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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28화 (28/152)

〈 28화 〉 꼭두각시

* * *

문답이 종료되고 우리는 아들러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둘 다 말을 잃었다. 아들러는 전쟁을 누가 계획했는지도, 문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문신에 대해서는 딱 하나만 알았다.

그는 문신을 새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팔꿈치에는 문신이 있었고, 그걸 누가 했는지는 역시나 몰랐다.

이건 내게 도움될 정보가 아니었다.

“씨발.”

이재홍이라면 더한 욕설을 뱉었겠지만, 나는 이 정도에서 그쳤다.

누군가 내 온몸에 먹물을 들이부은 듯 기분이 더럽다.

이제 문신에 대한 건 완전히 안개 속에 갇혔다.

디안의 기억을 지운 자도 문신을 지닌 자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노파가 맞겠지? 그렇다면 그녀도 문신을 보유했단 것일까.

뱀 모양 문신, 그걸 지닌 자들을 머릿속에 쫙 나열했다.

아들러 프리브룩스, 아마도 노파, 키메라 상인, 라스타의 국왕.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들 중 방금 만난 아들러를 제외하면 죽었거나 행방불명.

여기까지 생각해봤자 아무런 진전이 없다.

노파는 찾아낼 방법이 없다. 빵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문신에 대한 건 포기해야 하는 걸까.

“......”

이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꽤나 험악했던 것 같다.

최세린은 내게 손을 살짝 뻗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무언가 뜸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살짝 놀라 고개를 뺐으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술이나 마실래?”

“아... 응.”

끄으응­ 기지개를 켜며 번화가로 이동했다.

서대륙의 수도는 왔던 적이 드물다. 용사 시절 2번 정도만 들렸었나.

거리는 시간이 많이 늦은지라 한적했다.

내 공허한 기분을 나타내는 것 같아 쓴웃음이 지어졌지만 몇몇 술집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까칠한지라 내 마음에 쏙 드는 술집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최세린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내 기분에 맞춰주기로 결심했는지 졸졸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으리으리하고 요란한 가게를 찾아 나섰다.

귀족들이나 부호들이 자주 다니는 아주 비싼 술집에서라도 한 잔 꺾어줘야겠단 생각이었다.

“반갑습니다! 두 명이시죠?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찾은 것은 룸 형태의 술집이었다.

삐끼 같이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 직원이 쏜살같이 말을 쏟아내곤 우리를 술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다른 생각에 도달하기도 전에 혼을 쏙 빼놓는 화법.

그 화법이 오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직원을 손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불렀다.

그리곤 0이 많은 양주와 치즈와 과일 등을 시켰다. 그에 직원이 음흉한 눈빛으로 각자 여자랑 남자를 불러줄까 놈이 제안했으나 고개를 절렜다.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술이나 마시다가 뻗고 며칠 쉴 생각이었다.

“씨발... 미개한 년!! 더러운 년!!”

콰창­! 쨍그랑!

그게 많은 욕심이었을까?

안주도 건드리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술만 마신지 1시간 남짓, 옆방에 들어온 손님이 요란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취기도 제법 올라서 행동력은 거침없었다.

벌컥­

그 옆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머리가 다 벗겨진 중년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다크엘프가 재갈과 목줄이 채워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깔려 있었다.

“이 좆만한 새끼가... 당장 안 나가?! 야아! 빨리 저새끼 내쫓아!! 한창 좋을 때 뭐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손님. 따라오시죠?”

우리를 데려왔던 직원 말고 다른 사내가 내 팔을 붙잡고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날 방 밖으로 내쫓을 생각이었으나 나는 한발짝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팔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이, 이 무슨!! 손님! 따라오라고요!!”

그는 줄다리기하듯 내 팔을 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에 답답했는지 중년 사내는 테이블에 있는 양주병을 집어 내게로 던졌다.

퍼석­!

양주가 내 바로 옆 벽에 부딪혔고, 내 머리칼과 얼굴에 튀겼다.

피부가 얼얼하다. 코에 지독한 양주 향이 가득하다.

“나가! 나가라고!! 이 씨발, 안 나가? 안 나가겠다 이거지?”

중년은 격양된 목소리로 컵을 들고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나 그는 내 관심 밖이었다. 내 망각에 맺힌 건 온몸에 상흔이 가득한 다크 엘프였다.

그녀는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몸을 조용히 훑었는데 제법 오래된 상흔도 있었다.

오늘 다친 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새끼가 나오라니까!! 영업 방해라고!!”

“너 그대로 잡고 있어.”

콰작!

직원은 내 팔을 잡고 아직도 버둥거렸고, 중년이 꽉 쥔 유리잔은 내 머리통에서 깨졌다.

이마가 뜨겁다. 그곳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 코를 타고, 턱을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마왕성에서 봤던 적이 있다.”

무표정으로 다크 엘프를 훑었다.

유리잔이 머리에서 깨졌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나를 보니 중년과 직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너 하나만이 아닐 테지.”

“......”

내 질문에 다크엘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씨발! 사람 불러! 이 새끼 좀 내쫓으라ㄱ­ 커, 커허억!”

