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전쟁의 상징
* * *
끄으으으...
사내가 자고 있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도, 도망가야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어디로 도망치지? 창문으로? 우선 신체 강화부터...’
그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더니 손에 단검을 꼭 쥐고 마나를 터트렸다.
멍청한 짓이었다. 암기 용사랑 마법 용사가 한자리에 있는데, 도망치리라는 건 개미가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희박한 확률이다.
“깼어요?”
최세린은 어느새 그의 곁에 서서 볼을 쿡 찌르며 말했다.
“히, 히익!”
“너 보니까 무슨 귀신 본 것처럼 반응하네. 하긴, 네가 험상궂게 생기긴 했어.”
문을 열어 잔뜩 겁에 질린 사내와 최세린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러자 허리춤에 단검을 향해 손을 뻗는 최세린이 보였다.
철컥
칼집에서 단검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떨떠름하게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미안, 그래서 아저씨. 얘 왜 찾은 거예요?”
“힉! 괴, 괴물! 드래곤! 드래곤!!”
초면에 건네는 인사치고는 무례한 서두였다.
“사람보고 괴물이라느니 도마뱀이라느니 말이 심하잖아요. 아니, 드래곤은 나도 꼴에 마법사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꿈보다 해몽이네. 오빠도 얼굴이 험상궂다는 뜻이잖아.”
그녀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갚아줬다는 웃음이었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케이, 둘 다 험상궂은 걸로. 아무튼 무슨 용건인지 말해줘야겠어요.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말아요. 이미 이 근방에 제 마나 장벽을 펼쳐둔 채고, 설령 운 좋게 장벽에서 벗어난다고 한들 암기 용사를 상대로 기동력 승부를 펼칠 생각은 아니겠죠?”
“너무 겁주지 마. 이미 얼어버렸잖아.”
“웃기시네, 네가 이 사람 기절시킨 장본인이야.”
"...흠흠.”
딴에는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은 거였으나 사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최세린은 이미 위압 스킬을 해제했다. 나도 마나 장벽 말고는 아무런 스킬도 가동하지 않았다.
지금 사내의 반응은 단순한 생리적인 공포다.
“죽이지 마세요! 살려만 주세요!”
아까 내 클론이 내뱉은 말과 판박이다.
“죽을 짓 하러 왔나 보죠? 용건이 뭐냐니까.”
“그... 그...! 죄송합니다. 죄송...”
“답답하게 하네. 하나 알려줄까요? 이미 눈치챘겠지만 저는 마법 용사입니다. 대륙 제일의 마법사인 제가 정신 지배 마법 하나 못 쓸까요? 그쪽도 마법사니까 정신 계열 마법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알겠죠?”
“히익!”
위협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최세린이라는 카드를 놔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기도 조금 섞여 있었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여자한테 걸리면 더 심하다는 거예요.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면 의자에 묶어두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 만큼 끔찍한 고문을 행할 겁니다. 용사 시절에 그녀의 고문을 생방송으로 본 저는 차라리 정신 지배 마법을 추천할게요. 이 암기 용사 진 키아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의 관절을 뽑고 거기에 묻은 피와 힘줄을 곰이 벌꿀 핥듯 맛있게 씹어먹는 여자입니다. 그 끔찍한 고문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간간이 있기는 했으나 당연하게도 사지가 온전하진 못했죠. 아마 몇몇은 자살한 걸로 알고 있어요. 나 같아도 팔다리, 눈, 코가 모두 잘려 나갔다면 살아갈 의지가 꺾이겠지만.”
“마, 말하겠습니다! 말할게요!”
“좋아, 세린아. 너 명예는 내가 지켰다.”
“오빠...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주접 떨지 마.”
내게 쏘아붙이곤 최세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어디가?”
“차라도 내오려고. 저쪽도 꼴에 손님이잖아.”
“후, 후우우......”
최세린이 거실로 나가자 사내는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가방에서 공책과 펜을 꺼냈다.
“순순히 대답해줘요. 이름과 나이가?”
“패, 패이 클라우드입니다. 26이고요...”
손가락으로 패이의 겉옷 가슴팍에 있는 심볼을 가리켰다.
