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악(?)?
* * *
플라금의 국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라스타.
정윤상 새끼는 차원문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거니와 용사 시절부터 사용했던 훌륭한 이동 수단을 오랜만에 느끼고 싶었다나 뭐라나, 하여간 개 같은 이유였다.
“이야, 경치 좋다~!”
최세린이 흩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게 꼴받아서 일부러 몸을 비틀어 녀석들에게 물방울을 튀겼다. 그걸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청량하다느니 뭐라느니 떠들며 요리조리 피해내는 걸 보자 더 약이 올랐다.
촤아아아
플라금과 라스타의 국경은 거대한 강을 끼고 있다. 그 강을 지나고자 내게 오랜만에 물고기 형상을 보여달라며 주접들을 떨어서 어쩔 수 없이 사어(??) 모델 메갈로돈의 모습으로 변환은 했으나, 내 등을 밟고 편안히 움직이는 게 영 아니꼬왔다.
“덕분에 편하게 갑니다 상어 씨.”
‘확 시발, 뒤엎어버려?’
술이라도 들어갔다면 몸을 뒤집었을 텐데, 아쉽게도 제정신이어서 내치지는 못했다.
정윤상과 최세린, 그리고 나는 라스타로 가서 문신에 대해 알아내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뱀 문신. 그걸 듣자 나도 잠자리 뒤숭숭한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을 곱씹자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 기억이 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의견 충돌로 4명의 용사가 잠시 흩어졌던 적이 있었다.
최세린은 북대륙에, 정윤상은 마법 스승에게, 김철수는 잘 모르겠고, 나는 자주 가던 단골 술집을 찾아 동대륙 동측에 있는(지금은 플라금한테 멸망한) 크니틸리로 갔었다.
그곳에는 유흥가가 아주 활성화 되어있다. 치마 짧고 분내 풀풀 풍기는 여자를 낀 채 술에 쩔어있었고, 다음 용사 합류 시기까지 이러한 방탕한 삶을 즐기려고 했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받는다던가, 그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개소리였다.
크니틸리의 행인이 유명인사인 나를 알아보고 시비를 존나게 걸어왔다.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면 용사로서의 책무는 언제 다 할 거냐고 말이다. 박수나 칠 것이지.
그래서 내가 박수를 쳤다. 그 박수 사이에 내게 시비걸었던 새끼들의 머리가 있었지.
볼이 붉게 팅팅 붓고서야 내게 시비 거는 새끼들이 잠잠해졌다. 단 한 명만 빼고.
나이는 30대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내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치자 잔을 던졌다.
그녀의 서두는 ‘꼴보기 싫다.’였다.
내 돈주고 여자 사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용사도 사람 아닌가? 기분이 좋으면 고성방가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감히 용사에게 잔을 던진 고약한 주사를 고쳐주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박수를 쳐줄 생각이었다.
“시발.”
그때 길거리에서 피떡이 된 채 엎어지는 게 나일 줄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그녀는 허리춤에 세검을 끼고 있었는데, 검을 뽑지도 않고 검집채로 날 후두려 팼다.
그렇게 얻어터지니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검집에 있던 문양을 말이다.
S자 모양. 긴가민가했으나, 최근 질리도록 그 문신을 봐서 나도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문신과 검집의 문양은 같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라스타의 왕을 들들 볶으면 그녀를 찾아낼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곤 복수전을 펼칠 거다. 그날 맞았던 거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배만큼만 되갚을 거다.
그래서 나도 문신충들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들리면서 외면하지 마세요.”
내 머릿속에 지겨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요정족의 여왕, 넬피의 어미인 카넬루아. 그녀가 자꾸만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에 표정을 굳어지는 걸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대꾸도 없는 내게 질려 말을 멈추길 간절히 바랐다.
“제게 빚진 게 있지 않나요?”
가드 불가 기술, 혹은 필살기.
카넬루아의 덤덤한 목소리를 듣자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이 지독한 년. 넬피만 아니었더라면 죽여버리고 싶다.
‘제발, 내가 티백도 아니고 얼마나 우려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역시 듣고 계셨네요. 용사끼리 어딜 가는 건가요?”
‘문신 가오충들 혼내주러. 근데 너 알 바 아니잖아. 신경 꺼주면 안 될까?’
“네, 그건 안 되겠어요. 일단 일행에게서 벗어나시겠어요?”
‘내가 왜?’
“검술 용사가 근처에 있어요.”
‘...그놈의 검술 용사.’
씨발, 또 김철수의 얘기였다.
[...옘병, 못 해먹겠네!]
촤악!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최세린과 정윤상이 날라갔다.
그들은 당황하기도 잠시, 침착하게 시퍼런 마법진을 바닥을 향했고 그 마법진에서 나온 냉기가 바닥에 얼음 바닥을 만들었다.
