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악(?)?
* * *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우리는 일루전 마법과 최세린의 화장술로 변장한 채 닭꼬치를 입에 물며 주인에게 물었다.
이프카리스토의 관문, 그 전에 사람들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암살이 웬말이냐!”
“왕을 시해한 자를 내놓아라! 플라금의 국왕은 모습을 드러내라!!”
관문은 정상적인 운행이 불가했다. 관문의 앞을 가득 메운 행렬 때문이었다.
얼핏 보아도 수백명 정도, 그들은 각기 팻말을 들고 플라티넘을 부르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라스타의 국왕, 그 나라의 국민들은 왕을 잃었다는 슬픔에 호소하고 있었다.
간혹 보이는 뿔과 비늘이 듬성듬성 드리운 백성이 그 증거였다. 라스타, 동대륙의 작은 나라.
하지만 이들과 전면전쟁은 플라금으로서도 썩 내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나라의 특성에 있다. 인간과 용족, 그 사이에서 나온 혼혈.
용인(?人)들이 바글바글한 나라 라스타.
“나오지 않겠다면 처들어가겠다!”
“비켜! 다치기 싫으면!!”
마법진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리곤 서서히 모습을 역변했다.
뿔이 비대해지고 꼬리가 길어진다. 인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으나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있다고 단정하기에도 어려운 외형.
“{ Ελευθρωση 방출 }!!”
내 마법 문서 1권에 적혀있는 아주 기초적인 마법 방출,
하지만 그게 용인이 사용하면 얘기가 다르다.
마법진이 못생기고 마나도 엉망진창으로 분배한 걸로 보아 방금 포효한 자의 마법의 경지는 아주 낮다. 거진 3서클도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 위력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콰아아!!
붉은 마법이 관문 외벽에 처박힌다. 관문은 흔들렸고 돌무덤이 후두둑 떨어져 거리를 난잡하게 했다.
경비병은 창을 들어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참아주었다가는 얼만큼의 희생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나설 기회도 없을 것이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강한 존재감.
그 존재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는 다 나았는지, 몸에 붕대는 이미 다 풀었다.
“분노에 몸을 맡기면 명이 짧지요. 심지어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서걱
그의 검이 역광을 받으며 폭주하는 용인을 스르륵 지나간다.
그대로 머리통이 떨어진다. 멈추지 않고 그는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여럿 용인을 토막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나 이재홍이 아니었더라면 저 자에게서 무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양.”
“그때와 다른 모습이시군요. 플라금에 다시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양은 옷과 검에 피를 가득 묻힌 채 내게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는 용인의 시체가 가득했고, 다른 용인은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있었다.
“제정신은 아니네. 쟤가 양이구나?”
최세린이 읊조리며 머리에 쓴 가발을 바닥에 집어던졌고, 디안도 불편하다던 요란한 목걸이를 풀었다. 나는 지팡이를 들고 양에게 향했다. 그러자 양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더 쫓아가 죽일 의사는 없다는 뜻이리라.
“라스타의 국왕을 암살한 게 플라금이었나?”
“그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국왕님이 용사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동행하시죠.”
거절할 껀덕지도 없고, 이프카리스토에는 차원석 때문에라도 들러야 한다.
플라티넘을 만나기 전에 마기를 한 번 터트려 볼 생각이었는데, 계획의 수순이 조금 바뀐 것 같기는 하다만은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
“검술 용사가 문제라고?”
“그렇소, 라스타의 국민은 그가 국왕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소. 그리곤 짐이 검술 용사를 숨기고 있다더군, 참나. 라스타 같은 약소국 따위 짓밟으려면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는데 뭣하러 그런 뒷공작을 펼친단 말인가. 이해가 되시오?”
플라티넘의 말은 허세였다. 동대륙에서 플라금 다음으로 군력이 강한 국가를 뽑으라면 라스타가 맞다.
플라금에 양과 음이 없었더라면 얘기는 또 달라질 것이다. 선봉장의 역할이 마땅히 없을 뿐이지, 라스타의 군대는 아주 강하다.
물론 다른 대륙에 비한다면 애들 소꿉놀이겠지만.
“검술 용사의 행방은 라스타에서 끊겼다지 않았나?”
“그전에 플라금에서 몇 년이나 신세졌던 것을 물고 넘어지더군. 라스타에 들어왔던 것도 왕을 시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냐고. 아참, 그대들의 이름도 나왔소. 다른 세 용사도 암살에 가담한 게 아니냐면서 말이오.”
“우리가 당신네들을 도울 이유가 어디 있는데?”
“내 심정이 그렇소. 굉장히 억울하단 말이외다. 그보다 주술 용사는 이제 동행하지 않는 건가? 옆의 소녀는 마법사로 보이는데.”
