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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7화 (17/152)

〈 17화 〉 플라금

* * *

“저 아이를 이곳에서 기르게 해줘.”

“...개소리.”

저 말을 끝으로 이재홍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흙으로 된 의자는 가라앉았다.

그는 암두시아스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이곳 비이린은 평화로워. 악마 같은 미꾸라지가 없다면 말이지.”

“마기가 정령이나 요정을 물들이진 않아.”

“그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거야.”

“마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다른 곳으로 가면 혼란만 불러올 뿐이야.”

“말 잘했네? 악마는 그런 존재야. 존재만으로 혼란을 불러오는 혼돈과 같은 존재. 괜히 악마를 모두 사형했겠어?”

“재홍 오빠.”

“나한테 더 바라지 마라. 알아서들 살아. 얘기 들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라고.”

오른손을 홱 휘두르며 바닥에 걸쭉한 가래를 뱉었다. 더 대화하기 싫다는 몸짓이다.

최세린이 격분한 채 이재홍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세계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나도 이만.]

옆에서 쭈뼛거리던 이그니스, 이번 타겟은 그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날이 어둡다. 최세린은 쏜살같이 그를 붙잡았다.

“이그니스님. 부탁할 게 있어요.”

[음? 짐에게 말인가?]

“네. 저희는 괜찮으니까 부디 저 아이를 맡아주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또 암두시아스였다.

[이보게 진 키아라, 방금 바비룬도 말했지 않는가. 비이린에서 악마를 키우라니, 언어도단(????)!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겠네.]

“이곳 세계수의 뜻은 ‘모든 생명을 포용하라’잖아요? 저 아이도 생명이에요. 누구를 해친 적도 없고요.”

[견강부회(??會). 우긴다고 그대 뜻대로 흘러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아가기 편하겠는가? 타협의 여지는 없네. 돌아가게.]

이대로 물러나면 암두시아스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역시... 멋대로 현세로 데려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최세린의 말대로 암두시아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존재 자체가 귀찮았지만 저 또래는 모두 귀찮은 존재가 아닐까 애써 자위했다.

“이그니스님. 이곳이 아니면 저 아이는 어딜 가나 배척당해요.”

[짐이 상관할 바 아니네! 빛의 정령보고 악마를 기르라니! 물과 기름이 공존할 수 있는가?!]

“열심히 섞으면 잠시나마 공존하던데요. 좀 섞어주시지 그래요.”

내가 한마디 거들자 얘기를 구경하던 엘프가 피식 웃었다.

그는 슬쩍 대화에 참여했다.

“정령왕님, 악마라면 예전에도 키웠잖습니까?”

[...뭐, 뭐라?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배신당했다는 듯 격분한 표정을 지으며 엘프를 타박하고자 언성을 높였지만, 엘프는 귀를 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엘프가 던진 건 폭탄 발언이었다. 이걸 주워 담지 않으면 우리에게 승기는 없었다.

이그니스를 곧장 몰아세웠다.

비이린에서 방귀 거하게 뀌는 정령왕이다. 그만 설득하면 굉장히 순조롭다.

“악마를 키웠다고요~? 누굴까 그게?”

[......정신 나간 엘프의 헛소리다! 악마를 키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야 찾으면 나오는 법이죠. 이그니스님도 아시겠지만 악쿤 토든은 마법 용사고 세계수의 마나가 청량한 만큼 악마의 마기는 찾기 쉽지 않겠어요? 그들은 태생부터 마기를 풀풀 풍기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굳이 증거를 찾을 게 있나요? 이미 당황한 이그니스님부터가 확실한 증거인데.”

[무, 무엄하다! 감히 짐을 떠보는가?]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아이를 돌봐달라는 우리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이그니스는 당황한 역력이 가득하다.

그는 애써 모르는 척하고선 스르륵 사라지려 해보지만 최세린은 암두시아스에 관한 일은 굉장히 끈질겼다.

우리는 곧 전쟁을 막으러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곳에 암두시아스를 데려간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녀는 안전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자라야 한다. 그건 이곳 비이린만이 유일하다.

물러날 수 없었다. 외통수였다.

“부탁해요.”

[......]

“아니면 요정족 공주님에게 악쿤 토든의 이름을 말씀하시고 넘겨주시면 그녀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럼 짐이 돌보지 않아도 되는가?]

“그럼요.”

“야, 야! 너 방금 뭐라고...?”

최세린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못 들은 거 아닌데 뭘 되물어? 오랜만에 요정족 공주님 보고 가던가.”

“...너, 너. 개소리 그만해라.”

“크크큭.... 미안, 미안.”

[이게 무슨 대화인가?]

궁금해하는 이그니스에게 다가가 귀로 추정되는 부분에 최세린은 속삭이기 시작했다.

“요정족 공주님이 악쿤 토든을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그의 부탁이라면 이 아이 하나쯤은 흔쾌히 맡아주실 거예요.”

[그렇다면야...... 물론 비이린에서 악마를 기른 적은 없지만! 이번만은 예외네.]

“물론이죠. 이 아이가 비이린 최초의 악마겠네요.”

이그니스에게서 떨어지곤 빙긋 웃는다.

그 웃음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그렇지...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보게. 용사가 세 명이나 있으니 정령들이 날뛰기 시작하는군.]

