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시간 역행
* * *
“이곳도 오랜만이네. 별로 바뀐 건 없어 보이는데... 에... 에취!”
마왕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 북대륙의 주피아. 그 외곽에 차원문이 무사히 완성됐고, 최세린은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
커다란 눈송이가 부슬부슬 떨어진다.
퍼억
“꺅!”
...철언, 그보다는 퍽퍽 떨어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발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깊은 발자국이 새겨진다. 구두 사이로 눈이 침투한다. 질퍽거리며 걷는 건 사양이라 신발과 바지 사이에 마나를 둘렀다.
“...후우우.”
숨을 뱉자 짙은 입김이 나온다.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최세린은 두건과 망토까지 꺼내 온몸을 방어했다.
“그러게, 너 말대로 달라진 건 별로 없어 보이네.”
저 절대 요새도 똑같고 말이야. 손가락으로 거대하고 기다란 철벽을 가리켰다.
저곳이 주피아 마을이지만, 실상 마을보디는 요새라는 단어가 가까웠다.
주민은 몇 없고, 그마저도 이곳 군인의 가족들이 태반이다. 너무 지독한 폭설 지역인지라 이곳 거주자는 눈을 심각하게 좋아하거나, 정신이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하루만 제설을 게을리해도 집문이 열리지 않을 수준으로 눈이 내린다.
계절도 구분 없다. 이곳은 4계절 내내 폭설이다.
‘무슨 마법도 아니고.’
옛날에는 마법의 영향이 맞았다.
설산의 고룡이자 화이트 드래곤 로드 자이키릭.
[하얀 눈... 그것이 세상을 덮을 때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자이키릭이 내게 건넸던 말이었다.
그는 눈을 좋아했다.
덕분에 주피아 사람들은 눈 하나만큼은 원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도라는 게 있다. 매일 폭설 수준으로 눈을 흩뿌리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짓거리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민폐다.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 적대하는 세력도 아닌데, 주피아의 주민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러나 탓할 대상이 없다.
자이키릭은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전대륙에 퍼지자 주피아의 눈의 악몽도 끝나겠지.
생각했으나 기후에 무슨 영향이 생긴 것 같다.
이곳은 몇 년이 지나도록 눈이 그친 적이 없다.
‘아직도 마법 영향이 있는 건가?’
잘은 모르겠다만, 확실히 자이키릭은 대단한 드래곤임은 분명했다. 그야 화이트 드래곤 로드였으니 당연하겠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 내 주위에 있는 눈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거수자 발견, 포위한다.”
그 눈더미가 말했다.
설인 같은 건 아닐 테지, 마나 장벽을 켜자 그들이 눈에 뒤덮인 인간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바코드 찍는 기계 비스름한 걸 들이밀고 있었다.
띠딕 그 기계가 무어라 말을 뱉었다.
[ 신원 확인, 신원 확인. ]
치지직
기계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새하얀 옷에 눈을 가득 묻힌 남성이 내게 총구를 겨누며 말했다.
“...악쿤 토든, 진 키아라. 용사께서 이곳에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저 총이든 아직도 눈더미에 숨죽여 신호를 기다리는 열댓 명의 병사든 나와 최세린에게 있어서 전혀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차원문이 들켰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불리한 구도를 만들었다.
우리는 저들의 추궁에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어... 음...”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군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 역행을 해보려고요.
...고개를 절렜다. 아무리 용사라고 한들, 그건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습니다.”
“음... 더 높은 사람과 얘기해야겠는데요, 이곳의 대장님을 만나봐야겠어요. 안내해주시죠.”
그냥 무대포로 밀고 나갔다. 용사라는 이름의 파급력은 강력하다.
당장 총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대사는 내 커리어가 감싸준다.
영 기분 나쁘면 저들도 마왕 때려잡아보던가,
툭툭,
그때 내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그곳에는 최세린의 팔꿈치가 있었다. 그녀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요새랑 동떨어져 있는데 대체 왜 들킨 거야? 차원문은 그렇게 눈에 띄는 마법도 아니잖아.’
그게 나도 의문이다. 이곳에 대단한 마법사라도 취직한 게 아니고서야, 내 차원문을 바로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혹여나 재수가 너무나도 없어 마침 이 주변을 순찰 중이던 주피아의 군인과 마주한 게 아닐까 경우의 수를 떠올렸으나, 그건 아니었다.
차원문 전송을 막 마쳤을 때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나야 감지 마법을 안 써서 그런 것이라 가정해봐도 최세린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면 이들은 근처에 있지 않았다.
어떤 마법사가 내 차원문을 눈치채고 즉시 출동했다는 게 정답으로 좁혀져간다.
누군지는 몰라도 재수 옴 붙었다 생각했다. 하필이면 주피아로 배정되다니.
안쓰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고글 사내를 바라보자 그는 날 위아래로 훑어보곤 허리춤에서 어떤 장치의 버튼을 누르며 입가에 가져갔다.
“...소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장치는 무전기였다.
청각에 마법진을 둘러 강화를 사용하자 저 여성이 주피아의 우두머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최세린은 강화 따위 하지 않아도 애초에 귀가 좋으니 상황을 나보다 먼저 이해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반가운 이름이네, 라고 속삭였다.
