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플라금
* * *
방에 들어서자 제법 넓은 침대 하나가 보였고, 두 명이 눕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최세린은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침대에 몸을 들이박았다. 용수철의 탄력에 몸이 둥실 떠올랐고, 그 떠오르는 간격은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엄청 푹신하네!”
“네가 애냐...”
내 말에 디안이 멈칫했다.
그녀도 침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최세린처럼 한바탕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한 마디로 박살 냈다.
“침대 푸근함은 자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의자를 질질 끌어 엉덩이를 붙였다.
이곳에는 3일이나 있어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이틀이겠지만.
여기 죽치고 있는 것 자체가 차원석을 제외하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이틀 동안 무얼 하면 좋을까.
“대책부터 세우자.”
내가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은 암두시아스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일시적으로 비이린에서 맡아 주긴 했다만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길러달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재홍이나 이그니스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비이린에 있기에 너무 동떨어진 존재다.
다시 데리러 가야 한다. 그 시기는 전쟁을 중지한 다음일 것이다.
이번에는 그 전쟁 중지에 대해 디안이 물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막을 건가요? 왕을 붙잡거나 아니면 우리 쪽에서 선전포고를 하나요?”
선전포고... 그게 가장 좋을 것 같기는 하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고, 서대륙 왕에게 다시 선전포고하는 것.
우리가 마음먹는다면 당신 군대가 궤멸하는 건 시간 문제고, 전쟁을 일으키면 우린 서대륙을 공격할 거다.
이런 뉘앙스면 그만두지 않을까, 이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용사의 강력함을 왕에게 직접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서대륙의 왕 아들러 프리브룩스.
그의 밑에는 왕족과 귀족이 주축을 이루는 기사단이 2개 있다. 그건 아들러의 자랑이다.
백금 기사단과 황금 기사단. 이 정갈한 기사단을 이끄는 두 명의 단장은 무려 소드 마스터다.
김철수보다 단 한 단계 낮은 등급. 그 한 단계의 차이야 하늘과 땅 차이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그 두 단장이 기사단을 이끈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남대륙의 마법사를 우습게 볼 건 아니지만, 소드 마스터에 비견할 바는 못 된다.
그렇다면 왜 나와 최세린을 포섭하려 했을까?
이유는 보다 완벽한 승리와 전쟁의 유일한 변수를 미리 차단하려던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입 싼 영주 덕분에 알아챘다. 그리고 경고를 보내뒀다.
이쯤이면 그만둬도 될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아들러는 결코 물러날 인종이 아니다.
한번 결정하면 그의 행동력은 남다르다. 특히나 본인의 야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았다.
“플라금!”
“...어딜 가나 똑같구나.”
플라금의 영주도 호시탐탐 다른 나라를 침범할 생각에 군침을 삼키고 있다.
단위가 대륙 대 대륙에서 나라 대 나라로 바뀐 것뿐이다.
되짚을수록 허무한 감정이 휘감긴다.
당분간은 나와 최세린의 경고장으로 전쟁을 막았고, 다시 한번 경고를 보내러 아들러를 만나보려던 차다.
그럼 전쟁이 멈춰질까? 아니...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또 서대륙은 남대륙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그들에게는 명분이 존재했다.
남대륙이라고 꼭 피해자가 아니다. 기존의 남대륙은 굉장히 조촐했다.
국경이 대륙이라기보다는 나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의 땅에는 뛰어난 마법사가 많았다.
남대륙의 지도자는 마법사를 회유해 서대륙을 침범하여 영토를 넓혔고, 마법을 이용하여 서대륙을 잘라냈다.
그 잘라낸 걸 남대륙에 붙였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이지만, 굳이 거짓을 고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 내가 ONE(?)에 전송되기 수백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남대륙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곧 서대륙은 남대륙에게 집어 삼켜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중지됐다.
다름 아닌 마왕군이라는 공동의 적 등장이 이유였다.
인류는 단합했고, 더는 군력을 낭비해서는 안 됐다.
인류 공통의 최우선 과제는 마왕군 괴멸이었다.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대륙에 강자는 많지만 이 모든 건 상대적인 얘기다. 마왕군에게 인류는 무력했다.
특히나 마왕을 모시는 사천왕.
그들은 개개인의 힘만으로 나라를, 대륙을,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 그런 고민은 부가적인 문제였다.
마왕군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한껏 기세를 타고 있을 때 이들에게 대적할 장기말이 필요했다.
그게 전송자다. 그들은 용사라고 이름 붙여졌다.
처음에는 초라했으나, 이들의 강함은 날이 갈수록 달라졌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 용사는 사천왕에 필적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용사는 사천왕을 물리쳤다. 마왕을 물리쳤다. 마왕군을 파괴했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은 사라졌다. 다시 저들 간의 탐욕이 구렁이가 기어오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일시적이던 인류 간의 전쟁은 재발했다.
그때 새로운 마왕군이 나섰다. 그들을 물리친 건 또 다른 용사다.
그 마왕군이 괴멸한다.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고, 인류는 그 평화를 제손으로 무너트렸다.
그때 등장한 마왕 단탈리온, 그녀를 모시는 4명의 사천왕 메이블, 토텔리, 브룩, 긴.
“......”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메이블의 일지에 적힌 내용 중 일부다.
“오빠, 표정 풀어.”
“...그래 아직은, 아직은 아니니까.”
아직 전쟁은 재발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
“할망구, 멋대로 입을 놀렸더군.”
“얼씨구, 귀도 밝네.”
