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꼭두각시
* * *
마법사의 기본 소양 중 하나는 그림이다.
마법사는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정확히는 선을 예쁘게 잘 그어야 한다.
마법진은 원, 그리고 마법 문자, 여러 개의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를 예쁘게 그릴수록 마법진의 전달력은 높아진다. 이건 우습지만 미술과 관련한 것이다.
때문에 스승 밑에서 처음 배운 건 선 그리는 법이었다. 이게 기본기라고 귀에 박히도록 들었고, 조금 삐뚤게 그릴 때마다 딱밤을 처맞았으니 일취월장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우선은 문신. 그리고 마석 상인이었던 이렇게 생긴 노파.”
내 손에 들린 종이에는 노파의 얼굴이 있었다.
마법진처럼 공들일 필요도 없는 초상화 쯤이야 가볍게 그릴 수 있다.
비록 10분 만에 그린 그림이지만, 노파의 특징을 잘 살린 괜찮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에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음... 아는 바가 없는데...”
“죽여달라는 말로 해석하면 되지?”
이재홍은 살의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는 그를 만류하며 조금 더 지켜봤다. 플라티넘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이재홍이 다가오길 거부하고 있었다.
“어이고! 잠시만, 잠시만! 조금만 기다려보시오. 내가 모른다고 다른 이가 모른다는 건 아니니까!”
그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중궁전 뒤편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멀끔한 양복이 무색하게 머리가 땀으로 범벅이었다.
저게 누구일까 고민하기도 전에 그는 입을 뗐다.
“허, 허억... 저는 마도구 시장을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이재홍은 플라티넘을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에게 뒤돌아 노파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는 숨을 겨우 고르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내심이 닳고 있을 때쯤 그는 갸웃하던 고개를 정갈히 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삿대질로 그림을 가리켰다.
“아! 몇 주 전인가 연합에서 말도 없이 탈퇴한 사람! 기억납니다, 기억나요.”
나는 무표정으로 턱짓했다. 알아서 더 얘기하라는 거였다.
“마석을 취급하던 노인 맞죠? 그... 하지만 첫 만남 때부터 워낙 자기 얘기는 안 하던 사람이라 저도 자세한 걸 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름이랑 나이 정도야 알지만, 그녀의 과거나 연합을 탈퇴한 후의 행적은 아는 바가 없어서...”
거짓일까 그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에 언약을 맺는 것보다는 조금 저등한 마법, 진위여부라고 내 멋대로 이름 붙인 마법을 발동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마법진을 그의 심장에 둘러진다.
거짓을 고하면 이 마법진은 다른 색으로 바뀐다. 거짓말 탐지기 같은 것이다.
물론 성능은 싸구려 기계랑은 비교 자체가 실례지만.
그 마법진을 보자 남성의 목젖이 꿀렁거리며 움직였다.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긴장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이름과 나이뿐입니다. 다른 마도구 상인을 추궁해도 저랑 아는 바가 비슷할 겁니다... 아, 단 한 명은 빼고요.”
“그게 누구죠?”
“그, 그... 1시간 전에 죽었던 키메라 상인이던 남성... 그가 그나마 이 그림 속 노인이랑 얘기를 나눴던 걸로 기억하는데... 죽어버려서...”
흐려지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심장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법진의 색깔은 그대로였다. 이게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더 착잡해질 뿐이었다.
“...그럼 S자 모양의 문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있나요?”
“S자 모양 문신? 아, 키메라 상인의 손이었나 거기에 있던 것 말입니까?”
“맞아요, 아십니까?”
그는 난감했는지 고개를 떨궜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그 문신도 키메라 상인 말고는 알아낼 방도가...”
“때려치자! 다 죽어도 불만은 없지?”
“좀 진정해.”
“좀 진정해? 너야말로 좀 흥분해 시발, 너는 이 개새끼들한테 열도 안 받냐?”
이재홍의 모 아니면 도 화법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었다.
