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화이트 드래곤
* * *
“어떻게 구한 거야?”
메이블 일지 얘기다. 최세린은 ‘이 정도야 쉽지.’라고 말하는 듯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지하실에서 박 터지게 싸웠다며. 그동안 좀 열심히 움직였지.”
마왕성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쓸만한 문서를 솎아내고 내가 메이블과 브룩을 묶어두고 있는 동안 암두시아스까지 데리고 도망쳤다.
그 암두시아스는 사천왕이자 군단장, 귀검사 토텔리 프리온과 있었던 아이였다.
“뭐, 뭐? 귀검사랑 있는 애를 무슨 수로 납치한 건데?”
“왜 이래, 나도 3년 동안 연구 좀 했어.”
그녀는 허벅지에 매달린 새로운 주머니의 내용물을 보여줬다.
카레 색깔의 독가루, 무취였다.
“마비독. 수면독보다 다섯 배는 강력한 거야. 대신 효과는 짧지만.”
“그걸 토텔리에게 먹였다는 거야?”
“칼로 허벅지를 찢어내고 거기에 쑤셔 박았어. 있는 힘껏 찌르니까 잔상처가 생기긴 하더라. 그리곤 털썩 주저앉던데?”
그다음은 최세린의 독무대다.
도망에 있어서 그녀를 따라올 자는 긴 말고는 없다.
하지만 암두시아스를 데려온 건 실수였다. 그녀는 마왕 후보다.
그 철두철미한 메이블이 위치추적 마도구 같은 걸 무조건 붙여뒀을 것이다.
“당연히 있었지. 옷자락 안쪽에 말이야. 단검으로 찢어내니까 툭 떨어지던데 어찌나 우습던지. 그거 주변에 보이는 몬스터에 꽂아서 저 멀리 보내버렸어. 지금쯤 추격조는 당황하고 있겠지. 그 몬스터는 드래곤 레어로 가고 있었거든.”
그 드래곤은 마왕군도 싫어한다.
강제로 폭설을 만든 지랄 맞은 화이트 드래곤 로드.
“...자이키릭.”
“맞아, 이 시점이면 죽기 전이니까.”
내 모든 추궁을 비껴가는 실로 완벽한 일처리였다.
자이키릭의 레어로 암두시아스가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가면 마왕군도 암두시아스를 포기할 것이다.
암두시아스를 구하려면 드래곤 로드를 죽이거나, 마왕군 전력이 박살나거나 둘 중 하나다.
심지어 드래곤을 죽였다고 한들 암두시아스가 살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니 마왕군은 암두시아스를 포기할 것이고, 우리는 이 아이를 현세로 데려갈 수 있다.
...까지가 최세린의 주장.
“그래도 현세로 데려가는 건 안돼.”
“왜!!”
“금기 마법에도 조건은 있어. 누구를 죽이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거 기억 나지?”
“영향력 어쩌구 얘기 아니야?”
“맞아.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 심지어 마왕 후보를 현세로 데려가자니, 그 영향력은 누가 책임질 건데? 너라고 한들 몸 터져서 죽어버려. 이 암두시아스가 살아갈 3년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말고도 문제는 하나 더 있다.
“더 큰 문제는, 한 시기에 2명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발각돼서는 안 된다고. 내가 철처히 정체를 숨기라고 한 것도 그 이유야. 만약 붙잡혔다가 이 시대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알아챘다면 세계는 뒤틀려. 사실 이 시기로 온 것만으로도 미친 도박이었어.”
“꼬드긴 건 오빠야.”
“넘어간 건 너야.”
과거의 암두시아스가 현세에 살아있다면, 그 시대의 암두시아스는 두 명이 되어버린다.
우리야 정체를 안 들킬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성공했으니 괜찮다.
하지만 암두시아스는 다르다.
현세의 암두시아스가 과거의 암두시아스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그 후폭풍은 어찌 될지 모른다.
이 모든 부작용 경우의 수를 모두 포함한 게 타임 패러독스다.
“얘 하나 때문에 세계가 흔들려. 그건 누가 감당하지?”
“감당할 필요 없어.”
“뭐라고? 야, 최세린. 우리가 왜 마왕군을 부쉈는데? 평화 위해서잖아. 우리가 세계를 구했으니까 우리가 다시 부숴도 된다는 한심한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말이 아니야.”
최세린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우리 대화를 못 따라오는 암두시아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귀를 막으며 조용히 말했다.
“얘 곧 죽어, 내가 알아. 1년도 안 걸려. 그 사이에 큰 사건에 연류된 적도 없어. 보증할게.”
“......설마 그 악마가 얘야?”
“맞아. 이제 상관없는 거지?”
*
이게 잘한 짓인가 싶다.
