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악(?)?
* * *
“거짓말하셨네요. 서대륙 들렀다가 바로 데리러 오겠다더니...”
디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옷자락을 당겼다. 그에 몸이 당겨진다. 그대로 날 강하게 껴안았다.
“......”
갈 곳 잃은 내 두 손은 허공에서 맴돌다가 몸을 약간 부르르 떠는 디안의 등과 머리 위에 자리했다. 그녀는 분노에 사무쳐 떨리는 목소리였다.
“왜... 왜 맨날 말도 없이 떠나가시나요.”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 마왕성 시간 역행이나 몬스터 부활에 너를 데리고 다닐 순 없으니까다.
내가 디안을 방치할 때는 세계를 척지는 행동을 할 때이다.
같은 용사였던 최세린조차도 내 고집에 어울리게 했다는 것에 약간의 죄책심이 들었는데, 이게 가중되는 건 디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거절하고 싶다.
“디안.”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살짝 밀쳐내려 했으나 그녀의 내 등을 감은 두 손이 더욱 강하게 날 끌어당겼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걸 어떻게 떼어놓아야 할까.
몸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오지 않게끔 하는 방법 말이다. 스승의 명령이다 뭐니 해도 들을 것 같지도 않은데.
‘...자신의 마도.’
‘마법은 본인을 지키기 위한 수단~’ 비견되게 단골멘트로 사용했던 문장이 떠오른다.
“남의 지식은 참고 수준에서만 그치고 자신의 마도를 갈고닦으며 개척하라는 말 기억하지?”
“네, 기억나요.”
“지금이 그래. 너 삶을 살아야지, 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 어떡해.”
인류에게 찍히지 말라는 거다.
나나 최세린은 용사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디안은 빼도박도 못 한다.
그러니 몸 사리라는 거다. 괜히 나서지 말고.
‘주제도 안 되고.’
귀찮아지는 게 질색이다. 디안은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그건 전투 마법사로서의 강함이지, 그녀가 지닌 세력이나 정치적 힘. 그따위 것들은 보잘 것 없다. 오직 용사의 제자라는 타이틀 말고는 그녀가 거룩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표적이 되면 쉽사리 죽는 건 순식간이다.
심지어 전투력도 따지자면 내 기준에서는 현저히 낮다.
일반인의 범주는 진작에 뛰어넘었다지만, 전체적인 기준에 맞추어보면 그녀는 병아리만도 못 한 존재다.
“마탑주님의 등을 쫓아가는 게 현재의 제 마도에요! 제자가 스승님을 따라가겠다는 게 뭐가 문제인가요?”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디안이 내게 ‘스승님’이라고 말했던 게 그 이유다.
디안은 언젠가부터 단 한번도 내게 스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두루뭉한 대답만 돌아왔기에 더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은 디안의 꽤나 단호한 태도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었다.
달래서 보낼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분노한 채다.
화를 내서 돌려보낼까? 글쎄, 그것도 좋은 방식은 아닐 것 같다. 되려 반발심에 주피아에 갔던 것처럼 몰래 뒤를 밟는다면 그거야말로 더 귀찮게 작용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녀를 마왕성에 데려가지 않았던 이유가 떠오른다. 짐덩이가 되리라는 확신이었다.
디안은 강하다. 하지만 무르익지 않았다.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우리 같은 전송자도 아닌데 더 말해 뭐할까.
동행하기엔 그녀의 능력은 아쉬웠다.
“너는 짐이야.”
입가에 쓴맛이 느껴진다. 말한 나조차도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당사자는 어떨까. 굳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디안, 제자 중에선 네가 가장 뛰어나고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아. 마법에 있어서 너는 천재야.”
하지만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에 비한다면 말이야. 진짜 천재는 따로 있어. 내 스승님이라거나 지금은 죽었지만 흑마장 메이블 토진, 마법의 본래 주인인 용족들. 남대륙의 마탑주들조차 이들의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해. 하물며 너는 어떨까.”
“제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래, 네가 무얼 할 수 있지? 첩보? 암기 용사 진 키아라가 내 옆에 있어. 방어 마법? 내 귀걸이만 봐도 알잖아. 머리 쓰는 일? 글쎄, 우리도 그리 멍청하진 않은걸. 다른 마법? 마법 용사인 내가 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말을 쏟아내자 디안은 물끄러미 내 귀에 걸린 방패 모양 팬던트를 바라봤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최세린과 이프카리스토를 향해 몸을 돌렸는데 그녀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갑다. 디안은 악에 찬 목소리로 뱉었다.
“...돈 갚으셔야죠.”
응?
“최상급 차원석. 아직 빌린 돈 안 주셨잖아요.”
“어, 아... 그랬지? 얼마였더라?”
“1,500골드.”
잠깐만.
뒤통수가 따가운 걸 넘어서 얼얼해졌다. 내가 그렇게나 많이 빌렸던가?
