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화이트 드래곤
* * *
자이키릭의 심장을 얻었을 때 공략했던 던전, 얼음 계곡.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곳의 수호자를 맡던 설인을 물리치고 계곡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한 하품을 내뱉던 자이키릭, 그가 우리 용사 일행에게 내뱉은 첫마디.
[...흥, 귀찮으니까 그냥 가거라.]
“방금 막 당신 부하 죽였는데 무시하기냐?”
[벌레가 죽었다고 슬퍼해야 하나?]
검술 용사 김철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용이란 녀석들은 원래 이런가.”
“공격하면 퍼뜩 일어날 새끼가 거드름 존나 피우네.”
주술 용사 이재홍이 같잖다는 듯 용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낸다.
그 시선을 묵묵히 바라보던 암기 용사 최세린은 입을 열었다.
“흠...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나?”
악쿤 토든, 정윤상은 이 계곡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알아챘다.
“관두자.”
격이 달랐다.
드래곤 로드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직접 보니 알겠다.
이 드래곤이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른 화이트 드래곤이기에 로드가 됐다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급을 따진다면 스승과 같은 격. 그런 괴물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건 요행이라도 불가능하다. 일행이야 저 박력을 느낄 줄 모르니 속 편한 소리 내뱉는 거다.
이 던전에서 마법 용사의 아티팩트인 자이키릭의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
그 정보가 허튼 정보는 아니었으나 시기를 잘못 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게 나아. 절대 못 이겨.”
“병신, 기껏 지 무기 구하러 와줘도 잔뜩 쫄아가지곤.”
곧바로 반발이 들어왔다. 이 공격적인 어투는 이재홍의 특징이다.
"......"
이제는 그의 폭언에 익숙해졌기에 김철수와 최세린은 굳이 반응해주지도 않았어야 했다. 성격 엿 같은 걸 몇 년이나 봐왔다. 하지만 이날은 조금 달랐다.
그의 주장에 다른 일행도 동조했다.
“근데 오빠. 재홍 오빠 말대로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자고?”
“저 녀석이 워낙 극성이지만... 이번에는 나도 동감이야. 지금 얻어두지 않으면 언제 마왕군을 소탕하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는데 일에는 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계란이 바위를 어떻게 이겨요?”
“그만큼 격차가 심해?”
“네, 우리 수준 용사 20명이 달려들어도 몰살이에요. 그만큼 심해요.”
자이키릭은 일행의 언쟁을 지루한 티비 프로그램 보듯 구경했다.
거한 하품이 이어진다. 그 하품을 내뿜은 자리에 싸아악 서리가 진다.
이재홍이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며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러니까 네가 병신이라는 거야.”
“...너 시발 자꾸 딴지 걸래?”
내 기분이 불쾌했던 게 화근이었다.
일행을 데리고 계곡에 왔던 것부터가 민폐로 느껴졌다. 그보다 더 불쾌한 건 저 자이키릭과 나와의 차이였다. 그런 내 심정을 저 눈치 따위 안 보는 이재홍이 알 리가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 어쩌고... 또 도망칠 이유만 찾는 꼬라지 지겹다 지겨워. 바위도 바위 나름이야. 등신아.”
“그럼 어쩌자고, 너랑 똑같은 새끼 20명이 와도 못 이긴다니까.”
“너 말투대로 말해볼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어쩌고 저쩌고... 크큭, 병~신.”
“야야! 둘 다 싸우진 말고!”
“말리지 말라고. 야, 병신아 더 지껄여봐. 저 도마뱀 마력이 그렇게 많아?”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더니, 이재홍은 머잖아 자이키릭에게 찢겨 죽을 운명임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동료이니 죽는 건 보기 거북했다. 납득할만한 대상을 갖다 붙이면 저 똥고집을 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의 우매함을 깨우쳐주고 싶었다.
“내 스승과 동격이야. 됐냐?”
“그런 말 알아? 제일 무서운 새끼는 책을 아예 안 본 놈이 아니라 한 권만 본 놈이라고. 마력이 많든 적든 그게 어쨌다고. 넌 그것밖에 못 보잖아.”
이재홍은 전혀 움츠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털 수북해진 짐승이 되어 내게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었다.
크르륵!
눈 깜짝할 새에 늑대 형상으로 변신하곤 발톱 끝을 내 얼굴에 들이민다. 그리곤 한층 낮아지고 울리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 초기보다는 훨씬 늠름해진 모습에 설득력이 조금은 달라졌다.