“너, 너 뭐라고 얘기 진행한 거냐?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그니스님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올게요.”

내 말은 가뿐히 무시하곤 암두시아스에게 다가갔다.

“암두시아스, 우리 잠깐 작별해야 돼. 언니가 할 일이 있거든.”

“진 키아라? 나 두고 가는 거야?”

“곧 데리러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이그니스님이랑 요정족 공주님 말씀 잘 듣고. 알겠지?”

“아, 응! 알겠어...!”

짧은 대화가 끝나자 이그니스는 암두시아스를 끌어안고 세계수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꿈틀꿈틀 몸부림치던 암두시아스가 최세린에게 소리쳤다.

“꼭 데리러 와!”

“물론이지. 이 오빠도 같이 올 거야.”

“그 아저씨는 별로 필요 없는데...”

“푸, 푸하하!”

호쾌하게 한바탕 웃곤 히끅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디안은 대화를 거의 못 들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크, 크큭... 아저씨, 가시죠?”

“...너 지금 진짜 진상이다.”

“아 미안 미안... 크큭...”

최세린의 웃음을 배경 삼아 비이린의 경계에서 나서자 갑자기 밤하늘이 보였다.

동전 뒤바꾸듯 비이린과 현세는 시차가 심각했다. 비이린이 정령계와 이어져 있는 아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아.”

지금 더 이동하기에 티는 안 냈지만 디안은 꽤나 지쳐 보였다.

차원문을 하루에 두 번이나 탔으니 이해는 됐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최세린은 웃음기를 겨우 거둬내곤 말했다.

“오늘은 야영해야겠는데? 시간이 많이 늦었네. 너는 괜찮아?”

“네, 거리에서 자라와서 등만 붙일 수 있으면 금세 잘 수 있어요.”

“걱정마. 휴대용 텐트 있으니까 나름 쾌적할 거야. 근데, 그 텐트 가지고 있는 양반이 어째 정신을 못 차리네...”

“으으... 으으으...”

나였다.

아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힘들 거였으면 요정족 공주님 보고 오지 그랬어.”

“으아... 그만... 그만 좀......”

“요정족 공주? 그게 어쨌다는 거죠?”

“있어. 크크큭... 나중에 오빠한테 물어봐.”

“그만...”

얄밉게 미소 짓는 최세린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밤은 끔찍한 기억에 길어질 것만 같았다.

*

차원문에 이어 시간 역행, 과거의 마왕성까지 쳐들어가고 마티고스와 한 판 붙기까지 했다.

그에 쓰인 마나는 상당했다. 그걸 채우기 위한 명상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비이린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곳은 굉장히 마나가 맑았다.

투명하다고 해야 하나, 질 좋은 마나여서 흡수도 굉장히 빨랐다.

명상은 새벽 4시부터 진행했고, 지금 감은 눈더미가 붉어지는 것으로 보아 2시간은 흘렀을까 싶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고 잔 거야?”

“명상이잖아. 멍청아.”

“아, 어제 무리 좀 하셨지.”

눈앞에는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최세린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손빗으로 대충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오빠, 허공에 거대한 물방울 띄워서 밑에 구멍 좀 뚫어줘. 샤워나 좀 하게.”

“너 가끔 보면 마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편리한 거? 지금도 얼마나 편리해. 야외에서 샤워도 할 수 있고.”

“마탑주라는 이름이 운다 울어. 고작 샤워 같은 데에 마법을 써달라고 하다니.”

“재홍 오빠가 샤워에 한이 맺혀서 왕한테 난리 친 거 기억 안 나? 사람 샤워 안 하면 찝찝해서 죽어. 여자는 더 그렇고. 아무튼 부탁 좀 할게~”

너무 뻔뻔하게 말에 기가 찼지만, 나름 타당한 주장이기는 해서 납득했다.

손을 휘적거리며 허공에 둥실 마법진 두 개를 띄웠다. 그곳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온도는 대충 약간 따뜻한 정도로만 설정, 최세린에게 손짓하며 샤워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내가 이딴 데 마법을 쓰다니... 디안도 깨워.”

“알겠어. 아참, 말해두는데 혹시나 훔쳐보면 눈 뽑아버릴 거야.”

“각목 훔쳐보는 사람도 있냐?”

“......”

한 방 먹였다 생각하며 뒤돌아 낄낄거리고 있자 오른손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세, 세린아? 나 오른손이 안 움직이는데...”

“당연하지. 마비독이니까.”

“...이거 좀 풀어줄래?”

“샤워 끝나면 생각해볼게.”

빙긋 웃으며 간이 텐트로 들어가곤 눈을 끔뻑거리는 디안을 데리고 나왔다.

“하아암... 마탑주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뭐. 그렇지.”

떨떠름한 내 대답에 최세린은 빙긋 웃으며 손을 척 들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은 저 멀리를 가리킨다. 그 손가락 끝에는 강이 있었다. 그곳에서 망을 보라는 의미였다.

그에 험악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말 대신 오른손을 툭툭 두드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꼬리를 말고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가 망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저 사람은 놔두고 우리끼리 샤워하러 가자.”

“어... 마탑주님? 이런 데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아니야. 생각해보니 내가 고지식했었어.”

“아... 음... 일단 감사합니다.”

디안은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머잖아 샤워하러 고목 뒤로 들어갔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강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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