“미쳤지... 내가 미쳤어...”
자책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암두시아스는 현대로 데려왔고, 그녀는 초코볼을 먹고 있다.
마왕군을 쳐부수고 악마를 박살 낸 건 다름 아닌 나다.
그 악마를 현세에 다시 데려왔다니, 기분이 복잡하다.
만약 암두시아스의 정체가 들킨다면 퇴로도 없다.
시간 역행과 마찬가지로 0서클 마법으로 분류되는 악마 소환.
그 마법을 부린 게 아니냐며 누군가 몰아간다면 나는 마땅한 변명을 늘어놓지 못한다.
“골치 아파졌어...”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최세린의 팔자 좋은 소리가 거슬린다.
마기를 느끼는 것. 7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면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마법은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마나가 기반이다.
그리고 룬어는 원래 드래곤의 언어다.
인간의 심장과 드래곤의 심장이 포용할 수 있는 마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인간의 마법은 결국 드래곤의 것을 따라했을 뿐이다.
인간보다 드래곤의 마법이 훨씬 고등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제자들 보다도 그들의 기술이 앞선다.
나조차도 전송자라는 이점이 없었더라면 저 눈앞의 드래곤에게 한입거리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마왕성을 나서자 주피아에 있던 화이트 드래곤이 몬스터를 싹 죽여놓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눈 가득한 지역이지만 사방이 붉었다.
그의 새하얀 손과 송곳니도 마찬가지로 붉었다.
피비린내는 폭설에 묻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붉은 손끝으로 암두시아스를 가리켰다.
“시간 역행으로도 모자라 악마 소환까지... 대단하십니다. 정말.”
“마, 마탑주님...?”
그의 옆에는 디안까지 있었다.
그녀도 악마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눈밭에 몸을 뉘었다.
“설명해보시죠.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는 말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그에 몰아세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죽여놨어야 했나.’
암두시아스의 존재는 눈치챘으리라 예상했는데, 시간 역행 마법까지 들키는 건 상정 외였다.
최악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세계를 구했든 뭐든 입장이 난처해진다.
그러니 저 도마뱀을 어떻게든 족쳐서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목격자가 없으면 범죄가 아니지.’
이 상황에 이런 어구가 떠오른 건 무슨 장난일까.
용사인 주제에 떠올릴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저 방법이 차선책이라는 걸 인정했다.
최선책은 당연히 아무도 죽지 않고 넘어가는 것.
나는 딱딱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쪽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 악마 아이 또한 평화를 위해 데려온 것뿐이니.”
“악마와 평화라는 상극의 두 단어가 어떻게 한 문장에 들어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만.”
“당신에게 설명해줄 의무가 있던가요?”
계속 맞불 지르듯 당당하고 뻔뻔하게 나섰다.
“의무가 없다니요. 북대륙에 불법 입국으로도 모자라 금기를 두 번이나 저지르셨습니다. 의무가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이 아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악마를 알아야 다음 마왕군에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 전력은 악마입니다. 마왕도 언제나 악마였지요. 그를 위한 아이입니다. 이쯤이면 의무를 다 한 건가요?”
“그 어린아이에게서 무얼 얻어낼 수 있다는 겁니까?”
“뭐든지요. 악마에 관한 모든 것.”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멋대로 내뱉었지만,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스스로도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생각인데 남들 귀에는 어떨까, 화이트 드래곤은 추궁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흠... 북대륙의 인간은 악마를 재앙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그 재앙을 다른 곳도 아닌 북대륙에서 키우시겠다는 겁니까?”
“키우는 게 아니라 관찰입니다. 꼭 북대륙일 필요도 없지요.”
“다른 곳도 악마를 꺼리기는 마찬가지일 텐데요. 가령 마법 용사님이 원래 사시던 서대륙으로 건너가려면 대충만 세어봐도 20개가 넘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이 아이를 지켜낼 자신이 있으십니까?”
“마법 용사와 암기 용사의 뜻입니다. 그 누가 감히 반기를 들까요. 건방지게.”
“저조차도 반기를 들고 있잖습니까?”
“그쪽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ONE(?)에 인간만 있는 건 아니지요.”
그는 천천히 암두시아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를 막아서는 최세린, 이번에는 질문의 화살촉을 내가 아닌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 아이를 제게 넘기시지요.”
“그럴 순 없겠는데요.”
최세린은 암두시아스를 꼬옥 끌어안으며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피곤해 보였다.
“좀 봐주시죠, 암기 용사님까지 이러기입니까... 저는 지금 왕의 뜻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두 용사님은 북대륙을 적으로 돌리시겠습니까?”