콰작!
그곳에 정윤상이 요란하게 착지했고, 최세린은 고양이처럼 여유롭고도 부드럽게 얼음 바닥을 밟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최세린의 담담한 어조, 그녀가 말문을 닫자 머릿속에서 카넬루아의 목소리가 울린다.
“우선 다른 용사에게서 벗어나세요.”
‘다 같이 가는 방법도 있잖아. 왜 그래야 하는데?’
“그가 타락했기 때문이죠. 넬피를 데려오세요. 그리고 검술 용사를 만나봐야 합니다. 그가 더 어둠에 잠식되기 전에.”
‘...나한테 도대체 왜 그러냐? 너는 왜 검술 용사한테 그리 집착하는 건데.’
“언젠간 알게 될 겁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어서.”
카넬루아는 단호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되려 역정냈다.
[내가 왜 너네랑 어울리고 있는 거냐?]
“정신병이야?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아니,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됐지만 나는 문신이고 뭐고 알 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 동행은 여기서 끝이야. 나는 라스터 왕이든 뭐든 관심 없으니까 알아서들 가라.]
정윤상과 최세린의 황당한 감정은 타당했다. 그 얼굴을 마주하기 뻘쭘했기에 재빨리 잠수하여 역주행했다.
촤아아
머잖아 드넓은 대지가 나왔다. 물 속에서 몸을 튕기며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대로 형태를 변환했다.
˚ 형변(??) 랑!(?) 모델 펜릴! ˚
매끈한 피부에서 털이 수북히 자라났고, 역삼각형의 머리통이 얇아지며 주둥이가 길어졌다.
쿵!
거대한 늑대의 모습이 되어 대지를 짓밟았다.
흙이 튀긴다. 조그마한 돌멩이가 다리를 때렸다.
그대로 인적 드문 길로 달려나갔다. 나에 의해 바람이 갈라진다. 털에 묻은 물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넬피는 왜 데려오라는 건데?’
“검술 용사의 탁기(??)를 걷어내야 해요. 그 분야에서는 제 딸이 전문가잖아요?”
*
“귀찮아지겠어. 나는 뭘 믿고 이 양반을 따라와서는 사서 개고생이람... 에휴.”
최세린의 탄식이었다. 나는 뻘쭘함을 느끼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암두시아스 없이 몬스터를 해방시키는 것, 불가능은 아니지만 최세린의 말마따나 굉장히 귀찮아지는 건 명백했다.
우선 내가 마기를 통해 탐지 마법을 펼쳐야 한다. 그 마법으로 근처에 있는 몬스터의 위치를 알아두고 나와 최세린이 직접 발로 뛰어 구출해낸다.
그것에서 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몬스터가 우리 통제를 따를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생각한 최선책은 최세린의 사슬로 묶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차원문을 통해 미개발지역으로 보내버리는 거다. 그곳에서 알아서 살라고 놔두면 그게 해방이지 뭐겠는가.
나름의 분류 기준은 있었다.
북대륙 미개발지역이자 과거의 마왕성.
그곳은 자이키릭의 마법 때문에 4계절 내내 폭설이다. 그를 감안하여 털이 수북한 웨어울프나 아울베어, 가죽이 두꺼운 트롤 등을 보낼 거다. 적어도 얼어죽지는 않겠지.
잘하면 마티고스한테도 부탁해도 되겠고.
서대륙, 내 마탑 때문에 쉽사리 몬스터가 들어오지 못하던 데미투 인근 산악 지대와 폐허.
그곳에는 흡혈귀나 다크 엘프, 몬스터치고 지성이 높은 녀석들을 풀어둘까 한다.
놈들의 특징이라면 일하기를 더럽게 싫어한다는 것인데. 그래도 조금 무너진 건물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 동물도 많으니 식량도 걱정 없을 것이다.
여기서 폐허가 무엇인고 하면, 그곳은 원래 도시였다. 이름은 아마 행운이라는 뜻의 티히(τυχη) 였었나, 맞는 것 같다.
그곳에 있는 자연 동굴, 거기에서만 자라는 버섯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렸었고, 산악지대를 좀 넘어서면 거대한 절벽이 나오는데, 그 밑은 울창한 밀림이 이어져 있다.
그곳에도 진귀한 식자재가 많다는 소문은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티히 시민이었다면 심바니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 뭐하냐. 티히는 과거의 마왕군에 의해 괴멸했는데.’
메이블을 비롯한 마왕군 얘기가 아니다. 아마 수백년 전으로는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인간과 마왕군은 언제나 대립했었다. 마왕군은 곰팡이나 구더기처럼 어디선가 꾸멀꾸멀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에 맞서는 용사들은 언제나 있었다.