디안이 플라티넘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자락을 펼치며 격식 있게 인사했다.
“마법 용사님의 수제자 디안이라고 합니다. 감히 대화에 끼기 어려워 이제야 인사를 드리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됐네. 용사 일행한테 왕 대접 바라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플라티넘의 미소는 조금 씁쓸해 보였다. 확실히 마도구 시장에서 나와 이재홍이 난동을 피운 건 왕에게 할 짓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덤비지 못한다는 무력감. 양과 음이 김철수의 실력을 제대로 베꼈더라면 얘기는 달랐겠지만, 이들은 미완성품이었다.
요점은 그 검술 용사의 행방이었다. 라스타는 플라금에게 전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왕 암살의 내막에 대해 발언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플라티넘은 나서지 않았다. 마땅한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안하니만 못 한다. 이런 생각이었다.
라스타의 백성은 분노했고, 그 화살촉은 플라티넘을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명분만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라스타는 플라금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건 백성들의 고혈에서 완성된 것이었고, 이들은 플라금으로의 이주를 꿈꿨으나 플라티넘은 라스타 국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용인은 아주 포악하기 때문이다.
용의 피가 대를 넘어가며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제기능을 못 하겠지만, 포악하기로 소문난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포악함만은 그대로 내려오는 듯하다. 라스타는 쿠데타가 많기로도 유명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라스타의 용인, 그들의 근원을 따지고 들려면 파라소스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동대륙 플라금과 라스타, 그 국경에 있는 강의 상류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비이린 못지않게 울창한 숲이 나온다.
그 숲의 별칭은 미로다. 한 번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을만큼 방대하고 울창하고 복잡한 길이기 때문인데, 내막은 최악의 용의 부인, 그녀가 설치해둔 마법 때문이다.
방향감각을 박살내는 마법. 당사자가 알지도 못하게 기억을 뒤틀어놓는 마법.
또한 몬스터는 얼마나 많은지, 뭣도 모르는 모험가가 그곳에 가면 백골이 돼서 나온다.
설령 살아남았을지라도 미로에 갇혀 굶어 죽겠지. 나도 죽을 뻔했으니 그 위험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숲을 어떻게든 무사히 벗어낫다고 치면, 그때야말로 파라소스를 구경할 수 있다.
최악의 드래곤의 거처. 과거에 자기가 인간인 줄 알아서 인간과 사랑을 나눴던 멍청한 용.
자기 애인 때문에 인류를 박살냈던, 자기 핏줄 때문에 나라 하나를 집어삼켰던.
그로도 만족 못해 아직도 연마다 꼬마를 1명씩 바치라고 했던 최악의 드래곤이자 다크 드래곤의 수장.
인간 때 이름은 피아, 용 이름은 타나토스(θνατο).
그 드래곤이 머무는 곳이 파라소스이고, 그 드래곤의 존재 자체가 동대륙에 몬스터를 해방시킬 수 없는 이유다.
놈은 아주 포악하다. 과거의 영웅이라지만, 그 영웅의 행적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개짓거리들을 너무나도 많이 했다.
그의 자식은 또 어떤가? 언젠가 이재홍이 죽이고자 다짐했던 피아의 핏줄 카이루스, 그가 라스타에서 난봉꾼 짓을 해서 지금의 용인이 가득한 라스타가 완성되었다.
“그곳에서 검술 용사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타나토스의 영역이니 양과 음을 보내기도 꺼려지는군. 지금 라스타의 백성이 날 죽이고자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어째 플라티넘이 내뱉을 다음 말이 예상되기 시작했다.
“검술 용사와 얘기해보고 싶소. 정녕 그가 라스타의 왕을 시해한 게 맞는지 말이오. 만약 사실이라면 짐은 어째서 살려두는 건지도 궁금하오.”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라티넘은 우리가 파라소스에 가서 김철수를 만나보길 원하는 것이다.
김철수, 그가 행방불명된지 2년이 넘은 일이다. 슬슬 그와 한 번 만나보고 메이블 일지에 관련해서도 얘기를 나눠볼까 싶었는데, 그의 소식이 절로 들려왔다. 그는 동대륙에서만 머물고 있던 것이다.
내게도 이 제안은 받아들여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아직 태도로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김철수를 만나길 원하는 건 플라티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 김철수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행이 아니었다. 되려 지금은 암두시아스를 더 원한다.
그러니 급할 건 없다.
오히려 이걸 이용해 플라티넘에게 협조를 얻어낸다면 평화롭게 몬스터 해방을 진행할 수 있다.
“이프카리스토에서 볼 일이 있던 것 아니시오? 짐에게 협력을 얻는다면 그보다 든든한 우군이 있을까 싶은데.”