마도구 시장이 폐점하는 오후 12시.
마석 상인인 노파를 둘러싼 수많은 장정이 그녀에게 손짓하자 그녀는 군말 없이 발길을 옮겼다.
“그분께서는 너의 진귀한 재주를 높이 사 거두셨지만, 용사에게 입을 놀릴 줄이야... 삶에 여한이 없는가?”
“살 만큼 살았는데 무슨...”
“용서를 바라는가? 안 되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늙은 여우를 어째서 우리가 거두어야 하는가.”
자정들이 노파를 데리고 간 곳은 마도구 상점의 지하 2층이었다.
이 상점에 가입한 자들도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수수께끼의 장소.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지만 곰팡이가 들끓지도 않았다.
먼지 한 점 없었다. 바닥도 깨끗했다.
그 가운데에서 노파가 구부러진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장정 중 거구의 사내가 노파에게 다가온다.
“그분께서 내 뜻대로 해도 좋다 명하셨다. 당신의 목숨은 내가 쥐고 있는 셈이지.”
“젊은것들이 늙은이를 상대로 무슨 추태람. 부끄럽지도 않냐?”
“곱게 늙었더라면 모르겠지만, 그 팔랑거리는 주둥이를 보자니 별로 부끄럽다는 마음이 없어지더군. 악쿤 토든은 아직 우리를 눈치채서는 안 된다. 그 장면은 그분이 가장 고대하시는 순간인데, 늙은이의 주책 때문에 무너져서는 안 되지.”
“흐흐...”
노파는 끄응 허리를 펴곤 가운데 있는 사내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녀의 모노클에 한 형상이 맺힌다. 그것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이었다.
그 주위 장정들도 마찬가지다. 노파의 눈에는 이들 모두가 뱀으로 보였다.
이곳은 뱀 소굴이었다. 실렉티스(Συλλκτε). 수집가들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좀먹는 독사들.
“일곱 번째 렌즈는 회수한다. 그간 수고 많았군.”
“아이고... 아직 용사 놈한테 차원석도 못 건네줬는데...”
“걱정할 필요 없다.”
크르르륵!
어둠 속에서 기괴한 형상의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자 머리에 곰의 몸통, 구렁이의 몸집에 늑대의 머리.
키메라였다. 사내는 손을 앞으로 뻗어 녀석들에게 노파를 허락했다.
끄드득 끄득.
뿌득 뿌드득! 촤아악!
놈들은 쭈글쭈글한 고기를 포식하기 시작했고, 바닥에는 시커먼 피가 죽 깔렸다.
툭
노파의 발목이 신발도 벗겨진 채 떨어져 나왔다. 그 발바닥에는 S자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그 문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사내는 입을 뗐다.
“그는 전쟁을 지켜봐야 한다. 차원석은 우리가 책임지고 배달해줄 테니 걱정 말고 잠들라고.”
키메라만 두고 떠나는 사내의 오른손등에도 같은 문신이 있었다.
그 문신은 자세히 보면 뱀이 S자처럼 구부러진 모양이었다.
*
‘그 문신 어디에서 봤었는데...’
디안은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키메라를 다루던 상인, 그의 오른손등에 있던 문신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유행하는 문신일까? 분명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그걸 어디서 봤는지는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듯 떠오르지 않는다.
“너도 잠 안 오지?”
“아... 네.”
옆에서 진 키아라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에휴, 짧은 탄식을 뱉더니 베개를 집어 앞으로 내던졌다.
“악!”
바닥에서 깊은 명상에 빠져있던 악쿤 토든의 머리가 맞았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진 키아라에게 무언가 조목조목 따지자 그녀는 신경질로 일축했다.
“잘 때는 그 빌어먹을 명상 좀 그만하면 안 돼? 눈부셔 죽겠단 말이야.”
“네가 기척을 안 느끼면 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숨 쉬는 걸 까먹는 사람도 있어? 자면서도 마나 모으는 거 다 보이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기절이라도 시켜줄까?”
“해볼 테면 해봐. 또 오른손 못 쓰고 싶나 보지?”
흠칫, 몸을 떨며 악쿤 토든은 오른손을 바라봤다.
마비독에 노출되어 움직이지도 않았던 오른손, 진 키아라의 성질이 조금만 더 더러웠다면 아직도 쥐가 난 듯 불쾌한 감각만이 남았을 손.
“...어라.”
그 손이 멀끔해졌다. 마취에서 풀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진 키아라는 커다란 동작으로 요란하게 이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서비스까지 해줬더니, 신경질이야 신경질은.”
“그건 네가 먼저 냈고... 아무튼 고맙다.”
마왕성에서 마기를 다루느라 거멓게 물들었던 악쿤 토든의 오른팔이 지금은 원상복구 되어있었다.
진 키아라가 마비독에 이어 치료 성분을 지닌 독까지 투입해준 것이리라, 분명 짓궂은 장난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마기를 거두어줬으니 수고를 덜었다.
“좀 자! 오늘 피곤하단 말이야.”
“...우리 오늘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아무튼 피곤해. 내일부터는 신경 안 쓸 테니까 오늘은 코 자라고. 팔 마기도 아직 다 거둬진 거 아니니까 무리하지 말고.”
“어... 음... 알겠어.”
오른팔을 움직여보자 확실히 조금의 이질감이 남아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바닥에 등을 뉘었다. 그녀에게 건네받은 베개를 베고 겉옷을 이불 삼아 잠시 눈을 감으니 금방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