?]

[카이루스!!]

­촤아악!

일섬(一?)! 찰나의 순간에 다르칸의 검은 춤을 추듯 휘둘렸고, 카이루스가 갑자기 온몸으로 피를 내뿜었다. 타나토스의 표정이 바뀐다. 그는 날개짓을 멈추고 바닥에 쿵 내려와 온몸을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뒤덮었다.

형태도 변해간다. 용의 모습에서 20대 중반 쯤의 사내로, 그는 편한 복장에 셔츠 비스름한 겉옷을 걸친 형태였는데 이질적인 물건 하나가 있었다.

양팔에 강철로 된 건틀렛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 빛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바비룬은 저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났다. 타나토스는 바닥에 추락하는 카이루스를 한 손으로 받아내곤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곤 누가 마법의 주인인지 알려주겠다는 듯 막강한 마나를 내뿜으며 전투를 준비했다.

Ενσχυση σματο ­ Φωτι

화르르륵­!

그의 온몸이 붉게 물든다. 그의 눈빛은 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고, 바비룬이 눈을 한 번 꿈뻑이자 타나토스의 주먹은 거대한 염구를 머금고 다르칸에게 향하고 있었다.

φλγα γροθι!

그의 주먹에서 용의 머리 형상의 화염이 뻗어나간다. 다르칸은 오러를 터트려 그것을 버텨내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의 입가가 찡그려진다.

‘미친 새끼들 아니야?’

바비룬은 저 화염이 본인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에 내심 안심했다. 타나토스가 내뿜는 화염은 재앙에 가까웠다.

공격에 닿지도 않았는데 열기만으로 나뭇잎이 타오른다. 넬피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바비룬은 자기 품 안에 그녀를 넣음으로써 공격에서 지켜줬다. 그렇다고 바비룬이 괜찮았다는 말은 아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만 같이 지독한 화염이었다. 털이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네가 먼저 공격했다. 죽어도 여한은 없지?!]

“...타나토스, 최악의 용. 다크 드래곤의 수장. 인간인 줄 알았던 어리석은.”

[그래! 내가 멍청한 피아다! 날 노리고 온 거면 어째서 내 아들을 공격했지?!]

타나토스의 화염이 더 거세진다. 그 기세는 메이블 토진과의 최종 결전을 떠올리게 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바비룬은 왜 타나토스가 3대 세력으로 불리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르칸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용사 일행 중 가장 강했던, 지금도 명실상부 다르칸이 일행 중 가장 강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비룬과의 전투 때문에 부상당한 몸인데도 오러를 더 터트리며 타나토스의 공격에 맞선다.

저 오러의 끝은 어디일까, 마치 바다처럼 마를 기세 없는 기(?)다. 다르칸이 본인을 상대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가설은 근 몇십 초 사이에 근거가 훨씬 더해져 정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비룬님! 저걸 어떻게든 말려야... 어머니가 어떻게든 말리라는... 꺄악!”

[고개 빼지 말라고 등신아! 그리고 저걸 어떻게 말려, 정윤상이라도 데려와야 말리든 말든... 어이! 네가 카이루스 맞지? 당신 못 움직여?!]

바비룬의 질문에 피칠갑을 한 채 바닥에 걸터앉은 카이루스가 짙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렇게 분노하신 아버님은 처음 본다. 너희는 편히 죽지 못 하겠군.]

[지랄? 나는 왜 끼는데 도마뱀 새끼야. 그보다 움직일 수 있잖아!]

얼핏 살펴봤지만 카이루스의 생명력 불씨는 멀쩡했다.

분명 다친 건 맞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검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군.]

[잘난척은 알겠으니까, 빨리 방법 좀 알려줘봐! 너네 아빠 안 말리면 숲 다 사라지겠다고!]

그리되면 다르칸도 죽을 것이고 말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카넬루아가 신신당부한 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예지몽을 꿀 수 있다. 용사 때도 그녀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지듯 많은 덕을 봤었다. 용사들이 각 지니고 있는 아티팩트이며, 몬스터로 발생한 손해를 막은 것이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끝도 없다.

그리고,

‘......’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르칸을 막으라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은.

카이루스가 말문을 열었다.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주춤하더니, 타나토스와 다르칸을 보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 차원문. 그걸로 검술 용사를 어딘가로 보내버리면...]

[그럼 하면 되잖아. 한시가 급해.]

[우매한 놈, 그게 보통 일인줄 아나? 그랜드 마스터급 오러를 지닌 자를 강제로 차원문에 밀어넣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저 검술 용사가 얌전히 따라줄리도 없잖은가, 이미 투기에 찌들어 있는데.]

말마따나 다르칸은 피까지 토해가며 오러를 터트렸고 그 화염에 계속 맞서고 있었다. 그 광적인 모습은 확실히 기괴했다. 뭣 때문에 드래곤과 힘싸움을 하는 것인가, 온전치도 않은 몸으로.

이해 안 가는 다르칸의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 학살,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도 아니라 아예 도륙을 내놨다.

그리곤 달라진 태도, 예전에는 서글서글하고 호구 같은 면이 가득한 남자였더라면, 지금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태도다. 물론 피는 흘리니까 비유적인 얘기다.

그가 어째서 변한 것일까, 행방불명됐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다른 사람이 되었냐는 거다.

그는 단언컨데 정상이 아니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변했더라면 커다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카넬루아는 대답도 없고.’