회색 늑대가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문양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ONE(?)을 지탱하는 3개의 초대형 길드 중 하나인 늑대 길드의 심볼.
“용병이죠? 문양 보니까 늑대 길드 소속인데, 길드에서 보낸 거예요?”
“아닙니다! 길드 주관이 아니라 진 키아라를 데려오라고 누군가 의뢰를 했습니다...”
“모셔오라는 거야, 끌고오라는 거야? 둘 중 뭡니까.”
“그... 설득하되 실패하면 어떻게든 끌고오라는... 그래서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길드에서 나름 실력 있는 제가 지원했습니다...”
말 자체는 건방졌지만 태도는 어느 누구보다도 비굴하다.
조금 더 놀려줄까 장난기가 피어올랐으나 말을 삼켰다.
툭 건들면 기절할 것 같은 기세였기에 괜한 동정심이 일었던 탓이다.
“용사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나 봐요.”
“그... 의뢰 보수가 너무 좋아서...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반성 중입니다.”
“마법은 제 책으로 배운 거죠?”
“네, 6권 중 4권까지 백 번도 넘게 정독했습니다. 덕분에 길드에서 제법 방귀 좀 뀔 수 있었습니다...”
“이 마법 용사에게서 간접적으로 마법을 배운 주제에 같은 용사인 내게 덤비려고 했다고? 머리가 맛이 간 거 아닌가요?”
최세린이 패이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차를 건넸다.
대충 싸구려 티백을 우려낸 녹차. 향은 좋았다.
“반성 중입니다...”
“반성했다면 알겠어요. 저를 데려오라 의뢰한 건 누군가요?”
“그... 그건 말하기 조금 버거운... 끄아아아아!!!”
콰직!
패이의 손등에 펜이 박혔다. 어딘가 익숙한 디자인이다 싶었는데 내가 쥐고 있던 펜이었다.
그 펜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건 최세린이었다.
패이는 펜이 박힌 손을 제외한 온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에 난리통을 피우고 있었다.
"끄악! 끄으으으!!"
“저기요, 착각하지 마세요. 좋게 말하니까 심문 같지가 않아요?”
“야, 그거 비싼 거야!”
“새로 사줄게, 조용히 하고 있어.”
“아, 응.”
최세린의 싸늘한 눈빛은 내게서 다시 패이에게로 향했다.
“사지 멀쩡히 집 가고 싶으면 순순히 대답해요. 그리고 괜한 잔머리 굴리지 마요. 그쪽 죽여도 나 혼자서 알아낼 수 있는데 귀찮은 거 질색이어서 묻는 거니까.”
...꿀꺽.
패이의 목젖 움직이는 게 생생하게 보인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곤 겨우 입을 뗐다.
“...마, 말하겠습니다. 끄, 끄으으...”
푸슉!
펜을 뽑은 곳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진작 그랬으면 좀 좋냐고요.”
최세린은 책장에 있는 녹색 가루 가득한 병을 꺼내 그 가루를 패이의 손등에 솔솔 뿌렸다.
그리곤 붕대를 칭칭 감는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출혈은 멎었다.
*
패이의 얘기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용사 = 살인 병기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용사이기 전에 전송자라고 칭한다.
원래는 지구인이었던 자들이 마왕을 막기 위해 강제로 전송됐기에 붙은 이름.
전송자의 강함은 성장력에 있다.
다른 이들보다 몇십 배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마왕군에 대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보편적인 이야기, 사실 우리는 전송될 필요가 없었다.
우리를 제외하고도 마왕군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몇몇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3명 정도다.
한 명은 내게 마법을 알려준 스승, 한 명은 귀신이라는 이명을 지닌 검호, 다른 한 명은 최악의 용족이라 불리는 다크 드래곤의 수장이다.
이들은 3년전 우리랑 비교조차 실례일 정도로 강했다.
지금이라면 전력이 비슷할까? 아직도 확신은 없다.
하나 확실한 건 이 셋만으로도 마왕군은 충분히 토벌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우리라는 용사가 있든 말든 마왕군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 여길 양반들이다.
