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16화 (16/152)

〈 16화 〉 플라금

* * *

“지랄.”

이 세계 ONE(?)에 도착했을 때 내뱉었던 첫마디였다.

말 그대로 지랄이 맞았다. 눈앞에서 코스프레인지 분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엉처럼 말라 비틀어진 임금 같은 녀석이 우리에게 ‘오오, 잘 와주었네 용사들이여...!’라고 뇌까린 것부터가 불쾌했다.

알바를 막 교대하고 집에 들어가 씻으려던 참이었다.

날이 유독 더웠기에 땀으로 범벅이 된 티셔츠는 내 불쾌지수를 제곱으로 상승시켰다.

그때 멋대로 날 불러 놓곤 마왕을 구하란다.

끝이 아니다. 샤워부터 시켜주고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심지어 명령조다.

“좆까, 마왕인지 뭔지 몰라도 난 안 해.”

내 호전적인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주술 용사! 어전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전송자는 예법이라는 걸 모르는가!?”

“예법이든 뭐든 지랄할 시간에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멋대로 지들 세계로 불러 놓곤 마왕을 물리치라고? 샤워부터 시켜줘야 될 거 아니야 씨발놈들아.”

“샤, 샤워?”

“목욕 시발. 아무튼 다른 사람 알아봐. 번지수 틀렸으니까 빨리 샤워하게 돌려보내.”

데려왔으니 돌려보내는 법도 알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그건 불가능하다. 고등 차원 마법을 사용하려면 송신처, 발신처의 주소가 존재해야 하는데... 한 세계에서의 송신, 발신 주소는 원래 다르다...”

“뭔 개소리야.”

“그... 자네들은 돌아갈 수 없네. 우리는 지구라는 곳의 발신 주소를 모르거든...”

반송 불가인 택배라는 뜻이었다. 내용물은 용사입니다.

*

그날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언짢다.

“악몽? 악몽 꿨어?”

“...야, 눈부시니까 얘기할 때 내 눈앞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

“미, 미안!”

상급 빛 정령 윌.

그 녀석을 손으로 치우곤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강 정돈한다. 눈곱을 떼어내며 시야를 확보한다.

입맛이 텁텁하다. 톱밥이라도 들어갔나. 얼굴을 찌푸리며 바닥에 퉤퉤 찌꺼기를 뱉어내자 윌이 내 옆으로 다가와선 재잘재잘 떠들었다.

“왜? 왜 얼굴 찌푸려?”

“좆 같은 꿈 꿨어.”

“좆? 좆이 뭐야?”

“그런 게 있어. 엘프한테 가서 보여달라고 해봐. 고추 좀 보여주세요~”

“고추 좀 보여주세요~ 이렇게? 이렇게?”

“훌륭해. 자, 출동.”

고추 좀 보여주세요~

비이린에 새로운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윌 녀석이 실컷 떠들고 다닐 테지. 신성함의 상징인 빛의 정령이 고추 운운하고 있으니 퍽 웃긴 그림이었다.

[주술 용사! 윌에게 무슨 말을 가르친 건가?!]

그 농담이 그들의 보스에게는 유쾌하지 않았나 보다.

빛의 정령왕이 친히 나섰다. 그는 내 주위를 환하게 둘러싸곤 타박하고 있었다.

“재밌게 살면 좋은 거잖아. 엘프가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대?”

[짐과 신하들은 신성(??)한 정령이다! 그 성(?)은 성희롱의 성(?)이 아니란 말이다!]

“당신도 드립 좀 늘었는데? 근데 재미는 없으니 7점. 참고로 100점이 만점이야.”

[바비룬 필라이트!!]

“시끄러, 귀 아파.”

[그대는 도대체가­]

이어지는 잔소리를 뒤로하고 벽면에 손을 얹었다. 새하얗고 뽀얀 나무 벽. 나는 세계수의 속살이라고 부른다.

식사 대신 세계수에게서 정기를 받는 것이다.

그건 제법 많은 집중이 필요했다.

[......]

이때만큼은 이그니스도 입을 다문다. 이걸 노린 거지.

거룩한 세계수와의 교감이니 이건 빛의 정령이 그토록 환장하는 신성한 행위였다.

“고추~ 고추~ 하하하하!!”

“고추 좀 보여주세요?”

“꺄르르륵!!”

근데 정령들과 요정이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가 내 집중을 깨트렸다.

“정기 받고 있잖아 새끼들아! 아가리들 좀 닥쳐!”

[이 얼마나 무엄한지고!! 세계수 앞에서 욕을 하는가?!!]

“세계 구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해?”

[과거의 업적을 언제까지 운운할 텐가!]

“사돈 남 말하네, 당신도 맨날 자기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 떠들잖아.”

[그, 그건!]

