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시간 역행
* * *
하늘은 새하얗고 바닥도 희게 물들고 있었다.
큼지막한 눈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계속 맞았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다.
나는 디안의 전투 때문에 잔뜩 구겨진 모자를 쫙 펴서 눈에 맞지 않게끔 해줬다.
“너는 주피아에서 대기해.”
위험이 가득한 과거의 마왕성에 디안을 데려가는 건 미친 짓거리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디안이 내 수제자라고 한들 그곳에서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버거운 곳이다. 솔직한 말로 짐덩이까지 가져갈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알 필요 없어.”
“저도 데려다 주세요.”
“멋대로 따라온 걸 그러려니 넘어갔잖아. 아직도 모자라서 더 민폐 부릴 생각이야?”
“그, 그건...”
디안의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내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린도 이번에는 까불기를 그만두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마탑에서처럼 나는 진지한 어투였다.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데리고 다닐 테니까 이번에는 고집 그만 부려. 딱 하루만 여기서 기다려.”
“하루... 내일 절 두고 떠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면 포기할게요.”
“그래, 약속.”
“...약속.”
“곧 돌아올 테니까. 아무 데나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 미련하게 눈 맞고 있지 말고.”
“...네에.”
디안의 모자를 장난스럽게 꾹 누르곤 최세린과 마왕성을 향해 직진했다.
뒤에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뒤돌아보지 않았다.
*
마왕성은 더이상 성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외형이었다.
벽은 허물었고, 천장은 없어졌기에 함박눈이 그대로 쌓이고 있었다.
주변 지형도 들쑥날쑥했다. 마지막 사천왕과의 결전에서 나를 포함한 용사 일행과 메이블 토진이 광범위 공격을 서로에게 폭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나네.”
“그러게나 말이다. 저 녀석들은 그리 안 그리웠는데.”
내 지팡이 끝이 가리킨 곳에는 몬스터가 더러 있었다.
밴시야 지박령처럼 잘 움직이지 않으니 마왕성 근처에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 말고도 몇몇 몬스터가 마왕성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동물 가죽을 걸친 고블린은 불을 지피고 마왕성 잔해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웨어울프는 애초에 털복숭이니 논외, 부엉이 대가리에 곰의 몸집을 박아 놓은 아울베어는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말고도 다른 몬스터의 기척도 느껴지지만 시각을 강화한 지금 딱 눈에 보이는 몬스터는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같이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고, 근처에 몬스터들 시체도 간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저들끼리 마왕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합심하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서로를 먹이로 생각하는 걸 수도.
몰려다니지 않는 건 다행이다만, 몰래 잠입하기가 쉽다는 얘기도 아니다.
고블린은 하급 몬스터고, 아울베어는 곰처럼 둔하다. 그러니 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건 밴시와 웨어울프로 축약된다.
이건 내게 있어서 최악의 조합이었다.
“마법으로 내 냄새를 지우면 밴시가 눈치채고, 마법을 안 쓰자니 웨어울프의 후각이 문제네.”
“3년 동안 마력 늘렸다면서. 마왕성 전체에 마나 장벽 펼치면 되잖아?”
“그건 좀 아까운 짓이야. 마나 아껴야 돼.”
시간 역행 마법이 금기라고 불리는 이유는 과거에 영향을 끼치면 현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도 있지만, 사용자를 마나 고갈 상태에 이르게 해 목숨을 뒤흔들 가능성이 넘쳐나기 때문.
그런 위험한 마법을 사용함과 동시에 다른 마법까지 사용한다는 건 마왕을 토벌한 후 3년이라는 세월을 마법 연구로만 보낸 나라고 한들 버겁다.
지금은 마나를 최대한 보존해둘 때였다.
“그냥 이곳에서 시간 역행하는 건?”
“그것도 안 돼.”
디안에게 하루만 기다리라고 말했던 게 문득 떠오른다.
사실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역행을 마쳤을 때 시간대를 내일로 정해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왕성을 뒤흔들고 올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나비효과를 책임져야 한다.
몸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서 누군가를 죽였더라면, 그 사람이 현세까지 끼친 영향력만큼 내게 부작용이 온다.
가령, 내가 과거에서 왕 아들러 프리브룩스를 죽인다면, 그가 여태껏 왕 노릇을 하며 서대륙을 관리했으니 그로 인해 발생했던 사건의 크기만큼 내게 부작용이 떨어질 것이다. 서대륙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바뀌는 것이지 않는가.
반대로 역행한 시간대에서 일주일 내에 죽을 사람을 죽인다면,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다. 그 사람이 죽기 전 일주일 내에 다수의 인원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서야 말이다.
요점은 덜 설치고 다닐수록 미래를 바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니 정체를 숨기고 마왕군에서 조용히 얻어낼 정보만 얻어내고 도망칠 거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가능하다면 들키지 않고.
그것을 위한 최적의 역행 장소가 마왕성의 지하에 있는 거대 차원문이다.
그곳에 있는 마법진의 마력은 너무나도 방대해 아무리 사천왕이라고 한들 우리를 눈치채기 힘들다.
그곳은 마계에서 몬스터를 불러오는 장소이기에 대충 내 마나 성질을 어둠 속성으로 바꿔치기하면 알아차릴 수 없다. 최세린은 말할 것도 없다.
기척 숨기기에 있어서 그녀를 따라올 자는 암전의 단검 긴이 죽은 시점에서 없다.
