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꼭두각시
* * *
“...하아, 아침부터 이게 뭔 지랄이야.”
바비룬 필라이트의 침대, 정확히는 그의 몸 위에 암두시아스가 새근새근 숨을 뱉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질렸다는 듯 썩은 표정으로 그녀를 잡아 옆으로 치웠다. 그때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에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정령들과 요정이 창문을 통해 바비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
“난 당연히 내쫓을 줄 알았는데......”
“정수 내놔! 내가 내기에서 이겼어!”
그곳에서는 저들끼리 내기를 한듯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에 바비룬은 적당한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마침 손잡이 부분이 깨진 흙으로 빚은 컵 하나가 보였다.
퍼석!
컵은 정령과 요정들에게 날아가곤 다시 흙이 되었다.
직접 맞진 않고, 유리창 위에 맞았기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기분이 상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바비룬은 말했다.
“에라이, 시발놈들아. 얘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바비룬 폭력적!”
“네놈들은 실험적이야. 얼만큼 깝쳐야 나한테 안 얻어터지는지 매일 같이 도전하잖아.”
“말투도 폭력적!”
“언제는 재밌다고 낄낄거리더니.”
끄으응
요정, 정령 연합과 한창 열을 올리자 있자 들린 신음 비스름한 것이었다.
그곳에는 이불에 얼굴까지 덮인 채 몸부림치는 암두시아스가 있었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이불이지.’
그 슬랩스틱을 구경하며 창가에 등을 기대 팔짱을 꼈다.
식사 해결은 저걸 구경한 후로 할까, 암두시아스가 언제 이불을 탈출할 수 있을까가 지금은 제일 큰 관심사였다.
“으, 으으......!”
찌직 찌지직
그때 불길한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 하나 솟아올랐다.
날카로운 암두시아스의 뿔이었다.
“야, 야! 그거 시발 이불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흐아! 드디어 탈출했다!”
거대한 뿔로 시작해 머리까지 다 빠져나온 암두시아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꾸물거리며 마저 남은 몸도 이불에서 모두 빼내었다.
척, 멋진 포즈를 지으며 바비룬을 향해 빙긋 웃었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으나 때리기에는 너무 어린애였다. 그 얼굴에 손바닥을 비비는 걸로 그 화를 달랬다.
“으엑, 짜!”
“닥쳐 뿔충아. 내 하나뿐인 이불을 네가... 진짜 이걸 죽여버릴 수도 없고.”
“바비룬 화났다!”
“바비룬 빡쳤다!”
“빡쳤다는 말을 너네가 어떻게 아냐?”
“너가 알려줬어 바보야!”
살면서 저 빡대가리들에게서 바보라는 단어를 들을 줄이야.
바비룬은 단전에서부터 짜증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암두시아스를 죽어라 노려봤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태평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옆에는 너덜너덜해진 이불이 있었다.
“너 괘씸해서 안 되겠다. 애새끼라고 오냐오냐 봐줬다가 버릇 나빠지겠어.”
“응? 바비룬 화났어?”
“그래, 네년 뿔이 내 이불 찢어발겼잖아. 그러니 내가 빡쳐 안 빡쳐?”
“...우움. 미안해.”
“미안하면 따라와.”
서랍을 열자 그곳에는 금화가 가득했고, 장롱을 열면 용사 시절 걸쳤던 코트가 있었다.
머리를 손빗으로 쓸어내리고 헝클이자 절로 정리가 됐다.
얼굴도 손으로 비비니 따로 세수할 필요도 없어졌다. 주술의 편리함 중 하나다.
“어디 갈 건데?”
코트를 걸치고 문을 나서는 바비룬의 옆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는 암두시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끌고 세계수를 나서며 천천히 입을 뗐다.
“직접 이불 만들기도 귀찮아, 별로 따듯하지도 않고. 역시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겨야 해. 네년 뿔에 찢어지지 않을 강도로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야겠어.”
[바비룬! 암두시아스를 데리고 어딜 가는가!]
“어머? 주술 용사님 인간계에 잠시 다녀오려나 봐요?”
그때 이 비이린을 지탱하는 두 명의 거물이 따라붙었다.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 요정족의 공주 넬피.
