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시간 역행
* * *
메이블의 시그니처 마법의 정체는 내가 알고 있다.
저따위 마법은 아직도 간 보기에 불과하다.
자, 이제 어떡할까?
아직도 방심하고 있는 놈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도망칠까, 아니면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까.
“참모장님! 괜찮으십니까?”
“자네가 왜 여길 왔나?”
“침입자와 참모장님이 전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세하러 왔습니다!”
아뿔싸.
그때 천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두 놈의 얼굴이 보인다.
참모장의 충성스러운 부하 알로켄, 저 사자 같은 놈이 이곳에 등장했다.
하지만 저놈은 내 걱정 거리가 아니였다. 문제는 그 옆에 있는 녀석이다.
브룩. 식당에서 폭식하여 배가 불룩 튀어나온 채였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으며 거하게 하품을 내뱉었다.
메이블이 호통친 건 그때였다.
“알로켄, 허튼짓 말고 돌아가있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손에 날카로운 창을 들고 메이블에 앞을 가로막아 마기를 가득 내뿜으며 나를 위협하는 알로켄.
분명 기세는 좋았으나 방금까지 메이블을 상대하고 있었으니 김이 샜다.
녀석은 분명 강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몸풀기도 안 된다.
“저 사내는 자네가 상대할 만큼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메이블도 그를 알고 있었다. 그에 맞장구 쳐줬다.
마침 좋은 생각도 났다. 이건... 어쩌면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다.
“그 말이 맞아. 제대로 봤어 참모장님.”
덥석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알로켄의 멱살을 붙잡고 몸부림치지 못할 정도로만 몸을 얼리자 천하의 메이블과 그 태평하던 브룩조차도 내 재빠른 몸놀림에 당황했다는 걸 동공이 말해줬다.
그간 열심히 해온 보람이 있었다.
사천왕 두 명이 감탄할 정도면 나도 3년 전에 비해 많이 성장했다는 걸 확신했다.
“{ Ενσχυση του σματο 신체 강화 (υα,ε) }”
이건 신체 강화로 몸을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낸 결과다. 내 몸에는 검은 냉기가 피어오른다.
그 냉기는 심장에 중점적으로 모여 있었다.
거리를 벌렸다. 알로켄을 붙들고 저 멀리로 떨어지며 벽을 등지고 메이블과 브룩과 대치했다.
이건 쇼였다.
내가 지금부터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하겠다는 쇼.
메이블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주먹을 꽉쥐고 흑염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다.
“인질을 잡다니, 비겁한 짓을 하는군.”
“마왕군이 비겁을 운운할 줄은 몰랐네. 이건 네놈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인질극이잖아.”
“알로켄! 괜찮은가?”
“저는 괜찮습 으아아악!!”
“알로켄!!”
알로켄은 몸부림쳤지만, 내 얼음을 깨부수기에 완력도, 마력도 부족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칼을 뒤로 젖히며 메이블에게 말했다.
“순순히 내 질문에 답한다면 내 심장에 맹세하고 이 녀석을 사지 멀쩡히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할게. 내 말 이해했지? 심장에 맹세한다고. 근데 내게 위협을 가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녀석을 죽여버릴 거다. 여기까지가 언약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심장에 직접 마법진을 걸고 맹세한다는 필살기나 다름없다.
이 행위 이후 내 행동에는 한치의 가식도, 거짓도 없다. 언약을 파기하면 심장에 건 마법진이 폭주해 심장을 부수기 때문이다.
심장은 마나를 담아두는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다. 마법사에게는 생명줄 그 이상의 의미가 걸려 있다.
메이블도 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법진을 거두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마. 역산하려는 짓거리도 멈추고.”
“......”
“광포 드루이드도 아무 데에나 가 있어. 여기서 으르렁거리지 말라고.”
“나는 그 녀석 죽어도 상관없는데?”
“...마왕군 동료애 수준 떨어지네 진짜.”
브룩이야 알로켄이랑 둘이 견원지간이라는 게 문뜩 떠오른다. 그는 알로켄 구출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메이블은 심장을 건 언약으로 몸을 묶어뒀다.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잔챙이들은 관심 없다.
사천왕 두 명을 묶고 있었는데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알로켄의 지극한 충성심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거 놓아라 인간 놈! 참모장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같이 죽여버리십시오!!”
“좋은 생각이네. 저 녀석이 웬일로 기특한 말을 했어.”
“입 닥쳐 브룩, 너도 마찬가지다. 헛소리 뱉으려거든 입 다물어라.”
“지금 이 자를 놓아주면 분명 마왕군에 위협이 될 겁니다! 지금 해치워둬야 합니다!!”
“시끄러워, 너 상관이 괜찮다잖아.”
꽈아악
기다란 머리칼을 홱 잡아당겨 놈의 눈과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안(??)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기력을 빼앗는 종류의 마안.
그 때문에 우리를 상대할 때에는 머리칼을 답답하리만큼 내리깔았던 게 아닐까? 약했던 시절에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끄아악!”