[생명력이 다 꺼져가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저 도마뱀 새끼 툭 치면 뒈져.]
“...근데 윤상아. 나도 얼핏 느끼긴 했어. 기(?)가 많이 약해져 있다는 걸.”
김철수의 맞장구가 이어진다.
그에 침묵을 고수했다.
“......”
[마왕군 물리칠 생각은 있냐?]
“...없을 리가 없잖아.”
[그럼 마법진이나 만들어 시발아. 시원하게 마법 한 방 후려갈기고 싸우면 되잖아.]
내가 마력을 느낄 수 있다면 주술 용사와 검술 용사는 주술의 근간인 생명력, 오러의 근간인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마나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 생각을 부숴준 게 이재홍이었다.
생명력이나 기가 약해졌다면... 확실히 드래곤 로드여도 쓰러트릴 수 있다.
[흐으음... 재밌는 병아리들이구나.]
우리 언쟁에 흥미가 생겼는지 자이키릭도 하품을 멈추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재홍이 그를 보며 이죽거렸다.
[닥쳐 파충류 새끼야. 이렇게 큰 병아리 본 적도 없잖아.]
[크하하...! 네놈보다 더 큰 병아리도 많이 봤단다 애송아.]
기다란 목에 달린 얼굴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살짝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덤벼들 테냐?]
[어, 내가 직접 목덜미 물어뜯어 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포부는 좋군. 허나 그냥 죽이진 못할 게다. 목숨 따위 포기하면 네놈들을 궤멸 상태로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지.]
일행은 각자 무기를 고쳐잡고 용의 행동에 주목했다.
저 말의 뜻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걸까, 다 죽어간다지만 상대는 로드 드래곤. 적잖이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주마!]
그 각오가 뜻밖의 말에 무너졌다. 우리는 다 같이 귀를 의심했다.
무얼 준다고, 설마?
자이키릭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 심장을 그쪽 마법 쓰는 병아리에게 주마! 대신 네놈은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한다.]
“조건이라고?”
[그래, 그 조건은]
1시간 남짓,
내 손에는 자이키릭의 차갑고 새하얀 심장이 들려 있었다.
자이키릭의 몸은 불에 휩싸여 뼈만 남은 상태였다.
*
“왜 도발하는 거지?”
최세린의 의문이었다.
정윤상은 트래쉬 토크로 마티고스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 오빠가 자이키릭의 심장을 얻은 과정은 굉장히 평화로웠어. 근데 지금은 자기가 자이키릭을 죽인 것처럼 행동하잖아. 너는 들은 거 없어?”
“네, 저 아티팩트에 대해선 그냥 용사 시절 얻었던 물건이라고만...”
“답답하게 구네. 나도 그 조건은 못 들었단 말이야.”
“조건이요?”
“아, 너한테 한 말 아니야. 흘려 들어.”
정윤상이 마티고스를 압도하고 있긴 하지만, 죽일 생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기 다루듯 가지고 논다. 누군가의 눈에는 악취미로 보일 것이다.
마티고스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감히 나 설산의 고룡을 상대로 수를 무른다는 것이냐?!]
“설산의 고룡은 너 아빠였지.”
[그 이명은 당연히 내 것이다! 우리 고귀한 용족의 마법을 따라 쓰는 아류 주제에 건방떨지 마라!]
“그 아류한테 짓밟히는 기분은 어때?”
[...크아아아아!!!]
화아악!
마티고스의 괴성에 맞춰 눈보라가 더욱 거세진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진주가 흙에 파묻혀있는 꼴이다! 아버지의 심장은 네놈이 가지고 있어도 될 게 아니다!]
“내 물건을 왜 너한테 줘야 하냐고...”
[천한 인간 놈! 네깟 놈이 감히 물건이라 불러도 될 게 아니다!!]
“그래, 잔뜩 화난 건 잘 알겠어.”
이 귀 아프고 손 시려운 대화를 그만 끝내고 싶었기에 내 손에는 거대한 하늘색 마법진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 마법진을 하늘에 향했다. 그곳에서 나온 시퍼런 빛이 하늘을 뒤덮은 건 한순간이었고, 머잖아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멎는다.
“{ βαρ χινι 폭설 }”
콰과과과!
마티고스를 덮친 눈더미는 예쁘다고 봐줄 게 아니었다.
눈사태 같은 자연 재해가 마티고스를 뒤덮었다.
[끄아아아아!!]
'비명 하고는...'
드래곤의 몸은 건물 뺨치게 거대하지만 이 마법보다는 아니다. 마티고스는 얼굴만 빼꼼 내놓고 눈에 온몸이 가둬졌다.