문득 그 용사들이 어떻게 죽었을까 행방이 궁금해졌지만, 메이블의 일지에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우리 이전 용사들은 다 죽은 걸까? 어쩌면 그들도 우리처럼 전송자였고, 지구로 돌아간 게 아닐까. 그건 그거대로 좋겠다 싶다. 대기에 마나 대신 이산화탄소나 자동차 매연만이 가득하여 마법을 못 쓰는 건 아쉽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더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티히가 무너진 건 수백년 전 얘기다.
여담이지만 아직도 건물이 잘 살아있는 걸 보면 역시 서대륙이 건물 하나는 기가막히게 짓는다는 건 확실했다. 내 마탑도 튼튼하게 지어줬으니 말이다.
남대륙, 광활한 사막이 쭉 펼쳐져있는 곳. 농담삼아 초열지옥이라고도 부르는 그곳.
그곳에는 뒤덮인 신전이 많다. 예전에는 큐(Q)라는 이상한 이름의 창조신과 그의 자식 4명을 모시는 종교인들이 사용했던 곳이었으나, 모래폭풍에 파묻혀 산채로 매장당했다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그 때문에 큐(Q)는 추양받길 원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자주 나왔었지.
하기야, 신에게 기도했는데 돌아오는 대가가 모래에 인한 압사 혹은 질식사라면 나도 신 따위 믿지 않을 거다.
지금도 종교를 믿는 자는 있으나, 그들이 정녕 창조신과 4명의 자식에게 축복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그니스한테 물어봐도 괜찮겠다.
얘기가 잠깐 샜으니 본론으로 돌아오면 그 무더운 사막 지역, 그곳에는 원래 땅에서 지내는 웜 같은 놈이나 더위를 못 느끼는 몬스터 등을 보낼 생각이다.
마지막 동대륙은... 좀 문제가 있으니 보류.
아무튼 몬스터 해방 이후의 플랜은 다 짜뒀다. 이제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첫 번째는 차원석.
최근들어 차원문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에 마도구 시장에서 구입해둔 차원석은 안에 있는 마나가 달아 등급이 떨어졌다. 최상급에서 상급으로 말이다. 이건 대륙 대 대륙 단위의 차원 이동은 불가하다는 걸 뜻한다.
상관은 없었다. 상급, 혹은 중급 차원석만으로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줄어들 뿐이지 차원문은 만들 수 있다. 더군다나 상, 중급 차원석은 최상급정도로 희소성이 높지도 않다.
차원석 문제는 고민이 아니었다.
두 번째 준비, 그것은 몬스터가 내게 호응할 수 있는 근거였다.
내 마기의 급은 그들보다 높다. 일루전 마법으로 내 정체까지도 유야무야 넘어갈 수는 있다. 허나 그들이 과연 인간을 따라줄까?
술집에서의 다크엘프는 지성이 짙은 종족이기에 곧바로 도망쳤지만, 지성이 낮은 몬스터일수록 추후를 도모하기보단 일차원적인 생각만을 머금고 내게 덤벼들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종족을 연기하는 건 어떨까.
“드래곤은 어때?”
최세린의 제안이었다.
괜찮은 발상이다. 드래곤이 몬스터를 보호하는 경우는 가끔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자이키릭도 자신의 레어에서 설인을 길렀었다.
인간 모습으로 그들을 구원해도 개연성이 충분했다. 마티고스가 주피아의 절대 요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냈던 게 반증이었다.
“괜찮은 제안이야. 그럼... 레드 드래곤이 괜찮으려나?”
최악의 드래곤의 종족이 레드 드래곤이기 때문.
그는 마왕군과 다를 바 없는 행적을 남긴다고 했다. 그의 레어에 몬스터가 여럿 살고 있다는 것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몬스터를 구원할 때 그의 자식을 연기하면 될 듯하다. 그 최악의 드래곤이 날 죽이고자 날아온다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어차피 그와는 한 번 만나봐야 한다.
“다 정했네. 플라금부터 시작할 거지?”
그게 이상적이다. 지리상 가장 가깝기도 하고, 이제는 차원문을 멋대로 만들 차원석이 없었다.
또한 플라티넘에게서 협조를 얻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재홍이 그에게 단단히 겁을 주었으니, 또한 양과 음을 보란듯이 제압했으니 그는 내게 강제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겸사겸사 이프카리스토에서 차원석도 충당해야 한다.
“마탑주님!”
그때 누군가 뒤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청아한 목소리다. 지금은 가장 듣기를 꺼렸던 목소리.
어떻게,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허튼 생각이었다.
“거짓말하셨네요. 서대륙 들렀다가 바로 데리러 오겠다더니...”
디안이었다. 그녀의 눈썹이 약간 올라가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뜻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