그러니 대륙은 이들을 전력으로 삼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가 전송된 거였지.
...되짚어보니 스승이 좀 원망스럽긴 했다.
셋 모두 사회와는 담을 쌓은 성격들이다.
악명도 마왕군 비견될 정도로 자자하다. 대표적인 사건 하나씩만을 짚고 가자면,
내 스승은 마법을 실험하겠답시고 거대 도적단 소굴인 거대 산맥 하나를 용암 바다로 만들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시뻘건 용암이 들끓고 있다.
검호는 비공식적으로도 100명이 넘는 실력 있는 검객을 살해했다.
그들이 검호라는 호칭을 얻고 싶어 무작정 달려들었기 때문이라지만 그 살해 방법이 너무나도 끔찍하여 더 언급하기도 싫다.
다크 드래곤은 언제나 차기 마왕 소리를 달고 다니는 놈이다.
그는 인간을 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연마다 어린 꼬마를 제물로 바칠 것을 권했다.
그건 3년이 지난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용사 된 도리로써 놈을 족칠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1 대 1이라면 모를까. 그의 군대와 전면전은 무리다.
이러한 악명이 퍼져갈수록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대 살육 병기 혹은 재앙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둠이 바람직하다.
반면,
이 세 명에 비해 용사는 인간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다.
패이는 그를 위한 용병이었다.
암기 용사를 꼬드겨 자신의 전력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는 뜻을 전하겠다는 포부.
그 의뢰주는 내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내 마탑이 있는 데미투의 영주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에 최세린은 깔깔 웃었다.
“웃기고들 있네. 전쟁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해주겠다는데?”
“나한테는 전대륙의 마법 생도들에게 마법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던데, 네가 나보다 조건이 좋네."
들을 필요도 없는 소리라서 안 들었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들어볼 걸 그랬나 싶다.
내가 열이 뻗쳐 그 자리에서 아구창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왔다면 최세린한테까지 추악한 손길을 뻗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사실 영주를 죽이고 왔더라도 결과는 다름없었을 것이다.
내 예상컨대 최세린은 늦든 빠르든 패이 같은 자에게 전갈을 전달받을 운명이었다.
“패이 씨, 이번에도 왕이 흑막이죠?”
서대륙 전체를 통솔하는 거대 제국 필라기리아, 그곳의 왕이 문제였다.
“...맞습니다. 왕 아들러 프리브룩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용사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전쟁은 어린애들 공기놀이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쉽다는 생각이죠.”
“그럼 그렇지.”
왕을 혼내주기 전까지는 우릴 귀찮게 할 게 뻔했다.
용사를 부하처럼 부려먹으려는 심보도 아니꼬왔다.
멋대로 우리 용사를 이 세계에 불러들인 걸 넘어갔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기가 윗사람인 양 뻐대고 있으면 칼 맞는다는 얘기다.
“하아... 잘 살라고 마왕까지 물리쳤더니 인간 병기 취급이나 당하고 있네.”
“입장 표명을 해야겠는데.”
“공식적으로?”
“아니, 나 암기 용사잖아. 당연히 비공식적으로지.”
최세린은 단검과 내게 건네받은 열 번째 사슬을 챙기며 내게 턱짓했고 나도 그에 맞춰 오랜만에 가방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 τηλεμεταφορ 텔레포트 }”
지이잉
지팡이로 원을 그려 주문을 읊자 거실 한복판에 푸른색 차원문이 생겼다.
경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담는 패이를 보며 말했다.
“그쪽도 가야 되잖아요. 사양 말고 사용하세요.”
“아... 저는 혼자서 갈 수 있습니다.”
패이는 우리가 불편했다.
“뭐, 알아서 하시고... 허튼 수작 부리면 곧장 이 여자가 찾아갈 겁니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좀 말이 통하네.”
빙긋 웃자 조금은 긴장이 풀린 패이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도 내 클론을 죽였을 때의 태도와는 판박이었다.
“저...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여기 뭉개고 있으려고요?”
“가보겠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직된 표정의 패이를 뒤로하고 차원문을 건넜다.
그 너머는 내 마탑이 있는 지역 데미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