몸통 전체가 손바닥만 한 넬피는 옛날에 비해 제법 살이 빠져 있었다. 예전에는 내리막길에 척 놓으면 굴러다닐 몸뚱이였는데 지금은 제법 얇다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이그니스는 강한 빛을 뿜으며 역정을 냈고, 넬피는 작은 날개를 열심히도 움직이며 바비룬 주위를 맴돌았다.
[그 아이를 어찌하려는 겐가! 암두시아스는 오늘 짐에게 음악회를 열어주기로 약조했단 말이네!]
“혹여나 그 아이를 해치려는 건 아니겠죠? 우리 암두시아스는 저와 악쿤 토든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이니 험하게 다루시면 곤란하다는 거예요. 아아... 지금쯤 그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요.”
‘지랄들이 갈수록 발전하네.’
암두시아스는 비이린에 온 지 한 달 만에 완전히 적응했다.
예쁨마저도 받는다. 그녀의 타고난 음악성과 착한 성품은 정령과 요정, 그리고 귀가 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귀가 예민한 엘프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성분이었다.
“일없으면 발 닦고 잠들이나 퍼질러 자. 금방 돌아올 거니까 주접떨지 말라고.”
[무엄하다! 짐은 빛의 정령의 정점에 선 자로써]
“차암, 이그니스님은 잡학다식하고 이치에 밝은 정령왕인데 어째서 화나셨을 때는 어휘력이 가난해지시나요?”
[넬피! 짐은 그대를 갓난아기 때부터 봐왔네! 그 무슨 말버릇인가!?]
“어머, 무심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지 뭐예요? 호호...”
그들을 재밌다는 듯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바라보는 암두시아스의 목덜미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플라금의 수도 이프카리스토. 그곳에서 따뜻한 이불 하나 사야겠다.
암두시아스 옷도 좀 사줄 생각이다.
*
“근데...”
왜 네놈들이 아직도 여기 있어? 전쟁 뭐시기 때문에 서대륙으로 간다지 않았나? 그리고 암두시아스를 데려갈 수도 있었잖아, 개자식들아. 나한테 구라 친 거냐?
등등 할 말은 많았으나 짙고 깊은 한숨을 내뱉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곳은 성냥과 담배 한 개비라는 주점이었다.
그곳에서 C세트라는 요리를 만족스럽게 씹고 있는 악쿤 토든과 진 키아라, 디안이라는 악쿤의 제자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드르륵!
의도적으로 거칠게 의자를 끌어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암두시아스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진 키아라를 발견하곤 손을 뿌리치더니 쫄래쫄래 다가가 그녀에게 안겼다.
“오구오구, 잘 지냈어?”
“응! 바비룬이 좀 극성이지만 나름 잘 지냈어!”
둘의 재회를 바라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보살펴준 건 쳐주지도 않는 건지 암두시아스는 진 키아라를 어미 마냥 따르고 있었다. 그녀를 마주하자 본인을 곧장 들러리로 취급하는 것도 괘씸했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악쿤 토든이 질문을 던졌다.
“암두시아스의 외형을 바꾼 건 알겠어. 하지만 관문을 통과할 때 어떻게 들키지 않은 거지? 마기를 숨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악쿤 토든의 말대로 암두시아스는 뿔을 가리면 그냥 어린아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비이린에서 머무는 동안 이그니스와 넬피에게서 마기를 감추는 법까지 배웠기에 그녀의 변장은 완벽했다.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는 한 악마라는 걸 들킬 일은 없다.
하지만 관문은 얘기가 다르다. 그곳에 있는 마법진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바비룬 필라이트도 악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용사지만, 그는 마법에 있어서는 암두시아스보다도 문외한이다.
대체 무슨 수를 부린 걸까.
사실 바비룬에게는 플라금으로 향하는 독단적인 루트가 있어 남들처럼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질문 자체가 그에게는 무의미했다.
어려운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속 편히 알려주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이들 일행이 말도 없이 아직도 동대륙에 죽치고 있다는 것과 암두시아스가 최세린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그것이 기분이 더럽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여 바비룬의 대답은 날이 선 것이었다.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그보다 플라금에서 안 꺼지고 여태껏 뭐 하고 있었냐고.”
