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시간 역행
* * *
“하아... 하아...”
오른팔이 화끈화끈하다. 손바닥은 제대로 움켜쥐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곳은 동굴이었다. 마왕성에서 쭉 북쪽으로 올라가면 있는 마왕군도 모르는 동굴.
이곳에 용사 시절 몸을 숨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참나, 이것도 추억팔이라고...’
위험했다.
메이블이 게임을 제안하지 않고 그냥 트럼프 카드를 마법진 삼아 마법 폭격을 때려 부었더라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무사히 도망친 건 아니었다.
내 팔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이건 마기다. 흑색 마나를 사용한 부작용.
흑마법 사용 금지를 마법사들이 불문율로 여기는 이유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용자의 몸에 부담을 준다는 것. 물론 8서클 대폭발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흑마법 관련 없이 내 몸에 부담이 오긴 하지만, 정도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자기 몸 자기가 해치겠다는데 무슨 상관일까? 결국 자기 하기 나름 아닌가.
흑마법이 기피 받는 가장 큰 이유이자 두 번째 이유는 그 마나 성질 자체에 있다.
다른 마법은 자연에서 얻은 마나를 토대로 사용된다.
그것은 마석일 수도 있고, 세계수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자연 발생한 마나를 심장에 담아두었다가 중요할 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인 마법의 기본 알고리즘이다.
그렇다면 흑마법이 그냥 마법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건 어떤 시스템일까?
이것은 주변 생물으로부터 마나를 필요한 만큼 쭉쭉 뺏어온다.
생명체라면 모두 마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모여 사는 동물이다.
어딜 가나 마나는 넘쳐난다는 것이다.
가령 전쟁 상황이라면 그때야말로 흑마법의 진가가 드러난다.
어쨌거나 검은 마나 자체가 민폐 끼치는 마나라는 거다.
마왕성 침입할 생각이 없었더라면 나도 손도 안 댔겠지.
그래도 덕분에 시그니처 마법도 쓰지 않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정체도 들키지 않았고.
덜그럭
늑대 가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오른팔에 날뛰는 마나를 잠재우고 있었다.
그때 동굴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알아차리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녀 딴에는 고의로 인기척을 내는 것이다.
“다쳤네? 으이구 인간아.”
나와는 달리 부상 따위 없는 최세린이 보였다.
그녀는 익살스러운 말투로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무슨 가루를 바르더니 붕대로 내 팔을 둘둘 감기 시작했다.
“새삼 느끼는 건데 너도 참 상냥해졌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끄러, 내 성격 원래 이랬어.”
“그렇다고 치자.”
서로 무사했기에 한시름 놓았다.
이번 시간 역행은 빨리 발각됐다는 걸 제외하면 나름 성공적이었다.
저 아이만 죽이면 말이다.
동굴 입구에서 쭈뼛거리는 아이.
머리에 달린 뿔로 보아 악마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나저나 쟤는 왜 데려온 건데?”
“...안녕하세요.”
“어, 안녕. 너는 나 초면이겠다.”
암두시아스, 이명은 일각공. 72 악마 중 67위.
그녀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
마계,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과도 같은 곳.
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그곳은 살만하다.
마계는 맨날 피의 축제가 펼쳐지고 그들은 간식 삼아 인간의 팔을 뜯어먹는다.
이런 소리는 모두 싸잡아서 개소리다.
그들은 아주 체계적으로 살아간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은 있지만, 그건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영주나 왕 등등의 존재에게 지배당하며 살고 있다.
이들도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다.
범죄자는 엄중히 처벌하지만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아무렇게나 잘 살아간다.
인간은 왕족이나 귀족이 떵떵거리고 살듯이, 악마도 마찬가지다.
태생적으로 격이 높은 악마는 72 악마로 불린다.
그 중 67위 암두시아스, 음악을 사랑하고 머리에는 기다란 뿔을 지닌 일각공.
그 일족은 언제나 마계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다.
딱히 현세로 호출되는 일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71위 악마이자 현세의 마왕 단탈리온. 그녀는 다음 마왕 후보를 정하기 위해 여럿 악마를 현세로 불러냈다. 암두시아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 당시 아직 젖도 떼지 못한 8대 암두시아스가 그녀였다.
그렇게 그녀는 현세에서 마왕 후보로 불렸다.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마왕군은 불러낸 악마를 마왕으로 키워내기 위해 온갖 해괴한 실험을 그들에게 퍼부었다.
피부나 뿔 조직을 일부러 망가트리곤 자연 치유력의 향상을 위한 실험이라고 말했다.
방에 가두어 밴시를 보내 온갖 흑마법을 퍼부어놓곤 항마력을 기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호화로운 식사를 제외하곤 이들은 노예만도 못한 취급이었다.
그런 끔찍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암두시아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사천왕 중 두 명이 자리를 비웠고, 그녀의 감시를 맡던 몬스터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
경계병은... 그동안 갈고 닦은 마법으로 어떻게든 쓰러트리면 그만이다.