그 긴을 다시 보러 가는 거지만.
하여간,
그 때문에 마왕성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어째,
“무혈입성은 힘들어 보인다. 최대한 안 건드리고 싶었는데.”
“차암나, 몬스터한테 동정은.”
“마왕이 없으면 쟤네도 ONE(?)의 주민일 뿐이야.”
궤변은 아니었다.
사람을 먼저 습격하지도 않으니 지구에서의 맹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멋대로 사냥하기에는 저 녀석들도 생명이다. 나는 최세린에게 지시했다.
“최대한 상처는 얕게.”
“오빠나 잘해, 나는 알아서 잘하니까.”
품 속에서 바늘을 꺼내 허벅지에 달려 있는 주머니에 담갔다가 빼기를 반복, 머잖아 바늘은 흰 가루에 뒤덮여 있었다.
그 바늘을 들고 한쪽 눈을 감아 몬스터를 조준한다.
그리곤 손을 부채꼴로 휘두르며 발사, 부위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최세린의 수십 개의 바늘은 모두 정확하게 몬스터 목덜미 언저리 동일한 부분에 꽂혔다.
쿵! 쿵!
털썩
몬스터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머잖아 코골이가 들려온다.
최세린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수면독이다.
그어어어어!!
허나 실체가 없는 놈에게 바늘을 꽂을 수는 없었다. 지금 날뛰는 밴시들 얘기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몬스터에게 달려들었고, 그 주위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 πγο αλυσδα 얼음 사슬 }”
촤라락
시퍼런 얼음 사슬이 세 마리의 밴시를 둘러싸곤 꽈아악 몸을 조인다.
위력을 조절했으니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답답할 수는 있겠지만,
끼기기긱!!
...그래도 아픈가?
밴시는 칠판 긁듯 지독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나와 최세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다치게 하지 말라면서 자기가 다치게 하면 어쩌자는 건데?”
“쟤네 원래 엄살 심해... 아, 귀 터지겠네. { σιωπ 침묵 }”
장막을 나와 최세린 근처에 덮자 기괴한 비명이 점차 가라앉는다.
이제야 좀 살겠네, 중얼거리며 마왕성 지하로 여유롭게 걸어가 육중한 대문에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끼이이이 오랫동안 열린 흔적조차 없는 먼지 가득한 문을 열었다.
그 먼지가 걱정돼 코를 꽉 틀어막았는데 먼지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아이씨... 끔찍하네."
최세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
코를 막았음에도 이 지하실 전체에는 고기 썩은 악취가 진동했다.
피범벅된 고기에는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고 있었고, 피로 얼룩진 바닥은 차마 봐주기 힘들었다.
모두 몬스터의 시체였다.
부패가 어떻게 이리도 느리게 진행된 거지? 조금만 생각해보니 금방 답에 도달했다.
마계와 연결되는 마법진.
그 마법진은 우리가 마왕을 죽였을 때 분명히 닫혔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방대한 마력이 갈 곳이 없어 이미 죽어버린 몬스터의 시신의 부패를 막는데 사용되던 것이다.
마나 조작으로 시체와 무너진 천장과 벽면 잔해를 치워 마법진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마계에서 곧장 건너온 몬스터가 현대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게끔 치유 주문식을 섞어 뒀다. 몬스터를 위한 자그마한 배려가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었다.
부패되기 전에 치유하고, 그 시체를 구더기와 파리가 갉아 먹는다.
그 갉아 먹힌 부위는 곧장 치유되고, 그걸 또 갉아먹는다.
무한루프다. 파리 양식장으로는 딱이겠군. 최세린이 역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차마 더 봐주기 힘들어.”
“동감이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마나 조작으로 공간을 확보한 후 가방을 열어 손에 한 움큼 시간의 파편을 쥐었다.
반대 손에는 드래곤의 심장이 박힌 내 아티팩트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요동치고 있었다.
“흐... 이 비싼 걸 다 쓰는 거야?”
“과거에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니까 넉넉하게 준비한 거야. 돌아오는 시간은 아까도 말했듯이 내일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자면”
“알아, 안다고. 정체 들키지 않고, 누구를 죽이는 건 지양하라고.”
“...오케이.”
촤라락
어지럽게 놓인 파편을 마법진의 형태에 맞춰 정렬하곤 하나둘 마나를 부여했고, 금기 마법인 만큼 꽤 복잡한 마법진이니 머릿속 암산으로는 버겁기에 지팡이를 직접 휘둘러 마법진을 그렸다.
우우웅.....!
머잖아 파편과 파편 사이에 짙푸른 선이 저절로 생기며 32각형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손을 탁탁 털고 지팡이를 가방에 구겨 넣었다. 역시 물리법칙 따위 무시하는 엄청난 가방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편리하기는 이만한 게 없다.
“{ Ξεκνα 시동 }”
마나를 불어넣자 파편과 파편 사이에 절로 마법진이 그려진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이 파동 지듯 바깥쪽으로 갈수록 선이 거대해지는 형태였다.
파편은 내 마나 색깔인 푸른 빛에 휩싸여 지진이라도 온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린다.
그리곤 그 마법진 끝자락이 어색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 일렁임은 점차 거대해졌다.
“완성이다.”
일렁임이 방 전체를 휘감았다.
눈 뜨기도 버거울 만큼 환한 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