그보다 디안은 대금을 어떻게 지불했던 걸까.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졌다.
“하, 하, 하하?”
목숨이 걸린 도박판에서 패를 공개하듯 경직된 표정으로 진땀을 흘리며 가방을 열어 보니 금화가 제법 두둑했지만 1,500골드를 채울 수준까지는 결단코 아니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가방에게서 디안에게로 시선을 겨우 돌리자 그녀는 숨을 뱉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날 더욱 절벽으로 몰아세웠다.
대화의 주도권이 디안이 빚을 언급한 순간부터 빼앗겼다.
그게 뭐가 재밌다는 건지 최세린은 얄미운 시누이처럼 턱을 짚으며 베시시 웃고 있었다.
“갚아주세요. 지금 당장.”
디안이 저 최세린의 웃음기에 전염되면 좋으련만, 그녀의 어조는 차가웠다.
생판 남을 대하는 태도. 항상 내게 지나칠정도로 호의적이고 충성적이었던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적응할 수 없았고, 등줄기에 오싹함이 느껴졌다.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지게 만든다던가, 그 말의 뜻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이자 쳐서 돌려주면 안 될까?”
문득 마법 교본의 가격을 올리는 게 좋지 않겠냐던 출판업 사장 말이 생각난다.
나는 평화를 위한 교본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며 극구 거부했지만, 이제 보니 그의 주장은 굉장히 타당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탑에서 돈을 왕창 챙겨나가는 건데.
제자들 굶지 말라고 베풀었던 배려 때문에 제자에게 위압당하는 경우가 올 줄 꿈에나 알았을까.
마탑 들렸을 때 돈 다 챙길걸, 후회가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지옥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무슨 생각을 하든 지금은 달라지는 게 없었다. ‘빚’이라는 이름의 거미줄에서 탈출하는 게 급선무다. 거미는 말했다.
“이자 필요 없어요. 당장 주세죠. 근데 아까부터 왜 그러시죠?”
겨우 멀어졌건만 디안은 다시 다가왔다. 여지껏 본 적 없던 단호하고도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내 가방을 향했다. 그곳으로 고개를 뻗어 안을 확인하곤 디안은 웃었다.
“이럴 줄 알았어요.”
차가운 미소, 최세린이 적에게 보이는 그 특유의 표정과 판박이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나는 디안이 고개를 돌려 나와 강제로 시선을 맞추려 할 때마다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맹수에게서 여유로운 척 뒷걸음치며 도망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차피 결말은 핏빛일 텐데.
“당장 갚을 능력 안 되시죠?”
“그게 스승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 디안은 거침없이 내게 다가왔고, 나는 살살 뒷걸음치고 있었다.
퉁 나무에 몸이 부딪혔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흐흥... 그럼 내기 하나 하실래요? 이 내기 들어주시면 빚 건은 넘어갈게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건 내 양심에 달린 문제였으나 어째서인지 그냥 도망칠 생각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아니, 들지 못 했다.
물러날 수 없는 건 나무에 부딪친 내 몸뿐만이 아니었다.
심리적인 문제라 잘은 모른다만 상황이 외통수였다. 사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어쩌다가 마탑주의 위신이 이렇게 추락한 걸까. 그래봤자 디안에만 국한된 얘기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디안은 조금 껄끄러운 면모가 있었다. 속이 쓰리다.
“...내기가 뭔데?”
“‘주고받기’, 기억하시죠? 연마다 마탑주님에게 공격을 퍼부어보고, 공격을 받아보며 기량을 가늠하는 우리 마탑만의 행사.”
기억난다. 내가 만든 룰인데 왜 모를까.
제자들의 성장 수준을 가늠하고자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내가 막아보고, 내가 나름 조절한 공격을 이들이 필사적으로 막아보는.
조금 찌질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을 담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만들었던 것.
나를 가장 존경했던 수제자가 말했다.
“제가 제안하는 건 제 일방적인 ‘주기’에서만 그쳐요. 마탑주님이 제 공격에 완전히 무사하다면 마탑주님의 승리. 그때부터는 더 귀찮게 질척이지 않는 말 잘 듣는 제자로 다시 돌아갈게요.”
“그럼 네가 이긴다면?”
“제 강함을 입증하는 거잖아요? 절 언제까지나 데려가주세요.”
“...하지만 세린이가 허락 안 할 수도 있잖”
“난 괜찮아! 디안 예쁘고 착하고 싹싹하고 말이 얼마나 잘 통하는데!”
이년이...
이를 꽉 깨물며 디안에게서 살짝 벗어났다.
사실 최세린이고 뭐고 나는 굉장히 자신 있었다. 내 서클은 시그니처를 완성함으로써 9서클에 도달했다. 디안도 내 제자가 된 후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래봤자 4서클이다. 눈 감고도 이긴다. 하급 방어막으로도 그녀 전력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무모한 도전을 하네.’
디안의 비장한 표정과는 달리 나는 굉장히 여유가 넘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