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시간 역행
* * *
새하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큼지막한 눈이 멈추는 방법은 잊어버린듯 바닥에 쌓이고 쌓여 발만 뻗어도 종아리를 덮을 수준이었다.
우웅 우우우... 우웅......
자신을 겨우 뱉어낸 차원문은 힘이 다한듯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갈 생각도 없었지만 뒤가 없어졌다는 건 각오를 다지게 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곤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아니, 눈 하나는 가득했다.
‘마탑주님은 어디로? 여기는 어디지?’
무작정 따라오는 기세까지는 좋았지만,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냥 마탑주님이 또 훌쩍 어디론가 떠날까 싶어 성급히 발을 옮긴 것이다.
푸스스 푸스슥
디안은 저 멀리서 어떤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곤 흠칫 놀라며 양손에 마법진을 휘감았다.
그 마법진을 보자 기척은 더 매섭게 돌진해왔다. 거리는 삽시간에 가까워진다.
그 기척, 눈더미 속에는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
휘장을 차고 중심에 있는 남성에게 메마르고 날렵한 얼굴의 사내가 고글을 벗으며 물었다.
“...거수자 위치 북동 방면으로 대략 50M.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고 마법을 사용합니다.”
“몇 명이지?”
“한 명입니다.”
“뭐야. 일단 신원 확인해.”
알겠습니다.
눈더미 속 사내는 등에 메고 있던 소총의 마개를 벗겼다.
그리곤 디안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아까도 말했듯 대략 50M 남짓,
이 거리라면 폭설의 영향이 있어도 총알을 명중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삐빅
그녀의 신원을 조회하고자 마도구를 들었다.
[목표물 확인 불가, 목표물 확인 불가,]
하지만 폭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제대로 나오는 게 없었다.
그녀에 대한 걸 조사하려면 거리를 좁혀야 한다.
“더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귀찮은데.”
성실한 제1 부대장 화이트라면 일부러 거수자에게 거리를 주며 문답을 하는 귀찮은 행동을 하겠지만, 제2 부대장 그릭은 달랐다.
그는 바닥에 있는 눈더미를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곤 오른손을 척 들었다.
그리곤 디안에게로 내질렀다. 죽이라는 뜻이다.
“빨리 해치우고 밥이나 먹자. 오늘 메뉴 뭐라더라.”
“곰고기 스튜입니다.”
“으, 그거 존나 비린데...”
그릭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표정을 구경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부하들은 학익진을 디안을 중심에 두고 펼치듯 산개한 채였다.
“사격 준비.”
“준비.”
“...사격 개시.”
투두두두두!!
수많은 총탄이 멀뚱멀뚱 서있던 디안에게 날아든다.
그녀가 마법사라고 한들 방어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무자비 사격이었다.
*
“...신원은 밝혀졌는가?”
드래곤과 주피아의 관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화이트가 저불 대신 수화기를 받았다.
저불은 그의 대화에 잠깐 귀기울이는가 싶다가도 다시 용사 일행을 바라봤다.
“주피아에 드래곤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요.”
“아니요?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드래곤이 어떻게 인간과 화합할 수 있는지.”
“그는 저와 계약 관계입니다. 아니, 총독님과의 계약 관계라고 해야겠죠. 그보다”
저불은 눈썹을 씰룩이곤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방문 목적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곤, 심지어 주제도 한참이나 벗어났습니다.”
“아... 너무 놀라서 실례했네요.”
화이트 드래곤을 가리키며 시간을 끈 덕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마왕성으로는 다가가야 한다. 시간 역행을 하기에는 그곳이 제격이니까 차선책 따위 없다.
하지만 역행을 순순히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납득할 수 있는 거짓을 섞었다.
“최근에 불길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혹여 마왕군이 부활하지 않을까... 이런 낌새를 말이죠.”
“마왕군... 무슨 근거로 그리 생각하셨죠?”
“이게 참 말씀드리기 부끄럽네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용사는 예지몽을 꿀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세계의 평화에 관련한 꿈뿐이지만요.”
저불이 흥미롭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눈빛으로 어서 더 해보라는 듯 재촉하고 있었다.
“꿈에서 단탈리온이 보였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사천왕도 말이죠. 그들은 마왕군의 잔당을 끌어모아 부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피바다였죠. 그렇게 꿈은 끝났습니다.”
“그냥 개꿈일 수도 있잖습니까?”
얘기에 끼어든 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잔뜩 폼 잡던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그는 재수없는 웃음으로 나와 최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감각에만 의존한 말이지만, 방금 내뱉은 말과 저 드래곤이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는 불쾌한 시선으로 미루어보아 내 추측은 정답일 것이었다.
저 드래곤은 나와 최세린에게 적대심이 가득했다.
역시...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나을까?
나만이 느끼는 건 아닐 테지, 나는 흘깃 옆자리의 최세린을 보았다.
“와, 진짜 잘생겼다... 후광 비치는 것 같지 않아?”
“너 미쳤냐?”
그런 생각이 무색해지게 최세린은 옆에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놨다.
뭐? 잘생겨?
그냥 기생오라비다.
나는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최세린을 다리로 툭 치곤 놈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재수없는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쪽이 용사에 대해 압니까?”
“흠, 잘은 모르지만 예지몽을 꾸는 용사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신의 계시 같은 건 그 청렴한 요정이나 정령도 받지 못하죠.”
“당연히 들어본 적 없겠죠.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테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예지몽 같은 얘기를 해봤자 좋은 소리 듣겠습니까?시비나 듣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말입니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이는 네놈을 얘기하는 거다.