암두시아스는 이 지독한 마왕성에서 탈출하기를 원했고, 그날은 유일한 기회였다.
곧바로 실행했다. 몇 번 아찔한 순간은 있었지만, 어떻게든 마왕성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간 사회를 전혀 몰랐다. 악마가 인간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 방도가 없었고, 어딜 가든 마왕성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었다. 처음 도착한 인간 마을에서 받은 시선을 그녀는 잊을 수 없다.
“악마다! 죽여! 죽여라!!”
총탄을 쏘고 장검을 든 채 달려들어 암두시아스의 온몸에 상처를 낸다.
죄송하다고 말해봤지만 이들은 듣기를 거부했다. 마왕이 악마다. 악마는 다 죽일 놈들이다. 어린아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암두시아스는 인간에게 죽일 악마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인간 비스름한 외형에서 일각수 본연의 형태로 변환해 다리가 부러져라 도망쳤다.
숨이 가빠오지만 고를 여유 따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흙바닥에 얼굴을 박았지만 털어낼 여유 따위 없었다. 살아야 한다. 이 생각만이 전부였다.
“......”
그녀를 마주친 건 그때였다.
“...유니콘도 있어? 아니, 악마구나.”
악마를 보고도 두려움 따위 내비치지 않는 여성이 눈길을 파헤치며 암두시아스에게 다가왔다.
흠칫 몸을 떨곤 네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달아났지만 그녀는 날렵했다.
따라잡히는 시간은 초 단위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목덜미가 붙잡혀 허공에 낑낑거렸다. 몸부림쳐봤지만 악력이 차원이 달랐다.
“{ Ελευθρωση 방출! }”
마기를 터트려 위협을 가했지만서도 그녀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만히 있어.”
꽈아악. 손아귀에 힘을 더 주기 시작하자 목덜미 가죽이 아리다.
다리도 아프다. 돌 맞은 이마는 더 아팠다. 그보다 괴로운 건 복받치는 감정이었다.
무얼 잘못했을까, 마계에서 현세로 넘어온 것부터가 잘못이라면 어디에 용서를 구해야 할까.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암두시아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무표정의 여성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아, 아니... 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천천히 바닥에 내리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진녹색 액체가 출렁였다.
그걸 손바닥에 문지르곤 암두시아스의 뿔과 겉으로 난 상처에 처발랐다.
그에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엄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죽겠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죽음을 받아들이자 놀랍게도 정신이 편해졌다. 묘한 쾌감마저도 온다.
홀가분함?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암두시아스는 몸 떨기를 멈추고 천천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제야 이 지옥에서 벗어난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좋아, 끝.”
......?
몸이 편해졌다. 죽는다는 감각의 그것이 아니었다.
활기가 샘솟는다. 피로했던 다리가 상쾌해졌고, 쓰라리던 뿔이 더는 아프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여성을 바라봤다. 그녀는 주섬주섬 망토 안에서 온갖 약재를 늘어놓고 있었다.
“...저한테 뭘 한 거예요?”
“상처에 약 바른 건데?”
여성은 빙긋 웃었다.
무표정을 일관하던 이와 동일인물로는 생각되지 않는 따스한 미소였다.
“덤벼들지 않는 걸 보면 마왕군은 아닌 것 같고... 너는 어디에서 왔니?”
“...어...”
“말하기 싫으면 말고. 마계에서 잘못 건너왔거나 했겠지. 이 상처는 주피아에서 당한 상처지? 그 사람들은 악마라면 치를 떠니까 뻔하다.”
“...어어......”
“실어증? 아니지, 방금은 분명 살려달라고 말했었는데...”
“말... 할 줄 알아요...”
“그럼 이름은... 아니다. 일단 도망치자. 주피아에서 보낸 추격조가 다가오고 있어. 움직일 수 있겠어?”
“네, 움직일 수 있”
풀썩
긴장이 풀리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더미에 몸을 박자 기다란 뿔 자국이 그대로 새겨졌다.
“어라?”
“말 안 해도 알겠다. 많이 다쳤구나?”
여성은 암두시아스를 꼭 끌어안으며 눈더미 사이를 가로질렀다.
*
“이름이 뭐라고?”
“암두시아스(Amdusias)...”
“나는 진 키아라라고 해. 반가워.”
진 키아라... 진 키아라...
그녀와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는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왕성만 못하지만 모닥불은 따뜻했다. 요리장이 만드는 식사만 못하지만 스프는 푸근했다.
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대접이었다. 마왕성에서는 모두가 그녀에게 깍듯이 행동한다지만 존대와 존중의 의미는 다르다.
암두시아스는 마왕 후보라는 이유로 일반 병사보다는 직위가 높았지만 그녀에게 자유라고는 없었다. 지금도 마왕성으로 돌아간다면 마왕이 되기 위한 실험과 교육, 그것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 교육에서 들었던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진 키아라.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암두시아스의 담당 교육관이 용사 4명의 이름은 반드시 외워둬야 한다며 수없이 강조했었던 까닭이다.
