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꼭두각시
* * *
철퍽
내 눈앞에 짙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피가 튀어 내 피부에 붉은 점을 찍는다. 순간 분노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쾅!
“크윽”
냉기를 머금은 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사내놈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바닥이 으깨진다. 얼음이 요란하게 튀겼다. 검에 묻은 피도 사방으로 번졌고, 바닥은 이미 키메라 상인의 피로 흥건했다.
그의 목은 미끄럼틀 타듯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바닥에 퉁 떨어졌다.
머리는 바닥에 데구르르 구른다. 구른 자리에 굵고 붉은 선이 그어진다.
내 냉기에 피마저도 얼어붙기 시작한다. 나는 더욱 강하게 냉기를 터트리며 사내놈의 온몸을 얼렸다.
“양! 괜찮은가?”
플라티넘이 흥분하며 소리쳤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앞의 놈에게 집중했다. 놈이 사용한 건 분명히 김철수의 검술이었다.
방금 플라티넘이 양이라고 사내를 칭했다.
이놈이 플라금의 두 사냥개 중 하나이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사냥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으로 나를 담고 있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마법 용사 악쿤 토든님.”
“이 사내를 어째서 죽인 거지?!”
“이 자가 용사님을 격분하게 만든 것 아닙니까? 그건 용사님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뜻, 죽어 마땅합니다.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도 없이 제가 처리했습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리라 생각하는데요.”
“생각해줘서 빌어먹게 고마워. 근데 마침 내가 너 때문에 격분했거든? 겸허히 받아들이길 바랄게.”
“좋을 대로 하시죠.”
치이이잉!
왼손은 놈의 멱살을 붙잡은 채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에 오른손에 5서클의 마법진을 휘감았다.
그 마법진은 전기톱처럼 맹렬하게 회전한다. 그 목표는 바닥에서 허탈하게 웃고 있는 양이었다.
{ ικρωμα 단두대 }
짙푸른 마법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각진 칼날,
그것을 양의 목을 향해 떨궜다. 그때 플라티넘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아이가 검을 뽑은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가가각!
사라졌던 놈은 어느새 내 코앞에 있었다.
이 아이가 음이리라.
놈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검을 수직으로 세워 내 단두대를 전력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힘에 부친다는 표현이라는 걸 알아챘다.
“너도 죽고 싶어 안달났구나?”
“끄으으...”
대답한 여력도 없는지 양손을 부들거리고 있었다.
플라티넘이 허허 웃으며 손뼉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대단해! 역시 마법 용사! 그대의 강함에 경의를 표하옥 커, 커허억!”
[대단해! 마왕군이 설칠 때보다 지금이 더 기분이 더럽잖아? 이것도 재주야. 그렇지?]
이재홍의 앞발이 플라티넘의 등짝을 짓밟고 있었다.
놈은 흐느끼며 거구의 호랑이의 무게를 그대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양과 음의 눈빛이 흔들린다. 내 단두대가 사라지면 곧장 이재홍에게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이었다.
“네가 선택해.”
나는 음에게 이지선다를 던졌다.
양을 포기할 것인가, 플라티넘을 포기할 것인가.
무얼 고르든 상관없었다. 두 선택지의 종착지는 모두 붉은색이다.
이미 피를 봤다. 용사라는 걸 밝혔음에도 놈들은 우리 계획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양의 목과 몸을 분리하려는 의도의 단두대에 더 힘을 실었다.
그에 맞춰 이재홍도 더욱 강하게 플라티넘을 짓누른다. 지하 매장은 초토화였다.
“......”
음은 선택을 마쳤다.
놈의 온몸이 은은한 푸른 빛을 띤다. 그 빛은 놈이 쥐고 있는 글라디우스에 집중되고 있었다.
오러였다. 마법사에게 마나가 필요하듯 검을 다루는 자는 필수적으로 다뤄야 하는 매체.
