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꼭두각시
* * *
“...야.”
그때 앞에서 걷던 이재홍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윽.”
그에 몸을 박았고 불쾌감을 느끼며 그를 밀쳤는데,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운을 뗐다.
어투는 사뭇 진지했다. 평소의 건들거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용사 시절이 회상되는 듯한 진중한 말투. 그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일면이다.
“너 아들러 프리브룩스 방 감시하던 그 마법 있지. 그거 너 숙소에도 해놔. 정확히는 디안이라는 너 제자만 비출 수 있게.”
“최세린이 돌보고 있잖아? 마나 기척 느끼는 거로도 충분해.”
“아니, 안 충분해. 사건이라는 건 방심했을 때 터지는 거야. 너 새끼가 나랑 철수 형한테 지겹도록 내뱉은 말인데 까먹었냐?”
곰곰히 생각해보니 용사 시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지겹다고 느꼈을 줄은 몰랐다.
“하라면 해. 정 안 내키면 너 말투 따라 해줄까?. ‘윤상아, 솔직한 말로 지금 내가 제안한 내용에 아직 확신은 없어. 추측일 뿐이니 멋대로 말하기는 꺼려지는걸. 그래도 내 말을 따랐으면 좋겠다. 사건은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법이니까.’”
“개새끼야, 오랜만에 한 판 붙을래?”
“푸하하!! 너 말투 따라 한 건 농담이지만, 제안 자체는 진심이야. 설명해주기엔 애매하다는 것도 진심이니까 지팡이에서 손 떼.”
이재홍은 고개를 돌리곤 다시 시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입가는 나와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빙긋 올라가 있었다가 지금은 다시 밑을 향했다.
저 표정이 기분이 언짢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었다는 건 머잖아 기억할 수 있었다.
뭘 걱정하는 걸까?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래도 이런 진지한 어투의 이재홍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손에 꼽는다.
나는 의심없이 원격 시야 마법을 가동했다.
그러자 보이는 건 텁텁했는지 오렌지 주스를 벌컥 들이켜는 암두시아스, 디안을 돌보는 최세린이었다.
“......”
최세린은 흘깃 원격 시야가 가동된 방향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간호에 집중했다.
눈치챈 걸까? 눈치채더라도 상관은 없겠지만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 노파가 있는 곳은 어딘데.”
“저기 마도구 시장 지하 1층이었는데, 저번에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없어진 후였어.”
“그럼 어떻게 찾으려고?”
“찾으려면 뭐 그리 어려울까.”
말하며 두 명의 가드 앞에 섰다.
얼굴이 바뀐 걸 보아 저번에 있던 가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와 바비룬은 마도구 시장으로 들어갔다.
다시 어두컴컴한 지하 1층,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예전과 전혀 달라질 게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이라 해봤자 한 달 전이지만 말이다.
“여기였었어.”
“이미 자리 뺐네.”
노파는 더는 보이지 않는다.
돈을 떼먹은 건 아니다. 차원석은 배달을 통해 최상급으로 5개를 수령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일까. 의구심은 후련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내 추측대로 디안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걸었던 게 그 노파라면 차원석을 굳이 건넬 이유도 없잖은가.
“오, 저번에 왔던 손님 같은데?”
그때 옆에 우락부락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저번의 키메라 상인이었다. 그는 우릴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디안이 언급한 문신이 떠오른다.
뱀 문신. 그 문신은 이 사내의 오른손등에 있었다.
노파 다음으로 찾아갈 사람은 이 사람이었는데, 마침 제 발로 와줬다.
나는 그가 멀뚱멀뚱 우리를 쳐다볼 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마석 판매하던 노파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 할머니 말이요? 글쎄, 같이 장사해온 정이 있는데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가버려서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잘...”
“알만한 사람은요?”
“애초에 우리 상인 연합에도 출석하지 않던 노인네라 친하게 지낸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아마 헛수고일 거요. 근데 이 노파는 왜? 돈이라도 떼먹었나?”
차라리 돈을 떼먹는 게 낫지. 정신 계열 마법 보다야 말이야.
혼자서 생각을 삼키며 사내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더 찾아보면 되죠. 근데... 혹시 이 오른손에 문신 있지 않았나요?”
“문신? 갑자기 웬 문신?”
“제가 문신에 관심이 많은데 S자 문신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오른손등에 있었던 거요.”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해 지켜볼 심산이었다.
디안이 봤던 문신, 그리고 그 문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고자 정신 계열 마법을 걸었다.
이 사내가 아무런 연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단지 유행하는 문신이라기에는 아들러 프리브룩스가 그 문신을 지니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골골대며 죽어가는 늙은이가 팔꿈치에 문신을 박을 생각이 들기나 할까?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 문신이 왜?”
사내의 어투가 조금 딱딱하게 바뀌었다.
그걸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이재홍. 그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알던 사람도 이 문신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냥 유행인가 싶기도 해서요.”
“관찰력도 좋네. 문신에 관심 있나 봐? 그보다 키메라. 키메라는 관심 없나?”
“키메라보단 지금 그 문신에 더욱 관심이 쏠리네요.”
병적으로 나는 문신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에 불쾌하다고 이 사내가 뒤돌면 나야 더 몰아붙일 껀덕지가 없으니 언행을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디서 새길 수 있는 거죠? 이 뱀 모양의 문신이요.”
“그건...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문신을 자세히 보여줄 수 있습니까?”
“키메라 구경은 안 할 거요?”