플라금에서는 우리가 찾던 정보에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일하게 모든 정보를 쥐고 있던 키메라 상인을 살해함으로 우리를 방해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흐느끼던 디안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걸었던 범인이 베일에 가려졌고 내게서 점차 멀어진다.
그 상황을 만든 건 양과 음, 플라티넘이었다.
나는 그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문신? S자 문신...? 분명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잠시만 기억을 더듬어 보겠소. 잠시만...”
그에 플라티넘이 반응했다. 그의 주장에 양이 힘을 싣는다.
“라스타(ρτσα)의 국왕에게 있던 문신입니다.”
“아! 맞다! 맞아! 플라금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있는 영토 라스타! 그곳의 왕이 목덜미에 이러한 문신을 지니고 있었지!”
“라스타? 그곳의 국왕에게 문신이 있었다고?”
“분명하오! 특이한 부위에 있던 문신이어서 기억에 남소!”
“...거짓이면 무사할 생각은”
“알고 있소! 죽여도 원망조차 하지 않겠소. 거래는 정당해야하니 나는 내가 아는 바를 말했을 뿐이오. 이것으로 내 목숨값은 지불한 거 맞소?”
“개소리야. 마법 용사는 호구 새끼라서 당신을 살려두겠지만, 나는 만족 못 했어. 우리한테 쓸모있는 정보를 하나 더 토해내.”
이재홍의 거침없는 말투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 망나니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다. 속으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어... 음... 용사에게 도움이 될 정보라...”
플라티넘은 고민에 빠지더니 손가락을 탁 튕기며 한 마디 덧붙였다.
“검술 용사! 그가 라스타에서 목격됐다는 정보를 접했었소!”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우리에게 들릴락 말락 말끝이 흐렸다.
“몇 달 전 얘기라 불확실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정보 중에는 가장 유용할 것이오. 그대들은 경제의 흐름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을 터이니.”
“이번에는 조금 쓸모 있었네. 칭찬할게.”
“...심경이 복잡하군. 이것으로 됐소?”
“아니?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재홍 검지와 엄지로 원을 그리곤 남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 손을 아래로 향하곤 건들건들 휘둘렀다.
*
이재홍은 어깨에 뽀송뽀송한 이불을 등에 진 채 물었다.
“원격 시야는?”
“아무 일도 없어. 암두시아스는 자고 있네.”
모순이라는 건 알지만 화면에 비친 악마는 천사 같은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너 제자인가 걔는.”
“아직 자고 있어. 세린이는 독서 중이고.”
별일은 없었구나.
안심하고 원격 시야에서 고개를 돌리니 내 양 팔목에 걸린 유아용 옷이 보였다.
이미 손목에는 자국이 새겨졌다. 수가 많다 보니 제법 무거웠다.
이 옷과 이재홍의 이불은 궁궐에서 나선 후에 구매한 것들이다.
‘같잖은 일에 어울려줬고, 돈도 벌어줬으니 따라와 새끼야.’라는 서두로 시작된 쇼핑이었다.
이불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옷은 타당한 소비였다.
지금 원격 시야에 보이는 암두시아스의 옷은 과거에서 데려왔을 때 옷 그대로였다.
옷이 더럽거나 냄새나지 않았던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주기적으로 세탁한 것 같긴 하지만, 한창때의 아이니 여벌 옷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20벌을 넘게 사야 했나 의문이 들긴 했다.
“모두 레이스가 치렁치렁하네. 공주님처럼 말이야. 마기 넘치는 혼돈과 같은 존재에게 주기에는 너무 깜찍한 옷 아니야?”
그 수많은 옷 중 이재홍이 고른 옷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는 혀를 차곤 담담하게 대답했다.
“걔가 악마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 너 말대로 착하더라.”
“너도... 참 많이 변했다. 그런 말이 너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네가 암두시아스 아빠 노릇을 할 줄이야.”
“이 새끼는 좀만 상냥하게 말하면 또 기어오르네. 윤상아. 부탁이니까 깝치지 마 제발.”
