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32화 (32/152)

〈 32화 〉 악(?)?

* * *

“제 마법으로 마탑주님에게 피해를 주면 저를 데려가 주세요. 실패하면 깔끔히 포기할게요. 심장에 걸고 맹세해요. 마탑주님도 맹세해주세요.”

그녀는 작고 새하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는 자기 가슴팍에 얹었다.

그리곤 마법진을 휘감았다. 언약이 완성됐다.

“디안, 태도가 달라진다고 마법의 위력이 늘어나진 않아.”

“알아요. 어서 마탑주님도 맹세해주시겠어요? 제게 피해를 입는다면 절 언제까지나 데려가겠다고.”

꼭 쓴맛을 봐야 포기하겠다면 물러서지는 않는다.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러지 뭐.”

설령 기습일지라도 디안의 마법에 내가 상처 입을 일은 없지만, 따라오지 않게끔 하려면 이쯤에서 그녀에게 격차를 통감시켜줘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짤랑­♪

나는 다시 귀에 걸린 장신구에 손을 가져갔다. 푸른 방패 모양의 장신구였다.

“이 아티팩트 기억하지?”

사천왕 긴의 무기였던 열 번째 사슬과 노파가 지니고 있던 일곱 번째 렌즈.

이 도구의 제작자는 전설의 대장장이 맥라룬 드파니온이다. 그는 살아생전 10개의 역작을 만들고 삶을 마감했다. 그 도구는 10대 마도구로 불린다.

그 중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된 첫 번째 도구.

“첫 번째 푸른 방패...”

“그래, 이 방패를 뚫는 건 불가능해.”

키이이잉­!

귀에 있던 방패 모양 목걸이가 빛을 발하더니 점차 비대해졌다.

사실 비대해졌다기보다는 원래 크기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방패를 디안의 앞에 세우고 내 몸을 뒤로했다.

시간 역행 후 마왕성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

이걸 사용했더라면 메이블에게 마법 폭격을 맞았을지라도 상처 하나 없었을 것이다.

이 물건은 그야말로 방어만을 위한 물건이고, 방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점이라면, 이걸 사용할 때 나도 공격 따위 못 하는 거지만.

“포기해도 좋아.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아니요, 포기할 수 없어요.”

어찌나 완강한 표정인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럼 전력을 다 해봐.”

“그럴 생각이에요.”

디안은 눈을 감고 주저리주저리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 주변에 백색의 마법진이 수어 개 휘몰아친다. 바람의 마나였다. 디안의 주속성 마나.

‘진짜 많이 늘었네.’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마탑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더 강력했다.

그럼에도 조그만치의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디안은 지금 기세뿐이다.

설령 8서클의 마법을 때려 부을지라도 그녀는 이 내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었다.

“...{ λωποδτη ­ 소매치기 }”

“......뭐?”

서걱­

처음 들어보는 마법이 영창됨과 동시에 내 오른손에 피가 주르륵 흘러 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다.

“내기 제가 이겼네요.”

“......너, 너 지금 무슨...”

“약속 지키셔야죠?”

놀란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디안이 발동한 건 시그니처 마법이었다.

*

시그니처 마법,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9서클에 오른다는 마법.

그럼 1서클의 마법사가 시그니처를 완성하면 9서클이 되는 걸까?

그건 아니다. 보통 8서클의 마법사가 시그니처를 완성하게 되니까 새로운 시그니처 전용 서클이 생겨 9서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1서클의 마법사가 제아무리 용써서 시그니처 마법을 만들어봐야 2서클이 될 뿐이다.

심지어 2서클 마법도 못 쓰는 2서클이 말이다.

시그니처 전용 서클은 다른 통상적인 마법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하니 사용자의 마력을 늘려주거나 다른 마법의 위력을 상승시키지 않는다. 메이블의 시그니처 트럼프는 카드 자체가 마법진이 된다는 능력까지 시그니처 주문식에 포함되어있으니 논외겠지만.

그를 떠나서 굳이 따지고 들자면 1서클의 마법사는 절대로 시그니처를 만들지 못한다.

덧셈도 모르는데 미적분을 어떻게 하냐는 식의 논리, 예시는 이렇지만 현실은 이보다도 훨씬 극단적이다.

8서클의 마법사도 시그니처를 평생 못 만든 채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운 마법을 만든다는 게 그러하다. 더군다나 자기 마나 성질을 1부터 100까지 모두 확실히 파악하고 있어도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네, 네가 무슨... 이 말도 안 되는...”

디안에게로 뻗은 손에서 피가 뚝뚝 흐른다.

냅둬도 며칠이면 나을 경상이었지만, 당황스러운 건 다른 문제였다.

디안이 시그니처 마법으로 첫 번째 푸른 방패를 뚫고 내게 상처를 줬다.

전혀 어려울 것 없는 문장이지만 이해가 불가했다. 나조차도 첫 번째 방패의 방어막을 뚫어내기 힘들다. 아니, 설령 메이블일지라도, 스승이라도 불가할 것이다.

그걸 디안이 해냈다. 시그니처를 완성했다는 혼란만큼이나 그 사실은 놀라웠다.

마법의 정체가 뭐길래? 디안이 말하길, 그 마법의 이름은­

“소매치기.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면 발동하는 마법이에요.”

