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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34화 (34/152)

〈 34화 〉 악(?)?

* * *

“중대 사항. 우리는 걸어서 가야돼.”

파라소스로 가는 길에 개인행동은 금지다. 최세린을 먼저 보낼 수 없는 이유다.

마법을 사용하여 움직이면 빠르겠지만, 그것도 금지다. 용족을 자극하는 꼴이 된다.

우리에겐 마땅한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숲을 뒤적이고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이동수단이...

끼에에에­!

그때 하늘에서 어떤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희귀한 개체인데 운 좋게도 마주쳤다.

‘그리핀!’

최세린의 손에서 쇠사슬이 쭉 뻗어나간다. 그것은 그리핀의 목덜미를 붙잡았고, 깜짝 놀라 괴로워하는 그리핀에게로 나는 날아갔다.

“부탁 좀 하자!”

“끼에에에!”

수긍하는 태도일까? 그러면 좋겠는데.

*

하늘에서 숲을 바라보니 확실히 넓긴 했다.

그리고 대지에 쭉 깔린 마법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숲으로 들어오는 이로 하여끔 시야에 혼란을 겪게 만드는 마법진, 그리고 기억을 덧씌우는 마법진. 어떻게든 미아를 만들겠다는 거다.

‘내게는 통하지 않지만.’

그대로 파라소스로 쭉 향했다.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에게 건넬 선물도 이미 준비해뒀다.

그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한다. 소문에 의하면 데미투에서만 파는 설탕빵을 좋아한다는데, 아쉽게도 내 손에 들린 건 크림 가득한 도넛이었다.

‘돈 같은 걸 줘봤자 좋아하지도 않을 테니까.’

세력을 이끄는 드래곤답지 않게 타나토스는 물욕이 없었다. 식량만 확보하고 연마다 바치는 꼬마 인간만 있다면 그는 만족했다.

생각보다 소박하다. 하지만 난 인간 노예가 불만이었다.

만약 파라소스에 김철수가 있다면, 디안에게 첫 번째 푸른 방패를 건네주고 그와 최세린과 합심하여 타나토스의 목을 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선물은 함정이다. 설탕빵을 받고 방심한 즉시 머리통에 마법진을 후려갈길 거다.

어차피 타나토스와는 한 번쯤 만나봐야 했었다. 인간 노예에 관해서 말이다.

혼자서는 용 세력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지만, 용사가 세 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몬스터 해방 만큼이나 신경쓰였던 것이 인간 노예 해방이었다. 인간이 몬스터를 지배할 이유가 없듯, 드래곤도 인간을 지배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이들은 몬스터도 사육한다. 그들이 파라소스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인간이 몬스터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내게는 명분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그런 각오를 맺고 파라소스에 다가갔다. 안개가 걷히자 우락부락한 산악지대가 나타났고, 그 가운데에는 돌로 된 성이 있었다. 아마 타나토스의 무리 중 행동대장에 가까운 어쓰 드래곤, 글락이 지은 성이리라.

외형은 투박하지만, 용이 사는 성인만큼 크기는 아주 비대했다.

거진 한 국가라고 표현해도 손색 없다. 군력은 대륙에 비하겠지만.

끼에에에­!

그때 그리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래곤의 방대한 마나를 느낀 것일까? 아니면 야생의 감일까. 일단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진정시켰지만, 놈은 진정하기는 커녕 몸을 더 강하게 떨며 천적을 만난 듯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끼에! 끼에에!!

놈이 몸부림치며 우리는 바닥에 떨궜다. 착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놈이 도망갔기에 파라소스 안까지 곧바로 들어가는 건 불가했다.

‘제길.’

우리는 조금 걸을 필요가 있었다.

이쯤 오면 마중을 나와줄 것이란 기대감이 조금은 있었는데, 틀려먹은 생각이었다.

용족은 우리에게 반응해주지 않았다. 섭섭한 기분도 들었는데, 이건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용사 중 두 명이나 찾아왔는데, 신경도 안 쓰는 건 조금 그렇지.

과거에도 파라소스에 온 적은 있었다. 레벨을 막 100을 돌파했을 때쯤이었는데, 던전을 찾아 헤매던 중 미로에 갇혀 용족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용은 회색 비늘의 드래곤이었다.

되짚어보면 성까지 들어가진 않았었다.

이쯤 말하니 다크 드래곤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크 드래곤은 검은색 드래곤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블랙 드래곤이라고 칭한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다크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차이는 명확하다.

드래곤은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에게 관심 자체를 안 두는 종족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들 기준에서 너무나도 나약하고 보잘 것 없으니까.

흡사 벌레, 아무리 강해봤자 벌레는 벌레다. 날고 기어봤자 날벌레, 땅벌레일 뿐이다.

마법 쓰는 벌레, 오러 다루는 벌레 등등. 이들의 시선에서 인간이란 다채로운 벌레일 뿐이다.

그 벌레에게 관심을 두는 드래곤이 다크 드래곤이다. 그 관심은 파브르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뜻한다.

타나토스가 지금까지 이뤄온 만행을 되짚어보면 다크 드래곤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

그의 손에 죽어난 인간만 해도 몇이던가? 지금도 연마다 한 명씩 죽어가거나 드래곤에게 무언가를 착취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크 드래곤의 다크는 색깔을 뜻하는 게 아니다. 부정적인 단어를 뜻한다.