저불.
처음 이름만 들었을 때에는 근육질의 남성을 떠올렸었는데 그녀는 여성이다.
그것도 제법 아리따운,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이다.
군에서 카리스마는 아주 예리한 무기이며,
그녀는 북대륙의 여군 중 유일하게 별을 단 인물이다.
그녀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줘도 안 가질 지역을 몇 년째 통솔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소장이라는 지위를 순전히 실력으로 따냈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거수자의 정체는 마법 용사 악쿤 토든, 암기 용사 진 키아라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티고스의 말이 맞았군. 우선 예를 갖춰라.”
“하지만 이들은 거수자...”
“예를 갖추라지 않나.”
무거운 목소리가 울리자 고글 사내는 탄식을 뱉으며 손짓했다.
그에 맞춰 그녀 관할 군대가 눈더미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고글 사내처럼 눈만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고글을 끼고 있었다. 고글 사내는 고글 대장으로 내 머릿속 명칭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보호색마냥 유심히 지켜보지 않으면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기 힘들 복장.
이 주피아에서 이보다 유리한 복장은 없으리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리를 향했어야 할 총구와 칼끝을 거뒀다.
고글 대장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설원 기동대 제1 부대장 화이트입니다.”
“화이트 씨, 저도 반갑습니다. 첫만남이 구려서 유감이지만 마법 용사입니다.”
“저는 암기 용사, 반가워요.”
치지직
저불이 무전기를 재가동한 것이다. 머잖아 그녀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귀빈이니까 잘 모셔오도록.”
“...알겠습니다. 즉시 복귀하겠습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명령이다.”
뚝
잡음이 사라진다. 저 너머에서 무전기는 끊겼다.
역시 저불은 말이 잘 통하는 여자다.
과거 첫인상은 굉장히 날 선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나름의 카리스마는 여전했지만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마왕 토벌 공로를 인정해주는 게 아닐까, 마왕을 깨부숨으로서 가장 득을 본 건 주피아의 군인들이니까.
“실례했습니다. 소장님께 모시겠습니다.”
화이트가 권총을 품 어딘가에 집어넣고, 나와 최세린에게 캡슐 하나씩을 건넸다.
그 가운데 버튼을 누르자 손에서 투명한 우산이 펼쳐졌다. 무게는 캡슐 그대로였다.
‘별 마도구가 다 나오네... 제작자는 역시나 북대륙의 괴학자(??者) 하이링커구나.’
머리에 폭탄이라도 맞은 얼굴의 사내가 기억을 더듬고 지나간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화이트는 흘깃 나를 바라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
“반갑습니다, 주피아를 관리하는 소장 저불입니다.”
뜨거운 난로가 벽에서 활활 타오르는 저불의 집무실,
그곳에 들어가자 저불은 쇠 부딪치는 소리 요란한 검을 왼손에 든 채 각진 인사로 우리를 환영했다. 나름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도 그에 목례하는 것으로 인사에 대답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곧바로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키곤 검을 부하에게 대충 던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성격을 대변하듯 시원시원한 언행이었다. 어쩌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직접 대면해보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게 멋진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괜히 영양가 적은 대화 따위 취급하지 않는다.
절대 요새 주피아의 우두머리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지켜낼 수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아주 냉철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밀입국에 대한 죄를 모르시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원래는 극진한 벌로 다스려야 하나, 용사님들께 칼끝을 겨눌 만큼 저는 멍청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저희가 잘못한 건 맞는데요 뭘. 웬만한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두고 볼 일이죠. 우선 방문 목적부터 듣고 싶은데요.”
마왕군의 진의를 알기 위한 시간 여행.
이리 말할 수도 없으니 밀입을 했던 거였다. 대륙에서 대륙으로 건너갈 때와 나라에서 나라로 건너갈 때, 심지어 지역에서 지역으로 건너갈 때도 관문은 존재한다.
그 관문을 건널 때마다 방문 목적을 말하는 건 ONE(?)의 주민이라면 당연한 상식이지만, 우리 경우는 달랐다.
거짓으로 지나가는 건 어렵지 않다만, 용사는 전세계를 관통하는 유명인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자들은 내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많다. 몰래 정체를 숨기고 지나다니는 게 아니고서야 용사의 마왕군 방문은 대륙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미지수다.
그게 귀찮아서 밀입국을 계획했으나... 이곳에 능력 있는 마법사 한 명이 취직한 모양이다.
그는 내 차원문에 쓰인 마나를 곧바로 알아채고 보고해 5분도 채 안 돼서 우리를 포위했다.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내 차원문을 알아챈 자의 얼굴쯤은 봐두고 싶었다.
시간 역행에 방해될 수도 있으니 까다로운 자라 판단되면 암살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하고.
‘저 사람이네. 차원문 알아챈 사람.’
최세린이 원격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 눈썹마저도 하얀 이국적인 외향세의 남성 한 명이 백색 제복까지 갖춰 입은 채 우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자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사람은 아니야.’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만 봐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드래곤도 군인을 할 수 있나 보군요? 인간과 화합하는 온화한 존재가 아닐 텐데 무슨 수완을 부리신 겁니까? 좀 배워두고 싶군요.”
백색 옷을 입은 드래곤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갖는 의미는 모르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