푸슉!

중년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의자에는 최세린이 단검 끝 둥그런 부분에 손가락을 넣고 휭휭 돌리고 있었다.

“다 죽일까?”

“아니.”

흐음?

최세린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날 훑어보더니 허벅지에 있는 가루독을 남성의 목덜미에 처발랐다. 피는 멎는다. 남자는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쿠웅­!

발을 굴렀다. 그곳으로부터 검은 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가 바닥을 물들였다.

바닥에 나뒹굴던 직원이 캑캑거리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고 문틈으로 구경하던 다른 손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쿵 엎어지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내 몸은 검은 마기에 휩싸여 있었다.

깨진 양주병에 비친 내 모습은 흡사 메이블과 비슷한 형상이지 않을까.

“{ ανχνευση ­ 탐지 }”

검은 마나는 푸른 마나보다 더 섬세하고 강력한 마나다. 자연에서 빌리는 게 아닌 생명체에게서 뺏는 마나. 그 마나가 지닌 위력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탐지 영역을 넓히자 이곳 지하에서 팔다리가 묶인 채 얌전히 있는 다크엘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눈앞의 다크엘프와 다른 방에 있는 다크엘프까지 합하면 10명 정도.

“{ τ ­ 출력 강화 }”

그 탐지 마법에 문자를 하나 더 추가해 범위를 더욱 넓혔다.

이 가게를 넘어서 이 수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자... 느껴졌다.

이를 빠득 물며 범위를 더 넓혔다.

더 많은 게 느껴졌다.

숨이 헐떡거릴 정도로 범위를 더 넓혔다. 수도를 넘어서 이 대륙의 2할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여태껏 몰랐다고?”

검은 마나를 사용할 일이 손에 꼽기 때문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기분이 나쁜 건 다른 문제였다.

“하, 하하하... 진짜 가관이야. 그렇지 않아?”

검은 마나를 사용하니 몬스터를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 처한 상황. 심지어 몸상태가 어떤지도 알 수 있다.

그게 날 더욱 절망에 밀어넣었다.

인간이 몬스터를 사육할 줄이야!

식량으로 기르는 슬라임과 켄타우로스.

성노예로 처리되는 뱀파이어, 다크엘프, 하피.

마루타로 사용되는 고블린과 오우거.

이게 인간의 본성일까?

그들은 패잔병을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다뤘다.

“내가 원한 평화는 이따위 게 아니었어!!”

나는 울부짖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최세린은 다크엘프의 포박을 풀고 커튼을 쫙 찢어 간이 옷을 만들어 건넸다. 그 다크엘프는 허둥지둥 내 옆을 지나갔다. 그때 그녀는 매인 목소리로 겨우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지금 감사라고? 내가 마왕군을 무너트린 마법 용사라는 걸 알고도 그런 소리를 뱉을 수 있을까?

마왕군이 괴멸한 후 몬스터와 마족 등의 마왕군 잔당의 삶이 흑빛이라는 것쯤은 예상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그 정도일 줄만 알았다.

내 생각보다 그들이 당해왔던, 당하고 있는 처우는 끔찍했다.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이유는 명쾌했다.

관심을 안 뒀으니까!

내게 마왕군 잔당을 책임질 의무는 없었다.

마계로 돌아가건 인적 없는 곳에서 저들끼리 살아가건 인간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지배 하에 벌레만도 못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마왕군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몬스터는 새끼 양에 불과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심장박동이 밖에 들릴까 우려될 정도로 강하게 심장이 요동친다.

인간을 습격했던 마왕군, 그 마왕군을 멋대로 부리는 인간.

복수라는 명복?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마왕군은 그저 법에 구애받지도 않는 실험대이자 성욕 분출기이자 노예였다. 차라리 그냥 죽였더라면 나는 분노치 않았다.

그어어­

방금도 오우거가 약물에 범벅이 돼 몸부림치다가 쿵 하고 쓰러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극이다!

마왕군은 다크엘프를 비롯한 몬스터에게 선이었을까? 그럼 그들에게 우리는 악인가? 그 입장 차이가 마왕군이 인간과 대적하게 됐던 원인이었을까? 마왕군의 존재가 정녕 평화를 해치는 거였을까?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줬으니 제발 전쟁 따위 벌이지 말고 살라고? 누구 마음대로 살기 좋은 세상인가!

마왕군을 물리쳤더니 몬스터가 인간에게 고통 받으며 살았다. 이건 내가 원한 평화가 아니었다. 살기 좋은 세상 따위가 아니었다.

한참 소리치고 나니 목이 말랐다. 테이블에 있는 양주를 벌컥 들이켰다.

확 알싸한 향이 물씬 풍긴다. 목이 뜨겁다. 그러나 조금은 진정됐다.

“지금 몬스터를 해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확신이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중재자가 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얘기다.

이건 동화가 아니다. 영원한 평화 따위는 없다.

몬스터의 해방도 마찬가지다. 내가 전대륙을 통괄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겐 그럴 능력도, 권력도 없다.

하지만 내겐 악마인 암두시아스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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