[ 다르칸 류 공격술 제 1식 퇴근길 ]
카가가각!
놈의 검에 맺힌 오러가 형태를 잡아가며 몸집을 몇 곱절 부풀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내 단두대를 밀어낸다. 썩어도 준치라는 건지, 김철수의 검술을 배운 음은 내 단두대를 겨우 깨부술 수 있었다.
[ 다르칸 류 방어술 제 1식 갑옷 ]
콰자작!
양도 단두대가 박살나자 온몸에 주황빛 오러를 둘러 내 냉기와 얼음을 깨부쉈다.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된 두 아이는 즉시 이재홍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굳이 방해하지도 않았다. 다음 장면이 자연스럽게 예상된다.
[이 씨발 짝퉁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앞발을 휘둘러 양의 몸통을 후려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양의 몸을 긁는다.
턱을 내밀어 음을 검째로 과자 씹듯 깨물곤 고개를 이리저리 휘두르더니 벽면에 던졌다.
콰아앙!
요란한 소리도 잠시, 양과 음은 각자 매장 저편에 처박혔다.
그 동선에 따라 여러 가게가 엉망이 되었다. 진열장은 산산이 박살 났고, 바닥에는 잡다한 문서와 마도구, 진열장 안에 있던 키메라가 기어 다니며 더욱 난잡해졌다.
“아하하하! 상대도 안 되는군!!”
미친 걸까? 그걸 보며 플라티넘은 호쾌하게 웃었다.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생각이라면 명확히 잘못된 선택지였다.
플라티넘은 다른 상인들처럼 우리 눈치를 보며 벌벌 떨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리 분노를 잠재울 마땅한 대가를 내놓을 수 없다면 놈은 이재홍이나 내게 죽는다.
그 대가는 당연히 돈, 명예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가 목마른 건 문신에 관한 정보였다.
키메라 상인의 목이 떨어진 순간부터 그 정보는 오리무중이다.
“항복! 살려만 주시게! 내겐 아직 할 일이 남았소!”
상황 파악이 느린 건지 플라티넘은 아직도 유쾌한 어투로 지껄였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턱을 잡아당겨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그때 주춤 물러난 건 나였다.
‘미친, 진짜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곧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허나 그의 눈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
그는 베시시 웃었고 나는 조롱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자길 죽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는 걸까, 그렇다기엔 양과 음은 피칠갑이 된 채 벽에 처박혀 있다.
놈에게는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용사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건 맞지만, 우리가 살육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마왕군을 의무적으로 학살해왔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쯤 무덤덤해진 지 오래다.
어째서? 어째서 죽음 앞에서도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거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누군가 늪에 날 구겨넣는 것처럼 혼란은 내 몸을 뒤덮었다.
혼란스러운 내면과는 다르게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감정이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 태도는 뭘까.
이 의중 모를 사내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남성을 죽인 건 사과하겠소! 이토록 분노할 줄은 몰랐지 뭐람!”
“...당신, 곧장 죽을 수도 있어. 웃음이 나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고작 죽음 앞에서 움츠러드는 작은 그릇이어서야 되겠소? 사실 말은 이렇지만 심장은 요동치고 있소. 나도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는 작은 사람이라는 반증이지. 으하하!”
분명한 거짓이다.
심장이 요동쳐? 차라리 플라티넘은 심장이 안 뛰는 인형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직 삶에 미련이 있소! 맨입으로 살려달라곤 하지 않을 테니 거래 하나 하는 건 어떻소?”
태도와는 다르게 내뱉은 대사는 비굴한 것이었다.
자기 입장도 감정적으로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몰라도 이성적으로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지하 1층의 계단, 그리고 이 마도구 시장을 뒤덮은 플라금 병사의 마나가 느껴진다.
다만 그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덤벼든들 용사를 상대로 승기를 잡기는 요원한 일.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플라티넘의 지시이리라 예상했다. 그의 항복 선언은 진심이었다.