이런 어투였으나, 실상은 화이트 드래곤의 말이 맞았다.
예지몽? 거짓말이다.
‘용사의 감각이 마왕군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충 이런 식으로 둘러대면 더 추궁할 방도도 없지 않겠나 싶어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인데 그가 정확히 탄로났다.
하지만 놈이 지닌 건 추측 뿐이다.
조금 더 우기고 나가도 괜찮다는 판단이 섰다.
“제 단 한번도 틀린 적 없는 감각이 말했으니 마왕군의 잔당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부자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싶군요.”
“흠... 마법 용사님은 저를 지나치게 의식하시는 모양입니다.”
“설마요, 당신은 로드 드래곤도 아니잖습니까?”
로드 드래곤이 가지는 건 강함 뿐만이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 존중해 마땅한 존재가 로드 드래곤이다.
눈앞의 용은 해당 사항 없었다.
그 사실을 지적하자 화이트 드래곤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와 말을 섞을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진다.
상극이다. 서로 바라보며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그때 저불의 수화기로 통화하던 화이트가 심각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거수자...가 마법을 쓴다라. 마법 용사님? 혹시 차원문에서 건너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까?”
“예?”
“푸른 머리칼의 여성... 물 속성 마법을 사용한다는데...”
인상착의와 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내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디안, 하지만 그녀는 데미투에 있을 것이니 그 닮은 누구이지 않을까 싶다.
“흠...”
잠시 눈을 감고 마나 감지 영역을 광범위하게 넓혔다.
그러길 수어 초. 나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세상에.”
디안의 마나였다. 시간차를 두고 전송된 모양인데...
왜? 어째서 여기에 디안이?
의문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자 입을 연 자는 화이트였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행이 아니시라면야... 아아 제1 부대장이다. 곧장 지원에 나서겠다.”
“잠시만! 일행 맞습니다!”
“...사격은 중지. 그녀는 용사분 일행이다.”
뚝
수화기가 끊기자 혼란은 가중되었다.
‘제길, 이게 무슨 일이야.’
머리칼을 헝클이며 고개를 떨궜다.
애써 침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진정을 도모해봤지만 효과는 별반 없었다.
디안이 어째서 여기에? 사고는 계속 원점으로 돌아왔다.
“디안이라는 애도 못지않게 말 안 듣는 제자네. 세상 예뻐하더니 뒤통수 맞은 기분이 어때?”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가출 청소년을 보는 느낌이라기에는 내가 보호자 역할이다.
집 나간 아빠 따라온 철없는 딸?
머잖아 사고 안 치던 디안이 방문을 열고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뗀 자는 소장의 부하였다. 우리를 연행해온 자와는 다른 인물.
“......데려왔습니다.”
“어, 수고했어.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제 후배이자 제2 설원기동대 부대장 그릭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릭이라는 자의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물에 흠뻑 젖고, 옷 이곳저곳이 찢겨나가있다.
저꼴을 만든 건 누가 봐도 디안이다. 그녀는 죄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탑주님, 죄송해요. 제 능력이 부족해서 또 민폐를 끼치고 말았어요...”
열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왔단 말인가.
“야, 너도 일 년 동안 마법 금지당해볼래?”
“받아들일게요. 그럼 마탑주님이 지켜주시는 거겠죠?”
“...?”
상상치도 못 한 반응에 황당함이 밀려와 절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최세린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고전하고 있었다.
“푸, 푸흡... 얘 지금 보니까 자책쟁이가 아닌데? 오히려 오빠한테 기대고 있네. 응석받이라고 불렀어야지.”
“...어지럽다.”
디안의 생글생글한 얼굴을 보자 말이 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크흠, 마법 용사님. 이 여성도 마왕군을 견제하러 같이 가는 걸로 알아두면 되겠습니까?”
“아... 예. 그렇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다시 데미투로 보내자니 남은 차원석은 단 하나다.
우선... 시간 역행은 진행해야 한다. 이곳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사절이다.
그런 심정을 알 리 없는 디안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마탑주님! 제 실수는 옆에서 보좌하면서 갚을게요.”
“너 뭔지는 알고 따라온 거냐?”
“핫... 제 무지함이 원망스러워요. 옆에서 같이 배워나가도록 할게요.”
“너 그동안 컨셉이었어?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언제부터 막무가내로 바뀐 거야, 사춘기가 이제 찾아온 거야?”
디안과 옥신각신하고 있자,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잡담은 나가서 해주시길. 이제 이곳에는 볼일도 없잖습니까?”
“...미안합니다. 일단 나가자 디안, 세린아.”
“좋겠네 오빠. 양손의 꽃이네?”
“얘는 봉오리고 너는 썩어가는데 양손의 꽃은 무스”
패이에게 사용했던 최세린의 스킬 위압, 동급의 상대에게도 먹힌다는 걸 직접 겪었다.
온몸이 무겁다. 못 버틸 것은 아니었지만, 버티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기술이었다.
즉시 태도를 바꿨다.
“미인이 두 명이나 있으니 너무 즐겁다. 하하.”
“그래야지.”
“저도 이제 마탑주님이 보시기에 꽃이라고 할 나이가 된 건가요?”
“너는 조용히 해.”
셋이서 꽁트하듯 소장 집무실에서 벗어나기 직전, 문틈 사이로 드래곤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그를 눈여겨보듯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나보다는 내 가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거기 있었네요.”
그는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