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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29화 (29/152)

〈 29화 〉 악(?)?

* * *

몬스터, 마족들을 지배하는 건 악마다.

마기에도 급이 있다. 마족들이 아무리 강해 봐야, 인간이 아무리 타락해봐야 악마의 마기는 넘을 수 없다. 격이 다르고 근본이 다르다.

암두시아스가 필요한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그녀가 마기를 방출한다면, 인간에게 붙잡혀있는 몬스터는 재깍 반응할 것이고 그건 몬스터를 해방시킬 원동력이 된다.

몬스터의 해방을 위해선 악마의 마기가 필요했다. 현세로 넘어온 모든 악마가 처형당한 이 시점, 암두시아스만이 핍박당하는 몬스터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악마였다.

[악쿤 토든.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지만 이기심이 도를 넘는군.]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비이린이었다. 술집을 시작으로 한바탕 소동을 피운 후 그대로 차원문을 또다시 만들었다. 덕분에 차원석은 거의 거덜 났지만 생각을 마친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게 후회되진 않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행동력이 저하됐을 테니 이게 옳았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몬스터 해방을 위해 암두시아스가 필요하다.

그러니 물러날 수 없었다.

“세계수의 가르침을 아시잖습니까.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포용하라는.”

몬스터도 생명체다.

그들은 결단코 악이 아니다. 마왕군에 속한 몬스터만이 악이라 불릴 자격이 된다.

사실 그들도 마왕과 사천왕의 꼭두각시일 뿐이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궤변일세! 몬스터가 악이 아니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암두시아스가 나설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암두시아스가 마기를 터트리는 순간 그녀의 정체가 발각될 우려가 있다.

악마의 존재부터가 세계에 혼돈을 불러온다. 그를 모르지는 않았다.

암두시아스의 정체는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마기에 대한 것은 내 마기라 둘러댈 생각이다.

허나 최악의 경우는 언제나 생각해둬야 하는 법이다.

눈치 좋은 누군가에 의해 암두시아스의 정체가 발각된다면, 그녀는 전인류의 표적이 된다.

그로부터 지킬 수 있냐 없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 어린아이는 전인류에게 질타를 받을 것이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악마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허술하게 할 생각은 없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암두시아스를 위험에 빠트리진 않을 것이다. 그 모든 질타는 내가 감당할 것이다.

그 감정이 읽힌 것인지는 몰라도 이그니스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암두시아스는 어린아이일세. 먹을 것을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어린아이.]

“맞습니다.”

[그녀는 비이린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더군다나 마기를 방출한다라, 내가 허락 못 하겠네.]

“암두시아스를 현세로 데려온 건 접니다. 그녀는 과거에서 죽을 운명이었어요.”

[그 아이를 구원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유를 억압할 셈인가?]

“평생 자유 억압이라니, 말이 무겁습니다. 몬스터 해방은 단기간에 끝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몬스터 해방이 그녀의 사명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그녀만이 현세에 남은 유일한 악마이니까요.”

마왕군은 괴멸했고, 인간은 승리했다. ONE(?)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여기서 이야기는 끝났어야 했다. 인간은 증오의 사슬을 끊었어야 했다.

몬스터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고, 그들만의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몬스터가 서로를 적대할 이유는 없다.

그 영역을 먼저 침범한 건 인간이었다.

나라와 대륙, 용사라는 영웅을 등진 인간과는 달리 몬스터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사라졌다.

이윽고 이들은 인간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내가 그린 평화의 정의는 평등이다. 몬스터가 상대적 약자가 되었더라도 인간에게 그들을 지배할 권리는 없다.

내 정의는 확고했다.

몬스터가 인간을 잡아먹거나 죽인다면 나는 몬스터를 제압할 것이다.

인간이 몬스터를 고문하고 죽인다면 나는 인간을 제압할 것이다.

몬스터의 편에 선다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시 중립을 지킬 것이다.

그를 위해 암두시아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녀는 마기만 방출해주면 된다.

사실 악마가 암두시아스만 있는 건 아니다.

마경에는 또다른 악마가 있고, 다음 세대 단탈리온도 지금쯤이면 태어났을 것이다.

0서클 마법 중 하나인 악마 소환, 그 마법을 통해 그들 중 하나를 소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다.

단탈리온, 그리고 과거의 악마들은 스스로를 마왕이라 칭하며 세상을 위협했다.

혹여나 그런 위험한 사상을 가진 악마가 소환된다면? 곤란하다는 단어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악마의 강함을 나는 잘 모른다. 마왕 단탈리온은 용사와 전투할 의지가 없었고, 쉽사리 죽어줬다.

만약 그녀가 복수심에 찌들어 우리를 죽이고자 덤볐더라면 어땠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완성된 악마의 강함을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말 자체가 모순이지만 선한 악마인 암두시아스가 필요한 게 이러한 이유다.

악마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악마가 소환될지도 모른다는 점 말이다.

사실 내가 스스로 마기를 방출해 몬스터를 찾아낼 수는 있다. 그들이 내 마기에 호응해줄지 확신이 없으니 문제지.

인간이 마기를 방출한다는 것 자체가 모방에 불과하다. 마법이 드래곤의 영역이듯 흑마법과 마기는 악마의 영역이다.

때문에 설령 어린애일지라도 악마인 암두시아스를 통해 확실하게 몬스터를 해방하겠다는 건데.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겁니까?”

[말했잖은가. 그 사상이 틀렸다는 건 아니네. 다만 암두시아스를 도구처럼 이용하지 말란 말일세.]