플라티넘은 거래를 요청했다.
그 거래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정하기엔 두고 볼 일이었다.
“우리에게 뭘 제공할 수 있는지 말해라.”
“대화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뺏긴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괜히 두근거리는구만!”
“지금 내 말 명심해. 웃음기 거둬. 질문에만 대답해. 뭘 제공할 수 있지?”
“돈 같은 세속적인 걸 취급하지는 않을 테지 않소? 뭘 원하는지 알려줘야 명백히 답할 수 있겠는데.”
“정보.”
“그쯤이야, 내 아는 한에서는 대답할 수 있지. 그러니 이것 좀 풀어주겠소? 나이가 나이인지라 허리가 쑤신단 말이외다.”
흥, 이재홍은 나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앞발을 거뒀다.
그리곤 다시 인간 형태로 되돌아왔다. 계단에서 플라금의 병사들이 쏟아진다.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플라티넘과 양, 음을 부축하며 들것에 실었다.
“자리를 좀 옮기고 싶소.”
“개수작 부리면 오늘 플라금은 지도에서 지워질 거다.”
“하하! 내가 용사를 상대로 배짱을 부릴 리가 있겠소? 나를 너무 과평가하는구려. 한낱 인간일 뿐인데.”
방금까지 실컷 배짱부린 사내가 뱉을 말은 아니었다.
표정이 찡그러지는 걸 겨우 참으며 플라금의 병사를 따라 그의 궁전으로 따라갔다.
*
우리는 화려한 중궁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치라기엔 땅덩어리가 넓고 재화도 많은 국가이니.’
천장은 목이 아플 정도로 높고, 샹들리에는 오색으로 빛나며 굉장히 찬란하지만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단 높은 건 천장만이 아니었다. 100명 정도 생활하기에도 넉넉할 공간.
그러나 이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그렇기에 더 넓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데미투 영주의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했었다. 그에 상반되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에 병사 한 명을 붙잡아 물어보자 플라티넘은 여백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즐긴다며 말했다.
‘독특한 놈이야.’
한 시간 전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던 건 분명히 우리였다.
주도권을 잡고 있었음에도 압도된 기분을 느낀 건 무슨 장난인지, 나는 플라티넘의 기세에 위축된 상태라는 걸 힘겹게 인정할 수 있었다.
이재홍은 그런 눈치 따위 안 보는 놈이기에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궁궐 중심부에서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앞발톱으로 긁는 등 호기심 넘치는 고양이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고양이과 동물로 변신한 부작용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그와 달리 점잖게 앉아 있었다.
플라티넘과의 대화를 기다리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기에 무슨 행동을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거슬리는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플라티넘과 양, 음. 그리고 그들을 부축하는 몇몇 장정들이 보였다.
“흐아, 이제 좀 살겠군! 주술 용사의 힘이 어찌나 센지, 허리가 종일 쑤시지 뭐요? 이런 자세로 대화하는 건 용사에 대한 예가 아니리라 자각은 하지만, 내가 지금 부상 당한 몸인지라 이해해주길 바라오.”
플라티넘의 주위에는 4명의 장정이 붙어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찬란한 금빛의 혁대가 있었고, 바퀴 달린 의자에 몸을 뉘고 있었다.
양과 음은 온몸을 붕대로 감은 채였다. 양은 이재홍의 앞발에 휘말려 오른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자꾸만 붉게 물드는 걸 보면 눈두덩이가 찢어졌거나 애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음은 걷지도 못했다. 허리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었으나 오러로 겨우 버텨낸 게 아닐까.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다. 오랜만의 전투에 이재홍은 저도 모르게 힘을 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살려준 대가는 제공해야지! 원하는 정보를 말해보시오.”
플라티넘은 말했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구기지 않게 신경 쓰던 종이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우선은 문신. 그리고 마석 상인이었던 이렇게 생긴 노파.”
내 손에 들린 종이에는 노파의 얼굴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