말 자체는 살벌했지만, 그 어투는 공격적이지 않았다.
물론 비교적인 얘기지만 용사 시절 광견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뜯던 이재홍은 희미해졌다.
‘...옛생각나네.’
나와 이재홍은 나이도 동갑인지라 다툼이 잦았다.
비교적 참는 쪽은 나였지만, 나도 냄비 끓듯 분노가 확 차오를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놈의 주술과 내 마법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시험하듯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었다.
김철수 형이 사정사정하며 말리기 전까지 그 싸움은 언제나 계속됐었다.
내 알기로 지도가 바뀔 정도의 싸움이 5번 정도, 서로 기술 제외한 단순한 주먹다짐이 10번 남짓이다.
3년간 나도 발화점이 더 높아졌지만, 이재홍도 이제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았기에 이제는 제법 놈과 말 섞는 재미가 있었다.
고작 하루이틀 동안 분석하여 나온 결론이지만, 놈이 많이 무뎌졌다는 건 최세린도 공감할 내용이었다.
‘...비이린이 휴양지로 좋긴 좋은가보다. 나도 나중에 가서 살아볼까... 아니, 안 되지.’
문득 요정족 공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넬피. 그녀에 대해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생각을 잊고자 고개를 젓고 다른 생각을 무작정 떠올리려 해보지만, 의식이라는 건 내 마음대로 조종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심지어 이재홍이 아빠라는 단어에 발끈해 내 역린을 쑤셨다.
“넬피가 암두시아스 딸처럼 예뻐하는 거 알고 있냐? 네가 아빠 역할이라고 노래 부르고 다녀. 암두시아스 아빠는 내가 아니라 너야.”
“...야, 넬피 얘기 하지 마.”
“걔 살 많이 빠졌어. 지금은 좀... 귀엽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보러 갈래?”
“그만하라고 개새끼야!”
소리치니 행인의 이목이 모두 내게로 쏠렸고, 그에 이재홍은 껄껄 웃었다.
그는 웃겨 죽겠다는 듯 돌돌 말린 이불을 팡팡 쳤고, 나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알로켄. 메이블의 부관인 눈 붉은 녀석.
용사 시절 그 녀석의 마안에 당해 마기에 온몸이 얼룩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마기를 정화하고자 비이린에 찾아갔고, 그때 요정족 공주인 넬피를 처음 만났다.
“...어머.”
돌이켜보면 넬피는 그때 내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얼굴에는 마기가 얼룩져 손 쓰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 내 심장에 그녀는 작은 손을 얹었고, 마기를 쭉 빨아내 세계수 밖으로 던졌다.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은인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그녀에게 치료의 대가를 빌미로 당했던 것들은......
“우욱!”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흐느끼며 바닥을 기어 다니자 숙소에서 최세린이 내 기척을 눈치채곤 마중 나왔다.
“...이 오빠 왜 이래요?”
“글쎄, 상사병인가.”
“아, 공주님 얘기했구나... 정 괴로우면 보러 갈래? 공주님은 반겨 주실걸?”
“하지 말라니까?!”
이재홍과 최세린의 머리에 붉은 뿔이라도 달린 것 같다는 착각을 받았다.
*
“급한 불은 껐군.”
텅 빈 중궁전에서 플라티넘이 읊조리자 양과 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들 수건돌리기 놀이와 다름없는 꼴이지만... 뭐, 이제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테지. 그래도 예상했던 시기보다 앞당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허리에 감긴 복대를 천천히 풀었다.
“당최 서대륙 놈들은 뭐 하고 있는 건지. 이것도 그분의 뜻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서도 기분이 언짢은 건 별수 없군.”
그는 허리를 펴곤 기지개를 켰다.
팔을 뒤로 당기며 몸을 풀곤 바비룬 필라이트에게 밟혔던 등을 어루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어. 이걸 보였더라면 나도 죽었을 테니까.”
플라티넘의 등에는 거대한 뱀 모양 문신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