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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0화 (10/152)

〈 10화 〉 시간 역행

* * *

환한 빛이 사그라들었고 시간이 확실히 되돌아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감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 더럽고 구역질 나던 지하실이 아주 멀끔해졌다는 게 그 증거였다. 마계와 연결되어있는 거대한, 스산한 기운 물씬 풍기는 차원문도 아주 무사히 가동하고 있었다. 바닥에 그렸던 마법진이 다른 형태로 바뀐 것도 증거였다.

최세린은 손가락으로 네 방향을 가리켰다.

“저 몬스터라 그나마 다행인가? 조용히 처리할 수 있잖아.”

“그건 맞지.”

지하실은 아주 고요했다. 그 고요함 덕분에 긴장감이 배로 뛴다.

시선을 돌리니 가고일 네 마리가 석상인 마냥 조용히 지하실 각 방향을 메우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등을 돌리면 놈들은 서서히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고 죽치고 있는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나와 최세린이 무언가 놈들의 심기를 뒤틀리는 짓을 하면 그때도 몸을 움직일 것이다.

그럼 어쩔까?

“선빵필승!”

시커먼 마나를 머금은 지팡이를 휘둘러 내게 가까운 두 가고일을 후려치자 맞은 부위부터 천천히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최세린도 넋 놓고 있지 않았다. 그녀도 가고일의 관절 부분을 강하게 타격하며 놈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었다. 그곳에 내 얼음이 덮어진다.

쿠구구구...

가고일은 분한듯 우리에게 덤비고자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내 얼음의 치밀한 조직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내 마나 성질도 암흑으로 바꿔뒀기에 발각될 일조차 없었다.

마법진 위에 부정의 마석을 올려둠으로써 차원문도 일시적으로 가동을 멈췄다.

이 말은? 지하실은 우리만의 완전한 아지트가 되었다.

지하실을 지키는 몬스터가 가고일이라 일이 잘 풀렸다. 괜히 역동적인 놈들이었으면 비명을 꽥꽥 질러댔을 텐데 수고를 덜었다.

“우선 가면 하나 줄게.”

최세린에게 건넨 가면은 토끼 모양이었다.

나는 늑대 모양 가면인데, 외형은 조금 다를지언정 똑같은 성능을 지닌 마도구다.

이 가면은 착용한 사용자의 기척을 흐릿하게 하고, 체형이나 머리칼 또한 보는 이들마다 다르게 느끼게 만든다.

상대의 망막에 혼란을 주는 마도구인데, 만드느라 힘 좀 썼다.

그만큼 성능은 확실하다. 몬스터 따위를 속이기에는 최적의 물건.

하지만 사천왕이나 마왕에게는 얘기가 다르다.

그들을 마주한다면 가면이고 뭐고 피 튀기는 전투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최세린이라고 한들 조심해야 했다.

“오빠는 지하에서 매직 아이? 대충 그런 마법으로 사천왕 위치만 파악해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가면이 토끼가 뭐냐? 센스하고는.”

“여우를 줬어야 했나?”

“둘 다 별로야. 나는 참새가 귀엽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어, 그래.”

최세린은 자기 몸을 더듬으며 장비가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곤 문을 열어 어둠 속에 스르르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세린이 멋대로 매직 아이라고 불렀던 원격 시야 마법을 가동했다.

둥실 여러 개의 시커먼 구체가 떠오르며 각기 다른 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원격 시야 마법이 비추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니터 같은 것이다.

마법 시동은 끝났다.

이번에는 최세린에게 건네받은 조그마한 마이크의 버튼을 누르고 가동했다.

위이이이잉­

근처 벌레 날갯짓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온다.

와중에 최세린에게서는 숨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내 말은 들리겠지.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세린아, 흑마장 메이블은 참모장실. 귀검사 토텔리 프리온은 연병장. 광포의 드루이드 브룩은 식당에서 폭식 중이고, 암전의 단검 긴은... 역시나 귀신 같은 놈이네. 너처럼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질 않아.”

“당연하겠지. 마왕은 어디 있어?”

“흑마장 마기에 가려져서 어디 있는지 확인이 안 되네, 어떻게든 확인되면 곧바로 연락할게.”

“알았어. 당분간 나 말 없을 거야.”