“저희는 욕심이 많아서 북대륙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이 아이의 안전도 모두 원해요. 그리고 거기서 더 다가오시면 저도 대응하겠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네요. 정말 욕심이 많으십니다.”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머잖아 폭설이 가라앉는다. 이건 놈도 화났다는 반증이다.
“...디안.”
“네, 네?”
드래곤 심장이 박힌 지팡이를 손에 꽉 쥐곤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마법진을 그렸다.
“암기 용사 옆으로 가서 지켜달라고 해.”
“아...”
“빨리.”
“네, 넵!”
화아아악!
언제 눈이 멎었냐는 듯 화이트 드래곤의 온몸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설원 지역 주피아는 그의 안방이나 다름없다. 눈과 뼈까지 얼어붙을 추위가 가득한 북대륙, 화이트 드래곤은 빙결 속성 마나를 다루는 종족이다.
“용사 두 명을 상대로 쉽사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끄득, 끄드득
그의 외형이 점차 변화된다. 아니,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다.
목이 길어지고 옷은 영험한 백색 비늘에 스며든다. 머리에 있던 작은 뿔은 늠름해지며 회색 빛깔이 되었다. 얼굴은 기다랗게 변한다. 탄력 넘치는 꼬리가 자라났고 바위도 부술 법한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 보인다.
그는 눈보라의 기세만큼이나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 땅의 뜻을 대변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이고... 그만두면 안 될까요? 좀 지쳤는데...”
놈은 완전한 용이 되었고, 얼굴을 바라보자니 너무 높기에 목이 아파온다.
암두시아스는 그의 방대한 마력을 느끼자 최세린 뒤에 몸을 숨겼고 디안도 그에게서 점차 벌어지며 방어막을 펼쳤다.
[내게 네놈의 편의를 봐줘야 할 의무가 있는가!?]
“미치겠네.”
이미 존재감이 남달랐다.
인간 중 저만한 마력을 지닌 자는 내 스승 말고는 모른다. 그 마력을 숨김 없이 터트리고 있으니 박력이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력은 적대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마나다.
‘아... 왠지 낯이 익더라니.’
손에 들린 지팡이가 놈의 마나에 요동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로드 자이키릭, 그리고 내 눈앞의 용은 자이키릭과 외형이 판박이다.
나는 지팡이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당신의 목적은 이 아이가 아니라 내 지팡이잖아요.”
[...그 지팡이를 어떻게 얻었느냐!]
“글쎄요... 자이키릭의 유언이라도 말해드릴까?”
...χιονοθελλα!
휘이이이이!!
그의 몸에 맴돌던 눈보라는 칼바람이 되어 나를 덮쳤다.
시야가 좁아진다. 온통 새하얀 배경만이 내 주위에는 가득했고 내 옷은 강풍에 휩쓸려 원형을 유지하지 못 한다.
“아비 얘기가 나오니까 정신을 못 차리시네? 너무 화낼 거 없어요. 그는 편안히 눈감았으니까.”
[아버지의 심장을 내놓아라!!]
천둥이 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설원에 울려 퍼졌다.
자이키릭 못지않게 저 녀석도 성격 한 번 화끈하네.
내 기억이 맞다면 놈의 이름은 마티(Μτι)고스. 눈이라는 뜻이다.
그는 척 보기에도 강했으나 로드급 드래곤 수준은 아니었다.
‘슬슬... 괜찮으려나?’
감지 마법의 반경을 넓히자 암두시아스를 데리고 도망치는 최세린과 디안이 느껴졌다.
이건 마티고스에게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내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티고스는 기세 좋게 소리쳤다.
[아버지의 심장으로 한다는 짓이 악마 계집 따위나 소환하는 것이냐?! 과거로 돌아가는 금기를 저지르는 것이냐?! 네놈 오른팔에 드리운 검은 반점은 흑마법의 일종이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더냐!]
“진정해 마티고스! 대화로 해결하자!”
[허튼소리! 내 오늘 기필코 네놈을 찢어 죽여 두개골에 술을 따라 마시리라!]
“...이 자식이 말이 심하네. 방금 건 권유가 아니라 경고야, 이 도마뱀 새끼야.”
치이이이익...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짙푸른 청색을 띤다. 그 지팡이의 끝을 마티고스에게 향했다.
“{ χιονοθελλα 눈보라 }”
휘이이이이!
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얼리고 베어버릴 듯한 칼바람이 내 주위에도 휘몰아쳤다.
그 칼바람은 마티고스의 것보다 당연히 훨씬 거대했다.
그 근거는 아주 명확하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지팡이에는.
“너 아빠 쩔더라.”
[이노오오옴!!!]
마티고스의 아비이자 화이트 드래곤 로드였던 자이키릭.
그의 심장이 박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