“편한 길을 두고 왜 굳이 돌아가야 하나요.”

[...그 태도가 문제라는 거잖은가­!]

끓는 기름은 겉보기에는 잔잔하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요란하게 끓는 물보다 더 뜨겁다.

이그니스의 상태가 그러했다. 여태껏 침착함을 유지하기에 미처 몰랐지만, 그는 누구보다 분노한 채였다. 그 화살촉은 분명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이그니스가 분노한 이유는 내 뻔뻔하고도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 태도가 역하다는 건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암두시아스를 나 몰라라 비이린에 맡겨놓고 이제 와서 필요가치가 생겼으니 다시 내놓으라는 역겨운 태도. 내가 이그니스의 입장이었어도 분노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이런 감정 상하는 대화를 지속하고 있을까?

앞서 말했듯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몬스터는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

[당장 비이린에서 나가게! 그대가 있어도 좋을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이그니스의 뜻은 확고했다.

“암두시아스를 만나봐야겠습니다. 비켜주시죠.”

[세계수로 들어가려거든 날 쓰러트려야 할 것이네!!]

이그니스가 연황색의 찬란한 빛을 터트렸다.

나뭇잎이 요란하게 진동한다.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머리칼이 휘날렸고, 내 로브, 최세린의 망토가 우리에게서 도망치고자 했다.

내 발끝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림자가 굉장히 짙어졌다. 또한 너무나도 거대해졌다.

차마 눈을 뜨기도 버거웠다. 그를 마주하면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이그니스는 평소의 둥글둥글하고 눈, 코, 입도 식별 불가능한 추례한 모습이 아니었다.

찬란한 갑주가 그의 온몸을 덮었다. 그의 몸을 휘감는 빛줄기는 강렬했다.

어느새 고개를 쳐들지 않고서야 얼굴도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몸집을 부풀린 위엄 넘치는 정령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무거운 시선이 나를 찌른다. 이그니스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휘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묵묵히 언쟁을 구경하던 최세린이 두 손을 하늘 위로 들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나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만물의 균형을 이루는 다섯 정령왕. 이그니스는 그중 하나다.

그가 본형까지 드러내며 확고한 뜻을 밝혔다. 지금은 그를 존중해야 했다.

“...이그니스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입가에 쓴맛이 느껴지지만, 지금은 별 방도가 없었다. 이그니스가 칼을 뽑았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도 물러날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이다. 그가 암두시아스를 아낀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우선은 물러나자. 오늘은 날이 아니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암두시아스에 대한 건 잠시나마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대신 이그니스가 악마인 암두시아스를 이토록 아끼는 이유만큼이나 궁금한 것 하나를 알아내야 했다.

“바비룬 필라이트는 왜 이곳에 없는 거죠?”

세계수 안에서는 그가 느껴지지 않았다.

*

플라금과 라스타. 그 사이 국경에 있는 강.

그 강의 상류를 따라 쭉 걷다 보면 습진 오두막이 하나 있다.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오두막이.

“못 본 사이에 인상이 많이 바뀌었네요?”

요정족 공주 넬피가 살랑살랑 사내의 주변을 맴돌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에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에 검을 휘둘러 검에 묻은 진녹색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대꾸도 안 하실 거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해...”

[내버려 둬. 저 양반 동공 풀리면 제정신 아니라는 거니까.]

펜릴, 거대한 늑대 모습의 주술 용사 바비룬 필라이트가 이죽였다.

그는 오두막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사체에 다가갔다.

킁킁,

어우 시발, 방금 막 죽였구나. 중얼거리며 바비룬은 사내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잠시 바비룬에게 향했다. 그리곤 넬피에게 머물렀다.

그는 무표정으로 이들을 응시하다가 근처에 보이는 널찍한 바위에 앉았다.

미스릴 갑옷 속에서 헝겊을 꺼냈다. 묵묵히 검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다.

[꿀이라도 한 사발 처먹었나? 겨우 찾아냈더니 아는 척도 안 하네. 뭐가 그렇게 충격이었냐고 묻잖아, 이 새ㄲ...가 아니라 형님아.]

바비룬은 넬피가 사내의 뒤에서 두 손으로 곱표를 그리며 극구 만류했기에 겨우 화를 참아낼 수 있었다.

사내는 영혼이라도 나간 것처럼 표정의 변화도 없었고, 어떤 말에도 호응하지 않았다.

바비룬은 답답함에 혼잣말로 쌍욕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는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옛날부터 형이 용사 중 가장 성품이 온화하다는 말이 같잖았어.]

사내를 가리킨 말이었다.

두 동강 나 내장을 바닥에 쏟은, 머리가 잘려 뇌수가 흐르는, 가슴팍이 뚫려 그곳에서 피로 웅덩이를 만드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불에 몸을 담군 듯 온몸이 그을려 피부가 시뻘겋게 변색된, 강가에 토막난 채 둥둥 떠 있는.

몬스터가 한가득이었다.

강은 그들의 끈적한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비단 몬스터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대지는 처참하게 난도 당한 채였다.

잘 보면 강가도 마찬가지다. 상류에서 흐르는 물이 어느샌가 폭포가 되었다.

바비룬의 기억이 맞다면 이곳에는 폭포가 없었다. 필시 눈앞의 사내가 잘라낸 것이리라.

[플라금에서 일으킨 전쟁 때문이야?]

“......”

[거 시발, 존나게 답답하네. 주둥이는 장식이냐?]

“바비룬님!”

넬피가 바비룬을 만류하는 사이 사내, 검술 용사 다르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온몸에서는 검은 오러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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