뚝­

연락이 끊기니 원격 시야 마법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 마법이 비추는 화면은 총 10개다.

긴을 제외한 각 사천왕을 따라다니는 것 3개와 연병장, 식당, 회의실, 광장, 마왕의 방.

두 개는 아직 가동하지 않았다. 긴과 마왕을 찾아내면 그들에게 붙여둘 여분이었다.

“...그래서 이번 용사가­”

광장에 연결된 시야. 그곳에서 다크 엘프 하나가 거슬리는 말을 뱉었다.

우리 용사 일행과 관련된 말이었다. 신경을 집중해 무슨 말을 뱉는지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이제야 겨우 레벨 70까지 성장했단다. 얼마나 편의를 봐주는 거야? 그냥 죽여버리면 안 되는 건지...”

“참모장님 뜻이잖아. 군말 말고 안 따르면 저번 데스나이트처럼 너도 목 날아갈지도 몰라.”

“그놈들은 목 잘려도 안 죽잖아.”

“말이 그렇단 거지. 조심하라고.”

얘기를 나누며 원격 시야에서 벗어났다.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갔지만 10분도 안 돼서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

역시 내 첫 번째 예상은 맞았다.

사천왕이자 마왕군의 참모장인 메이블 토진은 우리 용사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나중에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라면 몰라도 그전 우리의 성장세는 굉장히 더뎠다.

이때라도 늦지 않고 레벨 200 언저리의 마왕군 강자가 출동했더라면 우리는 전멸이었다는 얘기다. 마왕군은 우리 성장을 천천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번에 또 다퉜다면서요? 광폭 님은 항상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또 한 10분이 흘렀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의 원격 시야였다.

장소는 식당. 광폭 드루이드 브룩과 꽤 익숙한 목소리가 서로를 마주 보며 떠들고 있었다.

시커먼 날개에 얼굴은 지저분한 머리카락에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었지만 지금은 자기 집이라 편한 복장인 건지, 머리띠로 머리칼을 정리해뒀기에 마치 숫사자 갈기 같았다.

'저렇게 생겼었구나.'

뭔가 불쾌한 붉은 눈매였다. 맨얼굴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고하면 메이블의 부관이자 악마. 제2 군단장까지 겸임하는 알로켄이다.

놈은 불룩한 배가 터져라 고기를 씹고 있는 브룩을 계속 쏘아붙이고 있었다.

“참모장님 뜻이 곧 마왕님의 뜻 아닙니까. 참모장님은 그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뿐인데 매번 분통을 터트리시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쩝... 쩝... 넌 아무것도 모르면 입 닥치고 있어. 하압­”

“모르기는 뭘 모릅니까. 주술 용사와 과거 본인 모습이 겹쳐 보이시는 거 아닙니까?”

“너 정말 죽고 싶어?”

‘이게 무슨 말이지?’

브룩의 과거 모습과 이재홍이 겹쳐 보여?

나는 모르는 사천왕의 과거와 관련 있는 말이었다.

다른 원격 시야를 모두 음소거하고 식당에만 집중했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오빠 미안. 나 발각됐다. 장소는 연병장이야.”

뚝,

최세린의 목소리가 끊겼다. 설상가상 그와 동시에 모든 원격 시야가 차단되기 시작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침입했구나.”

한 개만 제외하곤 말이다.

참모장 메이블 토진의 방에 연결해둔 원격 시야.

그 구체가 검정색에서 붉은색으로 점차 색깔이 변화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주 익숙한 마력이었다.

시간이 3년이나 지났음에도 놈의 마력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마왕성 곳곳에 깜찍한 선물을 뒀더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 나도 네놈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메이블의 목소리.

내 원격 시야 마법은 어느새 메이블에게 역산되어 제어가 불가했다.

‘30분도 안 됐는데... 마왕군 저력이 내 생각보다 대단했네. 벌써 다 들킬 줄이야.’

치익... 치이익......

잡다한 생각도 잠시, 구체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메이블이 준 선물이 도착했다.

“......아, 메이블 방에는 설치하지 말았어야 했나.”

콰아앙­!!!

구체가 폭발하며 지하실을 헤집어놓았다. 벽면은 패였고 천장은 요란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잔해를 얼음 방패로 막아내며 즉시 억누르던 마나를 터트려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무너진 천장 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모르지만 간덩이가 부었군. 목적은 뭐지?”