그러니 플라티넘의 제안은 반가웠다. 그를 내색하지 않으며 담담한 어조로 뱉었다.
“거래를 하자는 건가?”
“그렇소. 그대는 용족과 초면도 아니고 다르칸과 같은 용사이니 말이 통할 것 아니오? 이에 짐은 그대에게 돈을, 이프카리스토이든 플라금이든 이곳에서 원하는 걸 웬만하면 모두 이뤄줄 수 있소. 쌍방이득이라는 말인데, 요즘 표현으로는 윈윈이라고 하던가? 어떻소?”
“흠.”
최세린과 디안, 그녀들과 눈을 맞췄다.
이들도 플라티넘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딜 그렇게 가냐고 묻잖아. 이 등신아.”
“다르칸님! 이대로 쭉 가면 파라소스가 나와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검술 용사 다르칸은 눈에 보이는 몬스터는 죄다 도륙을 내면서 미로 숲으로 쭉 직진하고 있었다. 바비룬이 팔을 당겨보지만 오히려 몸이 끌린다. 그는 무언가를 명령받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뭘 처먹었길래 이러는 거야.’
형변하여 덮칠까?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펜릴로 변환해 다르칸의 몸을 짓눌렀다.
쿵!
바닥에 등부터 엎어진 다르칸은 공허한 눈으로 바비룬과 넬피를 담았다.
힘으로 짓눌러서 멈춰준다면 그거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이대로 가면 용족과 한 판 붙자는 꼴밖에 안 된다. 카이루스와는 언젠간 싸워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런 형태로는 아니었다. 조금 더 정식적이고 정갈한 전투를 원했다.
다르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를 데리고 파라소스로 들어간다면 용에게 협공을 받아 개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그를 짓누르는 앞발에 체중을 실었다.
그러자 반응이 왔다.
[ 다르칸 류 공격술 제 4식 일몰 ]
후웅!
그의 대검이 바비룬의 코를 스치고 지나갔고 뜨거운 느낌과 함께 짙붉은 피가 사방에 튀겼다.
“바비룬님!!”
[...너 엄마한테 전해. 시발 이제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빼지 않았더라면 주둥이 전체가 썰려나갔을 것이다.
이건 위협을 넘어선 명백한 공격이었다.
이제는 참을 수 없었다. 바비룬의 주위에 진녹색의 아우라가 풀풀 풍긴다.
그 기운에 맞서 다르칸도 검을 중심으로 금색과 시커먼 오러를 잔뜩 풍겼다.
[병신을 만들어야 멈출 생각인가보네. 나한테 칼 뽑은 거 그거 실수야.]
“......”
[넬피, 분명히 기억해라. 난 참을만큼 참았고, 선 넘은 건 이 새끼야. 알겠지?]
“어머니를 볼 면목이...”
[그딴 거 모르겠다고!]
다르칸의 대검과 바비룬의 송곳니가 부딪친다.
대지는 흔들렸고, 나무는 요동치며 나뭇잎을 떨궜다. 우수수 숲은 흔들렸다. 근처에서 눈치보던 몬스터들은 이들의 기와 생명력에 지레 겁먹고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한다.
넬피는 안절부절못하며 이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기를 거둬내려면 다르칸이 얌전히 협조해야줘야 할 텐데, 지금 다르칸은 예전에 봤던 인자하고 착한 그 용사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물어뜯을 듯한 맹수. 배가 부른 상태인 건지 먼저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자기 몸에 손을 대면 바비룬에게 검을 휘두른 것처럼 곧장 반응했다.
도대체 행방불명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카넬루아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다르칸을 정화시키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넬피가 고개를 들자 악몽과도 같은 그림자가 위에서 바비룬과 다르칸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에 넬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히 바비룬의 이름을 불렀다.
허나 들을 여유가 없었다. 다르칸의 검에 맞춰 모습을 변형해가며 싸우기 바쁘다. 마왕군을 물리치고 3년간 그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힘에 부치는 느낌마저도 온다. 이 괴물 같은 새끼. 말해봤지만 상황은 완화되지 않았다.
그때 하늘에 드리운 그림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바비룬은 상황을 직감하고 이빨을 거뒀다.
[화려하게도 싸우네.]
[그래봤자 아버님 꼬리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용사라는 수준도 알만하군요.]
[그래도 얘네는 강한 편이야. 전송되고 10년도 안 돼서 저정도 수준까지 왔잖아. 어쩌면 지금도 너보다도 강할 수도 있어.]
반은 붉고, 반은 진녹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용. 그리고 온몸이 시커먼 검은 용.
이들이 하늘에서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