“...그냥 뭐, 이것저것.”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악쿤과 진이 서대륙에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들은 아들러 프리브룩스를 일방적으로 만나고 왔다고 했다.
몰래 침실에 원격 시야 마법을 설치했고, 그의 행동을 분석해봤다고 말이다.
“아들러의 생활 패턴은 기괴했어. 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지 못할 거라 생각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악쿤의 감상평이었다. 대화를 놓친 적은 없은데 저 말의 뜻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단박에 의미를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반인륜적이다. 대충 그런 얘기냐? 인육이라도 뜯어먹디?”
“...그건 아니야. 그리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의 생활은 방탕하지 않았어. 오히려 절제되었다면 절제되었지.”
“뭔 개소리냐고. 알아듣게 설명해 시발아. 지금 기분 좆 같으니까.”
“바비룬, 좆이 뭐야?”
“재홍 오빠! 그딴 말을 애 앞에서 하면 어떡해요!!”
“야, 뿔 계집. 좆이 뭔지 궁금하면 귀쟁이들 아무나 붙잡고 ‘고추 보여주세요~’라고 물어봐. 알겠지?”
“이 망나니가 진짜!”
비이린식 농담인데, 아쉽게도 진 키아라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서슬 퍼렇게 비친 단검의 날을 들이세우며 바비룬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에 기가 찼는지 바비룬은 헛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웃음기 때문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진 키아라에게 말했다.
“크크큭... 야, 애 앞에서 흉기 꺼내는 건 괜찮은 거냐?”
“저급한 욕 따위보다는 나아요. 나는 이거 덕에 살아남았던 거니까.”
“나도 욕 덕에 살아남았어. 빡칠 때마다 시원하게 갈겨주니까 이 좆 같은 세계에서 열 뻗쳐 뒈지지 않았잖아?”
“욕설 한마디만 더해, 사지를 찢어버리고 다시는 몸 못 움직이게 온몸을 마비시킬 테니까.”
“푸하하하! 그게 욕보다 더 심하잖아, 이 미친년아!”
으르렁! 아니면 크르르륵...!!
악쿤 토든은 둘 사이에 효과음을 붙인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뒤에는 호랑이와 독수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송곳니와 발톱을 드리우는, 대충 그런 구도.
“디아안!”
그 삭막한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암두시아스는 쫄랑쫄랑 디안의 품에 안겼다.
그제야 둘의 표정이 누그러진다. 암두시아스는 여전히 무서운 걸 보기 싫다는 듯 디안의 가슴팍에 파묻은 얼굴을 빼지 않았다.
“...하. 그래, 욕은 얘 앞에서는 자제할 테니까 아들러인지 거들먹인지 그 새끼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말해.”
‘새끼는 욕이 아닌가?’
딴지를 걸기에는 막 누그러지는 분위기였다.
“그의 생활 패턴은... 딱 사람으로 기능할 수 있게끔만 움직이고 있었어.”
“제발 부탁인데 뭉뚱그려 말하지 마.”
“밥 먹고, 용변 처리하고. 그게 끝이라고.”
“그게 뭐? 누구보다 삶에 솔직한 인간이잖아.”
“딴지 걸지 말고 좀 닥치고 들어. 아들러는 그것밖에 안 한다는 말이야. 정말 그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 천장만 바라보면서 말이야.”
악쿤의 날 선 말에 바비룬이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곤 손가락을 까딱이며 악쿤에게 신호를 보냈다.
용사 시절 사용했던 암구호 중 하나다.
자료를 보여달라는 뜻이다. 그게 인적이 많은 곳이라면 마나 장벽을 펼쳐달라는 것까지 전제에 깔려 있다.
“...그래, 너 말대로 직접 보는 게 낫겠다.”
눈치채기도 힘들 마나 장벽, 그것을 펼치고 원격 시야 중 하나를 보여줬다.
그에 맞춰 디안은 암두시아스의 눈을 가리곤 본인도 고개를 돌렸다.
“...곧 뒈질 것 같은데? 아니지, 저거 살아있는 거 맞아?”
대략 5분 정도 흘렀을까, 바비룬은 악쿤이 말한 바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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