시커먼 눈동자, 마찬가지로 시커먼 장발 머리칼, 반면 피부는 새하얗다.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폭발할 듯 맹렬하게 불타오른다.

그러나 화염의 색깔은 붉지 않았다. 그것은 검은색이었다.

그의 온몸은 흑염(??)으로 뒤덮인 채였고 그것은 아주 난폭해 보였다. 이게 그가 흑마장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치이이이...

화염 아지랑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꿀꺽. 침을 삼켰다.

시그니처를 사용해야 할까, 아직은 조금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놈은 분명히 내 전력을 가늠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마나를 많이 소모한 채였다.

원격 시야를 조종하는 동안에도 저 뒤의 차원문과 마법진에게서 마나를 훔쳐쓰곤 있었지만, 나는 온전한 전투 준비 단계가 아니었다.

시그니처를 사용하는 건 최후의 최후까지 보류해두고 싶었다.

그를 알 턱 없는 메이블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화염구를 허공에 둥실 띄웠다.

“뭐... 차근차근 담소 나누다 보면 알게 되겠지.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메이블의 눈은 나를 쫓고 있었다.

그의 근처에 이글거리던 흑염이 점차 내게 다가온다.

그곳에 시선을 집중하자 그 화염 속에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작디작은 마법진이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역시 과거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지금도 전력은 아니지만.’

놀라우리만큼 세밀하고 기발한 마법진 조작이다.

따라할 엄두를 못 낼 정도는 아니지만, 저 장인 정신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 κρηξη ­ 폭발 (τ,ε) }”

퍼엉­!!

순간적으로 펼친 방어막으로 막아냈음에도 흑염의 열기가 생생히 느껴진다.

직감했다. 저 화염이 내게 닿는 순간 끝장이다.

나도 슬슬 전투에 본격적으로 임해야 했다. 곧장 흑염에 대항할 수 있는 마나를 터트렸다.

싸아아아...

지하실 전체에 그득그득 냉기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 냉기는 기존의 푸른색이 아닌 검은색이었다.

흑색 마나라고 뭐가 다르냐 묻는다면, 흑색 마나를 다룬다는 행위 자체가 흑마법으로 분류된다. 흑마법은 마법사라면 손대서는 안 될 분문율이다.

근데 어쩌라고? 내 목숨이 우선이다.

일순위 목표는 메이블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최세린처럼 기척을 숨기는 재주 따위 없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기회를 틈타 시간을 벌고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다른 사천왕까지 메이블 옆에 붙으면 곤란해진다.

그를 위한 흑색 마나였다. 나는 주문을 읊었다.

“{ Ταχεα ψξη ­ 급속 냉각 (α,τ) }”

툭, 투툭.

허공에서 얼음 조각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진다.

그 안에는 시커먼 화염이 분하다는 듯 맹렬히 불타오르다가 제풀에 지쳐서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는 메이블. 오랜만에 진귀한 구경 한 번 했다.

“내 흑염을 얼렸다라? 인간 중에 이런 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대는 줄의 제자인가?”

“글쎄다. 잡담할 생각은 없는데.”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화염조차도 얼리는 게 빙결 속성이다.

흑색 마나는 화염 속성과도 궁합이 잘 맞지만 빙결 속성과도 합이 좋다.

“그대를 상대로 간 보기 따위는 모욕이라는 걸 깨달았다!”

메이블은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에 잔뜩 들뜨기 시작했다.

허공에 마법진을 밟고 붕 떠 있는 그의 두 다리가 정신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정도 밝았다. 과거에는 감정선이라는 게 없는 사내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보니 그도 결국에는 인간이었다.

“이건 나를 향한 시험인가? 이 자리에서 그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마왕군의 미래도 뻔하겠지!”

“...참모장 메이블.”

“내 기꺼이 전력의 마법으로 그대를 죽여주지, 영광인 줄 알아도 좋다!”

허공에 스스슥 마법진이 그려지고 그의 반지가 시커먼 화염을 터트리며 진동한다.

확실히 엄청난 박력이었으나 저게 메이블 전력의 마법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이다.

메이블은 아직도 전력을 다 내비칠 생각이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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