“앙탈 부리지 마라.”
뭐가 됐든 알로켄에게는 개인적인 원한도 좀 있으니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끌며 지독하게 괴롭혔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비명을 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놈은 나를 죽일 듯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눈싸움만 피하면 별 영향력은 없었다.
그때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곳에는 뿌득뿌득 이를 가는 메이블이 있었다.
“...그만하길 권하지.”
“아이고, 실수.”
더 알로켄을 농락했다가는 질문이고 뭐고 메이블 손에 죽을 것 같다.
슬슬 놀이는 그만둘 때가 왔다.
“자,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다. 주도권은 이쪽에 있는 것 잊지 말라고.”
“그전에 나도 조건을 걸어야겠다. 모든 질문에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지. 그리고 주도권이 그쪽에 있다? 그런 헛소리가 없군. 이곳은 마왕성이고 너는 포위된 상태다. 나와 광포의 드루이드에게서는 비겁한 수단으로 겨우 도망친다한들 그 밖에는 내 부하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거다. 심지어 다른 사천왕 둘을 마주하면 어쩔 생각이지?”
메이블은 인질이 잡혔음에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내게 항의했다.
그는 내 말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곳은 어쨌거나 마왕성이고, 나는 한 마리의 미꾸라지일 뿐이다.
알로켄의 신변을 포기하면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거다.
그건 두고 봐야겠지만.
“시끄러워, 대답이나 해.”
“아니, 조건은 걸어야 한다. 그쪽 장단에 언제까지나 놀아날 수는 없지.”
“얘 죽는다?”
“내 부관을 죽이면 그대도 죽는다는 걸 모르는가?”
협박이 안 통한다. 어느새 격양된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도저히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인다. 그제야 협박의 정도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알았어, 조건이라는 게 뭔데?”
“질문은 세 개만 받겠다. 그 질문 중 내 임의로 한 가지의 질문에만 대답하도록 하지.”
“웃기고 자빠졌네, 질문 한 개만도 못한 거잖아.”
“당연한 거 아닌가? 그대는 개인이고 마왕군은 거대한 집단이다. 내 부관은 자기 목숨값으로 마왕군의 정보를 지킬 수 있다면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할 녀석이라는 걸 그대가 알려나 모르겠군.”
제길.
여기서 헛소리 집어치라는 둥 덤벼들면 메이블은 진심으로 부관을 포함해 나까지 죽일 생각이다. 그의 뒤에 일렁이는 직사각형의 실루엣이 그 증거였다. 그는 시그니처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맞대응할까? 아니, 그건 어렵다.
내 시그니처는 사전 준비 동작이 너무 크다.
주인공 파워 업을 기다려주는 건 만화에서나 나올 일이다.
여기선 메이블의 기세에 물러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나겠다는 건 아니다.
시간 역행은 금기라고 칭해지는 0서클 마법이다.
한 번이야 괜찮겠지만 다음에도 또 사용했다간 실력 있는 마법사가 내 마법을 눈치챌 것이다.
그 마법사 중에는 내 스승도 포함이다. 어쩌면... 드래곤조차도 날 죽이겠다고 나설 수 있다.
금기 마법 자체가 세계의 불문율을 어기는 행위이니까.
그건 용사라고 용서받을 성질의 마법이 아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을 이유는 없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가야 한다.
나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조건을 걸어야 할 때였다.
물론 메이블이 납득할 수 있을 수준으로.
“...하아. 알았어. 그럼 나도 조건. 질문의 대답에는 심장을 걸고 성실히 대답할 것.”
“약속하지.”
“그리고 또 하나. 세 개의 질문이 아니라 두 개의 질문만 하겠어. 대신 그에 대한 답은 모두 할 것. 다만 거짓 대답을 하나 섞어도 좋다. 여기까지가 내 조건이야.”
“이상한 조건이군?”
“너한테도 득이잖아? 네가 말한 정보 판별은 내 몫이야. 어쩌면 진실조차 외면하고 혼자서 삽질할 수도 있을 테니. 어때, 받아들이겠어?”
“...그러지.”
“참모장님!”
“조용히 해라, 알로켄.”
“어휴, 저 등신 때문에 마왕군 정보 다 털리네. 곧 망하는 거 아닌가 몰라.”
“브룩, 분명히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치이이익...
브룩에게 눈총을 쏘아준 후에 메이블도 마법진을 가슴팍에 가동했고 그는 언약했다.
“그대의 두 개의 질문에 모두 성실히 답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대답에는 거짓을 하나 섞을 ‘수도’ 있다.”
“좋아, 첫 번째 질문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지하실을 가득 메우는 마왕군의 기척이 느껴진다.
최세린이 오면 이곳에서 곧바로 탈출해야 한다.
아까부터 마이크를 켜고 얘기하고 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도 나름대로 바쁜 게 틀림없다.
여유가 없어지면 본능에 가까워지는 걸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 노골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머릿속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마왕군은 어째서 용사를 살려두는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