암기 용사 진 키아라.
다른 3명의 용사가 마법, 검술, 주술로 적진을 쑥대밭을 만들고 있을 때 키아라는 적진의 후미로 숨어들어 지휘자의 목을 취하는 비겁한 용사이니 다른 세 용사보다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어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키아라가 눈앞에 있었다.
정갈한 흑빛 단발머리, 망토 속에 수없이 많은 암기, 재빠르면서도 눈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보법까지.
이 모든 증거가 이 여성이 암기 용사라는 걸 가리키고 있다.
그걸 알아차렸지만 암두시아스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진 키아라? 키아라는 나쁜 사람이야?”
진 키아라에게는 무섭다는 감정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나쁜 사람의 기준이 뭔데?”
“그... 마왕군을 해치운다든가... 누군가에게 친절히 대한다든가...”
“...그럼 좋은 사람은 뭔데?”
“누구를 다치게 하거나, 죽인다거나...”
수없이 들었던 내용.
마왕군은 선이며, 용사는 악이다.
본인 입으로 뱉으면서도 의아했지만 이게 암두시아스가 유일하게 아는 선과 악이었다.
“반대로 말하고 있네. 평화를 해치는 마왕군을 부수는 건 정의롭고 좋은 사람이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좋은 사람이고.”
“...다치게 하는 건?”
“당연히 나쁜 사람이지. 그리고 사람을 죽여? 누군가에게 피해 입히는 거 자체가 나쁜 사람이야. 죽인다는 건 더 말 할 가치도 없지. 그동안 암두시아스 너는 잘못 알고 있었어. 스스로 느끼잖아?”
마왕군이 악이고, 용사가 선이라는 걸.
이 말이 목 너머까지 올라왔지만 진 키아라는 겨우 말을 삼켰다.
이 아이가 마왕군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 마왕성에서 도망쳤다는 걸 말이다.
애초에 주피아에서 몰매를 맞기 전에도 그녀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인간에게 덤벼들 생각조차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암두시아스의 뒤에 따라붙었었다.
마침 할 것도 없었고.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이야?”
“누구 죽여보거나 괴롭혀본 적 있어?”
“...아니.”
“그럼 착한 사람...이라기에는 좋은 일도 안 했네. 백지 상태야 너는. 보통 사람.”
“...응. 보통 사람.”
암두시아스는 고개를 떨궜고 진 키아라는 그녀의 머리를 뿔을 피해서 쓰다듬곤 빵 하나를 건넸다.
조금 눅눅해진 빵이지만 스프에 찍어 먹으면 먹을만하다. 그 방법을 알려주며 모닥불에 장작을 던졌다.
“이게 빵... 맛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빵을 묵묵히 먹는다.
딸꾹질이 들려왔지만 모르는 척 딴청 피웠다.
*
“그게 데려온 이유랑 무슨 상관인데?”
“굉장히 착한 아이라고. 빵을 먹고 울었다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암두시아스가 마왕성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악마다.
지금은 바닥의 돌멩이들로 저 혼자서 노는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나중에는 단탈리온처럼 마왕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마왕 후보 아닌가?
언쟁의 종착지는 암두시아스를 현세로 데려가냐, 마냐가 아니다.
정체를 들켰으니 죽이냐, 입을 막아서 돌려보내냐. 이 두 개이다.
“뭐, 뭐? 죽이자고?”
“얘가 메이블이나 마왕한테 우리 정체 말하면 어떻게 수습할래.”
“얘는 애야! 완전 어린애라고!”
“어린애는 입이 없어? 생각해봐. 우리 정체가 마왕군에게 들켰을 때의 영향력이 클까, 수많은 마왕 후보 중 하나가 돌연사한 게 영향력이 클까.”
“...죽이는 건 안돼.”
“너 얘한테 뭐 받았냐?”
이미 마왕성의 경계는 삼엄해졌을 테니 다시 침입하는 건 무리다.
소득이 그닥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다음을 기약하며 후퇴할 때였다.
그때 부외자를 데려왔다.
암두시아스, 최세린을 밀치고 한 손에 마법진을 머금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목에 차가운 철이 느껴진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힘주겠다는 무언의 압박도 말이다.
“치워.”
“오빠야말로 치워. 얘 죽일 이유 없어.”
“얘를 살리고 싶었으면 정체를 밝히지 말았어야지.”
“...데려가면 되잖아.”
“현세로? 장난하냐?”
철컹
그녀는 단검을 거뒀고 대신 품속에 있는 서류 더미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
“내 성의. 마왕성에서 얘만 데려온 거 아니야.”
“...세상에.”
별로 성과가 없어 살짝 입안이 쓰렸는데, 최세린이 예쁜 짓 하나 했다.
서류 더미는 메이블의 일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