타나토스의 레어에는 여럿 드래곤이 즐비한다.

바람을 다루고 다른 종족과 화합을 좋아하는 그레이 드래곤,

대지를 조종하고 투박한 성격에 파괴하는 걸 좋아하는 어쓰 드래곤,

불을 다루고 성격 또한 뭣 같기로 어쓰 드래곤과 난형난제를 대표하는 레드 드래곤.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의 종류만 해도 이 정도이고, 이들은 모두 다크 드래곤으로 취급한다. 왜냐고? 이들은 다크 드래곤의 대명사인 타나토스를 따르니까.

“놀랍도록 조용하네.”

그 다크 드래곤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마력으로는 저 안에 한가득 있을 게 분명한데. 또한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도 남았을 텐데?

우리는 조금 더 파라소스로 다가갔다. 그러자 마나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씬 느껴진다.

슬슬 긴장의 끈을 잡아야 한다. 머릿속에 마법진을 암기해두고, 최세린도 단검과 열 번째 사슬을 꼭 쥐고 있었다.

“...그 개, 개새끼......”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렸다. 청각을 강화해두었기에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인 건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입 열지 마시라고요! 회복하는 데 방해된다니까!”

...저 목소리는 뭐더라?

나는 일행에게 손짓하며 지팡이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주춤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기척이 커졌다. 흐느낌도 더 선명하게 들렸고, 나무 몇 그루만 지나면 모습도 바로 보일 것 같다. 방금 무언가 꿈틀거리는 걸 확인했다.

치이이...

마법진의 회전이 빨라진다. 바닥에 토막난 채 엎어져있는 나무를 살짝 뛰어넘으며 점차 다가갔다.

그리곤 확인했다.

“너 뭐야?”

곧바로 황당감이 밀려왔다.

그곳에는 이재홍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에 기대 흐느끼고 있었다.

“너넨 또 왜 여기 있는... 아, 아! 아파! 상처 벌어진다!! 야아아­!!”

“...세상에.”

그 옆에는 작아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사람은 아니다. 정령도 아니다.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걸로 보아, 또 인간의 형상인 걸로 보아 저것은 요정이었다.

“용사님? 용사님인가요?”

그녀는 이재홍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는 뒷전이라는 듯 날 뚫어지게 바라보며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나를 아는 듯한 표정. 요정이라면 그 끔찍한 여자를 제하곤 기억나지 않기에 그녀를 보좌하는 요정 중 하나이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했는데, 그 짐작은 오답이었다.

“저, 저 넬피에요!”

“...넬피? 요정족 공주님이요?”

“기억 안 나세요? 살도 많이 뺐답니다! 이 모든 걸 용사님이 제게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아아,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재회인가요?”

“...넬피라고?”

ONE(?)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트라우마.

치료해줬다는 걸 빌미로 나를 노예처럼 다루고, 감금하며 집착하고 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했던 미친 공주.

그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지만 내면까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손발이 벌벌 떨린다. 그녀가 날 조교하겠답시고 먹였던 음식들과 날 괴롭혔던 여럿 기구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내 안색을 창백하게 한다.

“......재홍아, 그 요정 넬피 맞아?”

“맞아. 내가 살 뺐다고 했잖아. 야 최세린. 너 상처에 바르는 가루 같은 거 있냐?”

“푸, 푸흡... 잠시만요 오빠. 윤상 오빠 멘탈 나가는 것 같은데.”

“마탑주님? 괜찮으세요?”

일행의 동정과 웃음기 섞인 시선, 그 시선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뒷걸음치다가 방금 뛰어넘었던 나무토막에 뒷발이 걸려 넘어졌다.

나는 벌벌 떨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넬피는 뭐가 그리도 기쁜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살랑살랑 다가왔다. 그 날개짓 소리는 사나운 말벌이 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웠다.

“재회한 기념으로 저번에 약속했던 키스를...”

“꺼져! 시발 꺼지라고!!”

“아잉... 용사님 어딜 가세요?”

“닥쳐! 친근한 척 부르지 마! 나는 당신 몰라. 너 같은 괴물은 모른다고 시발!!”

마법진의 종류를 순간적으로 바꿔 짧은 순간거리(블링크 ­ Αναβοσβνω)로 주문을 수정했다.

거기에 연속성(ε)을 부여했다. 저 여자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는 일차원적인 생각만이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

“잠시 얘기 좀 해요! 저희가 얼마만에 보는 건ㄷ­”

“{ Αναβοσβνω ­ 블링크 (ε) }!”

“용사님!!”

악쿤 토든은 자리에서 푸른 빛에 휘감기더니 깜빡 빛을 쏟곤 사라졌다. 그걸 쫓아가는 넬피. 그를 보며 바비룬은 헛웃음을 지었다.

“피한다고 해결되나? 애쓴다. 병신.”

그가 악쿤이 떠나간 자리를 보며 비웃자, 최세린은 의아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오빠는 왜 다친 거예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 많다. 김철수 이 미친 새끼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니 다르칸과 바비룬의 전투 흔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거대한 발자국, 이건 몬스터의 것이 아니라면.

“이건 용족 발자국?”

“타나토스, 카이루스. 이 두 용이 안 왔더라면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디 갔는데요?”

“쫓아갔어.”

바비룬은 바닥에 있는 검 파편을 가리켰다.

“아마도 김철수 곧 죽을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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