일방적인 명령만 내릴 뿐, 이토록 혼란을 겪을 때는 그녀는 함묵한다.

그 태도가 얄미웠지만, 지금은 다르칸이 사망하지 않게끔 무슨 수를 쓰는 게 급선무다.

카이루스가 내놓은 방안은 차원문으로 강제로 어딘가로 보내는 것.

그냥은 성공하기 어렵다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방법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일단 해. 내가 알아서 할게.]

[무슨 수가 있는 건가?]

[어, 어떻게든 해볼게. 이대로 숲 다 불타버리는 건 너도 원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어서.]

고개를 갸웃하곤 카이루스는 주둥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입 속에서 자그마한 돌멩이가 나왔다. 저건 차원석이니라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시커먼 마법진이 드리운다. 확실히 인간이 만드는 마법진과는 생김새며 그 안에 조합된 문자들이며 조금 달랐다. 인간과 드래곤의 차이일까, 잘은 모르겠다. 악쿤이라는 이름의 마법 덕후 새끼가 옆에 있었더라면 부랴부랴 설명해줬을 텐데 조금 아쉽게 됐다.

τηλεμεταφορ(τ)!

그 마법진이 완성되자 카이루스는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 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허공에 구멍이 뚫리듯 투박한 차원문.

아니, 차원문이라기보다는 블랙홀과 비슷한 차원의 균열이 생겼고, 그것은 타나토스의 화염과 다르칸의 오러를 비롯해 주변 물질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

다르칸은 놀란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곤 끌려가지 않게 오러를 더욱 강하게 터트렸다.

이대로는 곧 차원 균열이 닫힐 것이라는 카이루스의 말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시발, 이거 목 아픈데...’

바비룬은 다시는 사용하기 싫었던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걸 겨우 받아들이곤 형변을 시작했다. 머리에는 갈기가 돋아난다. 가죽은 두터워졌고, 목을 가다듬자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사나운 목소리가 들린다.

˚ 형변(??) ­ 사자!(?子) 모델 네메아의 사자(Λιοντρι τη Νεμα) ˚

신화 속 동물로 변환하는 것 자체가 많은 부담을 지게 된다. 펜릴이야 그나마 익숙해졌다지만, 이 형상은 언제나 버거웠다. 이 형상으로 변환할 때는 언제나 목에 많은 부담을 주는 상황에 국한되기 때문일까.

바비룬은 꿀꺽 침을 삼키곤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생명력을 끌어모아 목에 집중한다. 단전에서부터 쏟아내듯이, 마치 내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기세로 배에 힘을 꽉 주곤 다르칸을 향했다.

[귀 막아.]

[...뭐라고?]

경고는 했다. 바비룬은 뒤로 뺀 고개를 앞으로 내질렀다.

˚ 포효!(??) ˚

...!!!

천둥이 코앞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거대한 고목조차도 몸이 꺾여 있다가,

쿵­! 바비룬에게 굴복하듯 바닥에 뿌리채 뽑혀 엎어졌다.

강력한 소음은 충격파를 불러온다. 그리고 바비룬이 뱉은 건 사람 한 명을 밀치기엔 너무 커다란 기술이었다.

용사가 이 정도였던가? 타나토스조차도 놀란 눈빛으로 바비룬을 바라봤다. 바비룬의 기술에 감탄하며 날개를 접고 화염을 꺼트린 채 바닥에 뿌리 내리는 것처럼 발을 박고 충격파에 대응하고 있었다.

[형, 바람 좀 쐬고 와라.]

“...주술 용사.”

[저 시발놈, 이젠 이름도 안 부르네.]

바닥에 박은 검을 지지대삼아 버티던 다르칸, 그의 검이 부러진 건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뒤에 차원 균열로 몸이 당겨진다. 그는 그곳으로 빨려가는 도중에도 바비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봐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다. 진 키아라의 눈매가 저렇지 않았던가, 저 눈빛을 그 누구도 아닌 다르칸에게서 보게 될 줄이야.

콰과과과­!

포효의 충격파, 차원 균열의 인력(?力).

두 강력한 힘에 의해 다르칸은 차원 균열에 물 내리듯 끌려들어갔고, 바비룬은 한시름 놓으며 미처 쓰러지지 않은 나무에 몸을 기댔다.

“어이 주술 용사. 지금 같은 용사라고 감싸는 거냐?”

타나토스, 아니. 인간 모습이니까 피아라고 해야 할까.

그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비룬을 바라보다가 그가 대답할 기력도 없다는 걸 알아채곤 날개를 펴고 다르칸을 쫓아 날아갔다.

그에 카이루스도 같이 부상하곤 타나토스의 뒤를 쫓았다. 이제 남겨진 건 처참한 몰골의 바비룬과 어쩔 줄 모르는 넬피 뿐이었다.

“옘병할... 죽겠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어머? 어떡해, 어떡해! 상처가 벌어졌잖아요!!”

그녀가 전력을 다해 바비룬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수어 분,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너네가 있던 거야.”

“아하, 그럼 철수 아저씨가 어디 갔는지는 모르고요?”

“몰라, 알고 싶지도 않다. 카넬루아가 어떻게 알려주든 말든 하겠지... 난 좀만 쉬련다.”

기력이 다한 건지, 졸린 건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었다.

바비룬은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졸음을 쏟아내곤 아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곤 코를 골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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