“교감 끝내고 욕한 거니까 잔소리 그만해.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해.”

[그, 그럼 다행이군...]

궁시렁대는 이그니스를 데리고 세계수의 바깥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높이가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나무가 보였고 이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는 워낙 거대해서 하늘을 뒤덮는다.

정령과 요정은 걱정 없이 뛰놀 수 있고,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는 이곳을 가꾸며 삶을 마감한다.

이곳은 비이린이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가꾸어진 평화의 숲.

그 나뭇가지에 폼 잡고 걸터앉아있는 귀 기다란 놈이 내게 용건이 있는 듯 지긋하게 날 바라본다. 그에 나도 똑같이 응시하자 놈이 먼저 입을 뗐다.

“일어났는가 드루이드.”

“그래, 기침하셨다.”

엘프 경계병.

그는 내 농담은 받아줄 생각이 없는지 입가를 찡그렸다.

“네 녀석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네 녀석? 말본새가 왜 그래. 윌이 고추 보여달라고 물어본 게 너였냐?”

“그게 무슨 소리­ 아니, 저급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 저쪽 그늘 안에 있으니 가봐라.”

뭐라는 거야.

찾아올 손님이라곤 있을 턱이 없었다. 이그니스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 귀쟁이가 굳이 거짓말을 뱉지는 않을 테지, 다만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일 게 뻔했다.

또 전쟁의 선봉장을 맡아달라 어쩌구 주접 떨러 온 사람이면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너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곳에는 생각도 못 한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다 재홍아.”

그곳에는 정윤상과 최세린, 그리고 얼굴도 모를 여자애 두 명이 있었다.

*

“악마를 비이린에 데려와? 제정신이냐!?”

이재홍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암두시아스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짐 또한 바비룬 필라이트의 말에 동감한다. 마법 용사 악쿤 토든, 암기 용사 진 키아라. 그대들의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그게 모든 행동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 악마라는 존재를 모를 그대들이 아닐 텐데.]

“맞는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그니스님.”

[그래, 그간 평안했는가?]

“덕분에요.”

“덕분은 무슨, 아무튼.”

과자 같은 건 없으니까 기대하지도 마라.

운을 띠곤 이재홍은 발을 굴러 주술을 발동했다. 머잖아 흙으로 빚은 의자가 다섯 개 생긴다.

“대충 앉아. 이 악마도 설명하고.”

“나뭇잎이라도 깔아줘요. 엉덩이 더러워지잖아요.”

“너 많이 컸다? 옛날에는 나한테 찍소리도 못하던 게 불평불만도 할 줄 아네.”

“재홍 오빠 건들거리는 건 더 심해졌네요.”

최세린과 이재홍의 눈에서 스파크라도 튀는 것 같다.

욕은 좀 줄어든 것 같지만 공격적인 어투는 그대로였다. 이 모습에 괜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아이에 관련해서 용건이 뭔지 말할 건데, 이그니스님은 입이 무거우신가요?”

[상청하정(上下?). 신하들이 짐을 보고 배우지 않겠는가.]

“저게 무슨 말이야?”

“입 무겁단 소리 같은데.”

[허어... 짐의 말이 그리도 어려우더냐.]

“노망난 늙은이는 무시해.”

[바비룬 네 이놈­!!]

이재홍은 이그니스를 무시하고 내게 더 말해보라며 손짓했다.

언제나 언쟁을 만드는 모된 성격이었지만, 이런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저불 소장처럼 지루한 서론 따위 집어치우는 걸 좋아한다는 점 말이다.

“마왕성에 다녀왔어. 시간 역행이라는 금기 마법을 써서 말이야.”

“미친 새끼.”

욕이 날아왔지만 상정했던 반응보다는 약했다.

머저리 새끼, 병신 새끼, 어쩌고저쩌고 등등의 험한 욕설을 예상했는데.

[...금기를 저질렀다라...... 그대는 불문율을 어겼는가?]

“정체는 안 들켰으니 타임 패러독스가 강하게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큰 영향을 하나 주기는 했죠. 그게 이 아이입니다. 그전에.”

디안에게 눈짓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암두시아스가 어느샌가 일어나곤 최세린의 옷깃을 꾹꾹 당기고 있었기에 더 떠들기에는 상황이 별로였다.

“나 깼어......”

그녀는 눈을 부비며 최세린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애들 심리는 모르겠으나 눈치 좋게 디안이 암두시아스를 끌어안았다.

“제가 돌보고 있을게요.”

머잖아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저 아이는 과거에서 데려왔습니다.”

[이 무슨...... 그거야말로 금기 중에 금기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 아이는 역행 시간대에서 머잖아 죽을 아이였거든요. 타임 패러독스가 강하게 일어나진 않습니다. 지금도 괜찮잖아요?”