어딘가에 마킹을 해두고, 그 마킹한 곳과 자기 마법이 발동하는 곳을 잇는 차원문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니, 차원문이랑은 조금은 다른 개념이다. 시간 역행과도 어우러지는... 시공간을 넘어 공격과 공격 사이 경로를 잇는 막을 수 없는 통로와도 같은 개념.

“제 심장을 통해 마킹하면 위력은 더욱 증폭되고요. 마탑주님이기에 공격의 위력을 현저히 줄였어요. 방어막 내부에서 광범위한 공격이 폭발하면 다치실 테니까요.”

디안은 내 손을 끌어 자기 심장에 얹었었다. 단지 언약을 확인시켜주려는 행동이리라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내기에서의 내 패배는 확정되어 있었다.

방심하지 않았다. 내가 지닌 최강의 방패로 디안에게서 공격을 막아내리라 했다.

흠집조차 날 리 만무한 내기였다. 하지만 나는 다쳤다. 그녀의 시그니처 마법은 강력했다.

이게 전부다. 나는 놀란 손을 거두며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괴물을 키웠어.”

디안은 4서클에 시그니처 마법을 완성했다.

내 머릿속 천재의 부류에 한 명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스승, 메이블, 디안.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녀도 용사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 스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괴물로...

“디안,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게 뭔지는 알아?”

최세린에게서 건네받은 붕대로 내 오른손을 둘둘 감았다.

“몬스터를 해방하려는 것. 아닌가요?”

“맞아. 이 길은 무척이나 위험해. 시간 역행보다도 더욱. 우리는 전대륙에 반기를 드는 거야. 그건 용사일지라도 용서받지 못해. 그런데 네가 따라오겠다니... 내기에서 패배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너 같은 마법의 원석이 이런 위험한 짓에 어울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마탑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어떤 가치나 명예 재물보다 저는 마탑주님의 옆자리를 원해요. 설령 뒷자리일지라도 평생 곁에 있고 싶어요.”

얘기는 무겁지만,

“욕심이나 고집인가요? 마탑주님의 옆에 서고 싶다는 그 집념만으로 시그니처를 완성했어요. 아직도 부족한가요?”

디안의 시그니처, 그것은 내가 아는 시그니처와는 사뭇 달랐다.

스승의 시그니처, 메이블의 시그니처, 나의 시그니처.

그 마법들과는 비교 대상이 못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은 분명히 시그니처였다.

아직 개선의 여지는 다분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디안은 본인의 가치를 증명했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는 디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거야. 잘 따라와.”

“제자한테 패배한 주제에 똥폼 잡기는.”

“......”

최세린은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이프카리스토로 걸어가고 있었다.

*

참모장 일지 39p ­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자에게 마법으로 승리하리라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아직도 나는 부족했다. 흑마법을 배웠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 시그니처 트럼프까지 사용했음에도, 심지어 게임을 제안해 승리했음에도 나는 그를 넘을 수 없었다. 긴이나 브룩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지도 못 했겠지.

알고 있다. 그는 인간의 편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덤벼들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초월자라는 게 있다면 그에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신에 가까울지도.

그만큼 그는 내게 있어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존재. 평생 발버둥쳐도 그의 발끝에나 닿을 수 있을까.

직접 겪어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의 영웅은 나와 결이 달랐다.

그가 전송자가 아니었다는 건 더 충격적이었지. 그게 날 더욱 분노케 했다. 그래서 덤벼들었던 건데, 지금 다리가 벌벌 떨리는 것처럼 볼품없이 패배할 줄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그에게 덤볐을까?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왜 그에게 분노했던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토록 강했음에도, 최악의 드래곤 놈도 못지않게 강하다는 걸 아는데도.

그들은 왜 마왕과 사천왕을 물리치지 않았던 걸까? 왜 우리가 이런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남의 세계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이 세계에 정감이 생겨버린 걸 어쩌겠나.

오지랖이라는 걸 알고 있다. 토텔리도 말은 안 했지만, 내 계획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용사 된 입장에서 다른 몬스터들은 무조건 악이리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발에 깔려 지배당하거나 배척당했다.

그들의 영토는 인간에게 빼앗겼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개죽임을 당했다.

이래서야 마왕군이나 인간이나 크게 다를 게 뭔가? 몬스터는 서로 죽이지는 않으니 어쩌면 인간보다 낫다. 왜 이런 걸까. 마왕군을 깨부쉈더니 왜 인간은 무언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가난한 이의 부인을 탐한다거나, 몬스터에게 목줄을 채워 키운다거나, 더 높은 직위를 위해 상관을 암살한다거나, 대군을 이끌어 전쟁을 펼친다거나.

등등.

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이는 손에 꼽히는 건지...

어쩌면 이것도 문신을 지닌 자들과 관련있는 걸지 모르겠다. 슬슬 졸린가? 글이 중구난방해지는 것 같다. 오늘은 이만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아이고, 방금 침대를 보니 당혹감이 밀려왔다.

단탈리온은 내 펜 움직이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내 침대에서 새근새근 숨을 뱉고 있었다.

분명 나 간병해준다고 멋대로 찾아오지 않았나? 마경에서는 환자의 침대를 뺏는 건가. 하긴, 저러니까 악마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평화로운 표정으로 자는 모습이 퍽 보기 좋다.

저 순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소파에서 잠 자는 것 정도는 제법 괜찮은 가격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마왕군을 부활시키고도 저 미소를 종종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순된 말이지만, 마왕군을 통해 세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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