그곳으로 다가가 그의 까슬까슬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후... 이제 당신 아빠 유언 들려줄게.”
[...분하다. 분해! 아버지의 심장을 찾기 위해 인간들과 화합했다. 이렇게 죽게 되다니, 분하다... 분하다...!!]
“죽일 생각 없으니까 김칫국 그만 마시고, 귀나 똑바로 열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원망하는 마티고스, 그의 턱을 잡아당겨 귀에 입을 가져갔다.
“미안했다. 라고 전해 달래.”
[......]
“거짓말 아니야. 그리고 자이키릭은 원래 수명이 간당간당했어. 당신한테 유언 전해주는 조건으로 나한테 심장 넘긴 거니까 너무 덤벼들면 곤란해.”
“...아버지가 나한테 사과를......”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티고스를 뒤덮은 눈은 녹아들었고, 마티고스도 찬란한 백발의 훤칠한 남성이 되어 있었다.
“당신이 인간이랑 계약 뭐시기 하는 것도 이 자이키릭 심장 때문이었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눈치껏.
화이트 드래곤이 재화 따위에 눈이 돌아갈 종족들은 아니니까.
“아비의 심장은 아들한테 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내게는 할 일이 남아 있어. 그러니 심장에 걸고 언약 하나 할게. 내가 죽을 때쯤 당신한테 자이키릭의 심장을 넘기겠어. 용족한테는 100년도 눈 깜짝할 새잖아? 그러니 그전까지 날 방해하지 마.”
“...약속하마. 아버지... 아버지...”
“이제 당신이 인간을 따를 이유는 없는 거지? 보고도 하지 말아줘. 이 아이는 진짜 평화를 위해서 데려온 거니까.”
“...알겠다.”
코를 먹은 채 짧은 한숨을 뱉고는 마티고스는 다시 용으로 변신하여 커다란 날개로 하늘에 비상했다.
[나는 얼음 계곡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좋네, 응원할게.”
[...고맙다.]
머잖아 얼음 계곡 쪽으로 떠나간다. 그의 주변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강했으니까 100년도 채 안 걸려서 드래곤 로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마티고스 건은 해결이지만, 북대륙을 설득한 건 아니다.
이곳에서는 태양이 당연히 뜨겁듯이 악마는 당연히 죽여야 할 존재다.
그리고 이곳의 주 정치 층은 늙은이들이다.
생각이 이미 굳었다. 그들은 내 설득을 고사하고 이 아이를 죽이려 들 것이다.
피신처가 필요했다. 어디가 좋을까... 마탑은 안 된다. 내 제자들도 믿을 게 못 된다.
그나마 믿음직한 제자는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내 팔을 당기며 입을 열었다.
“마탑주님!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죠? 악마잖아요!”
“지금 설명하기에는 조금 복잡하니까 잠시만... 일단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해. 되짚어보니 너무 요란하게 싸웠어. '그놈'들이 출동하면 곤란해진다고.”
“오빠, 차원석 남아 있지?”
“딱 하나 있어. 빨리 너도 어디로 갈지 생각해놔, 시간 없으니까."
한적한 곳... 인간이 없는 곳... 또 일반인이 찾아오지 못할 곳...
암두시아스를 숨기기 좋은 조건을 나열하자 생각이 좁혀지는 곳은 두 개였다.
하나는 내 스승이 있는 곳.
자연스레 이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는 누군가와 같이 살 성품이 못 된다.
소거법으로 다른 한 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곳의 주민은 악마를 배척하지도 않는다. 어느 누구보다 순수한 존재들이다.
그곳은 비이린.
정령과 요정, 엘프처럼 고귀한 녀석들로만 가득한 평화의 숲.
다 좋다, 다 좋은데... 두 명의 존재가 굉장히 거슬렸다.
그 때문에 입밖으로 내기 꺼리고 있었는데, 최세린이 선수쳤다.
“오빠, 재홍 오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놈이랑 하나 더.”
“요정족 공주님?”
“으, 으으으!!”
최세린의 무신경한 말에 트라우마가 깨어난다.
디안이 내게 착 달라붙어 괜찮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우, 우선 움직이자.”
“마탑주님? 괜찮으신가요?”
“어, 어어... 아마도 괜찮아.”
현기증을 느끼며 딱 하나 남은 차원석을 손에 쥐었고 지팡이를 움직여 차원문을 열었다.
목적지는 동대륙의 비이린, 차원문 너머의 풍경은 녹빛 가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