[하, 하아...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이그니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다시 이재홍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아이만 데려온 게 아니야. 그곳에서 메이블의 일지를 가져왔어. 그들이 왜 우리 편의를 봐줬는지도 알게 됐고.”

“병신 짓만 골라서 하네. 애새끼는 왜 데려오고 과거는 왜 캐고 다니는데? 이게 네가 원하던 유지되는 평화인가 뭐시기랑 관련된 거냐?”

“맞아.”

나는 메이블과의 문답을 떠올렸다.

“메이블이 왜 우리를 죽이지 않았을까? 기회는 많았는데도.”

“몰라, 시발아.”

“재미 때문이야.”

이재홍의 질렸다는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재미?”

“그래, 재미. 용사와 사천왕의 싸움은 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유야. 이 일지만 봐도 용사의 성장을 날짜별로 빼곡하게 기록해두고 있었어. 우린 그들에게 육성 당해왔던 거야.”

시간이 없어 일지는 이재홍을 기다리며 훑어봤던 게 전부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용사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 사실을 전하자 분했는지 이재홍은 얼굴을 붉히곤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놀아난 것 같아서 기분 더럽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생각을 더 해봤지. 어쩌면 몬스터를 인간계에 보낸 것도 우리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처음을 떠올려 봐. 특히 너는 몬스터고 뭐고 모르겠다고 게으름 피우고 있었잖아.”

“좆 같이 말하지 마라.”

“그래, 알겠으니까 더 들어.”

내 결론은 이거다.

“마왕군의 세계 지배 야욕은 최종 결전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던 거야.”

가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답 말고는 나오지 않는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다? 용사를 죽이고 사천왕이 직접 출두하여 다 쓸어버리면 된다.

내가 알던 정보를 메이블이 모를 리 없다.

내 스승, 검호, 다크 드래곤.

이들은 강력하나 셋이 사이 좋게 합심하여 마왕군에게 칼끝을 들이밀 일은 없다. 심지어 세계가 멸망하든 관심도 없는 작자들이다.

마왕군은 원한다면 언제나 세계를 뒤엎을 수 있었다.

병력도 필요 없다. 사천왕과 마왕. 그 다섯으로도 충분했으리라.

“왜 그러지 않았을까?”

“모른다고.”

“그게 메이블이 말한 재미야. 근데 스릴과는 다른 개념이라 생각해. 스릴을 원했으면 스승, 검호, 다크 드래곤. 세 전력을 도발했으면 됐어. 약해빠진 우리를 정성 들여 육성할 필요가 없었다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글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또 병 도졌네. 지 혼자 존나게 고민하는 병.”

“그래, 병이라면 병이지.”

이에 대한 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전쟁에 관한 얘기다.

“저 경계병 엘프에게 들었어.”

전쟁론자는 나와 최세린만 찾은 게 아니었다.

하기야 내가 전쟁론자였어도 이재홍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전쟁의 선봉장으로 내세우기 가장 좋은 용사는 이재홍이다.

그의 주술로 병사의 신체를 강화하고, 저는 맹수로 변하여 상대 군대를 쓸어버린다.

부상자조차도 그의 주술로 치유 가능하다. 그가 전력이 되어준다면 과장 좀 보태서 병력 손실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 능력이 탐이 나 동대륙에서도 그에게 추잡한 손길을 뻗었다고 했다.

그런 자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것 까지가 엘프가 알려준 내용이었다. 이재홍 성격 많이 죽었네.

“전쟁... 그놈의 전쟁. 그냥 만족하며 살면 좀 좋냐고.”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혼잣말이야, 그냥 답답해서 그래.”

아들러 프리브룩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실 그를 죽인다고 서대륙과 남대륙의 전쟁이 막아질지는 모르겠다.

그는 왕이라는 이름의 간판일 뿐이다. 그 간판의 대체자는 얼마든지 많다.

그럼 그들을 모두 다 죽일까? 아예 서대륙을 멸망시키라고 하지 그래.

타 대륙에 비해 군력 약한 동대륙은 전쟁 따위 계획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들은 타겟이 달랐다.

저들끼리 내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대륙과는 다르게 한 대륙에 여러 나라가 있는 동대륙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왜 저들만 생각할까. 죽어가는 병사와 휩쓸리는 민간인은 무슨 죄가 있다고...’

전쟁의 근간을 깨부수는 확실한 방법은 단 하나 알고 있지만... 아직 확신이 없기에 입을 앙 다물었다.

그를 보자 답답했는지 이재홍은 신경질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찾아왔냐고. 그리 반가운 사이도 아니잖아.”

“...그래, 전쟁 얘기는 이쯤 하고 본론을 꺼낼게.”

손가락으로 암두시아스를 가리켰다.

“저 아이를 이곳에서 기르게 해줘.”

“개소리.”

이재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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