사내가 손을 휘휘 젓더니 언짢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더 추궁할 방법은 없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쓰러트려서 기억을 강제로 읽어내고 싶다.
그렇다면 저 뱀 모양 문신에 관련한 정보를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뱀?”
문득 뱀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노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내게 뱉었던 말이 기억났다.
“뱀을 조심하라고... 뱀.”
“뭐요?”
“당신, 노파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까?”
“모른다고 방금도 말했잖아!”
“그럼 이 마도구 시장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죠.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어요.”
“사장님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허튼소리만 할 거면 집어 치쇼.”
씩씩거리더니 뒤로 홱 돌아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재홍은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푸쉬이이...
그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온다.
그 입김은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판사판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 형변(??) 호!(虎) ˚
크르렁!
이재홍의 온몸은 갈색 털에 뒤덮였고, 그 중간중간에는 검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늠름하고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압도할 호랑이였다.
그가 울부짖자 지하 1층에 그의 포효가 울렸고, 키메라 상인을 비롯한 이곳 1층의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목을 집중했다.
[나는 주술 용사 바비룬 필라이트다!]
그리곤 폭탄선언을 뱉었다.
공기가 달라진다. 음험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멤돌았고, 담력이 약한 자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만치 이재홍의 이름이 가지는 파급력은 엄청났다.
더 꾸물거리기엔 답답하다는 뜻이리라. 이재홍답다 싶은 일 처리였다.
[뱀 문신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밝혀라! 꼬리 말고 도망가면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 찢어죽여줄 테니 도망칠 생각일랑 포기해라!]
“바, 바비룬 필라이트...”
사내는 뒷걸음질 치다가 진열장에 몸을 박았고, 위에 쌓여있던 잡동사니가 우르르 무너졌다.
이재홍은 그에게 터벅터벅 다가가 앞발톱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를 보며 난 탄식을 뱉었다.
“난 이제 모르겠다.”
[네가 시발아, 답답하게 구니까 내가 나서는 거잖아. 그냥 한 명 족쳐서 기억 읽으면 끝인 걸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건데?]
내게도 정 필요하다면 용사라는 신분을 밝힐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저돌적으로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눈치가 있다면 이재홍 옆에 있는 내가 악쿤 토든이라는 것쯤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재홍이 형태 변환을 한 순간부터 나는 사방에 있는 상인들에게 마법진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마법진은 무사히 도망칠 생각은 접어두라는 뜻이었다.
그 마법진은 모두 천천히 회전한다. 그로 다른 상인들을 잡아두고 나는 키메라 상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히, 히익...”
그는 이재홍의 앞발에 짓눌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내가 다가가자 이재홍은 발을 거뒀다. 그곳에 내 손이 대신하여 올라간다.
그에게만은 공격 용도의 마법진을 겨누지 않았다.
대신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마법진을 두를 생각이다.
“험하게 다뤄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죽지도 않을 거고요.”
데미투의 영주에게 사용했던 자주색 마법진, 기억을 읽는 성질의 것이다.
그 마법진이 서서히 다가간다. 머잖아 사내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때...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목소리 한 줄기, 이재홍과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스 등장하셨네.]
이재홍이 혀를 찼다.
그가 가리킨 남성 옆에는 디안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아이 두 명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마법 용사! 주술 용사!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이오! 난 이 이프카리스토와 플라금을 통치하는 왕 플라티넘이오!”
김철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간 죽일 놈.
그가 과장스럽게 손을 펼쳐 우리를 반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하곤 뒷머리를 긁으며 우리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문신? 뱀? 의미불명의 소리를 하던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 알려줄 수 있겠소?”
[그쪽이 알 일 없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이 플라금을 통치하는 입장이니 작든 크든 모든 사건에 귀 기울여야지 않겠소? 그래야 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터이니.”
“그건 잘 모르겠고, 잠시만 빠져줬으면 좋겠는데요. 그쪽이 왕이든 뭐든.”
건방진 태도? 그런 것 자체가 없다.
왕이 등장했다는 건 우리에게 전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용사다.
세계를 구해낸 영웅이다. 그 누구라도 우리의 행동에 토를 달 수 없다.
물론 왕이나 영주. 이런 지배층 놈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 살기 편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배려였다. 고귀한 혈통? 존중받아 마땅한 위인?
이따위 건 하나도 모르겠고 심지어 플라티넘은 왕족도 아니다.
왕족이라 한들, 우리가 그에게 예를 갖춰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는 얘기였다.
서로 간의 배려라는 두루뭉술한 것 말고는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단 말이다.
더군다나 꼴도 보기 싫은 놈이다. 이곳에 최세린을 데려오지 않은 건 잘된 일이었다.
저 자식을 마주하면, 그녀는 바로 눈 뒤집혀가지고 단검 들고 달려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플라티넘이 무슨 말을 뱉든 우리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었다.
이 사내의 기억은 어떠한 방해공작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진행할 생각이다.
크르르륵...
이재홍은 플라티넘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고, 나는 사내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려 ‘기억 더듬기’를 속행했다.
“...폐하, 제가 움직여도 될까요?”
그때 플라티넘의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린다.
척 달라붙어 있던 두 명의 남자아이 중 하나였다.
“좋을 대로 하게. 다만 덤벼들지는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놈은 허리춤에 있는 칼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속삭이듯 말을 뱉었다.
[ 다르칸 류 발도술 제 1식 출근길 ]
철퍽
내 눈앞에 짙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