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전쟁의 상징
* * *
“어이! 잠깐 나 좀 보지그래?”
사내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지름길인 숲을 가로지르려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저분한 행색에 우락부락한 무기를 무장한 다섯 명의 거한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
“어허, 안 되지 안 돼. 목적을 말해줘야겠는데?”
“알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좋은 일 하려는 건 아닌가 봐?”
한번 해보자는 것일까, 아니면 이곳의 수문장이라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해봤으나 괜히 복잡한 건 질색이었다. 사내는 얌전히 바닥에 가방을 내려놨다.
“그냥 보내달라니까...”
“으음, 미안한데 이곳은 지나가면 안 되거든. 저쪽으로 쭉 돌아서 가면 되잖아?”
“음, 그건 많이 귀찮은데.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어이고, 젊은 놈이 벌써 귀가 어둡나...”
“그렇다 치지 뭐. { Ενσχυση του σματο 신체 강화 (α,τ,ρ) }”
싸아아아...
그의 온몸이 냉기로 뒤덮이자 분위기가 급변한다.
장정 중 한 명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마법...? 이 새끼 마법사야!”
“쫄지 마! 마법사면 더 위험한 놈이야. 족쳐!!”
포부 넘치는 대사와는 다르게 누구도 선뜻 덤비지 않았다.
이들도 느끼는 것이다.
설령 저들 중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자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쳤을 테지만, 아쉽게도 이들 중에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아, 미안. 마법은 취소하는 게 낫겠다. { Ματαωση 캔슬 }”
본게임 들어가기 전에 몸풀기인데, 너무 힘쓰면 안 되지.
요즘 몸이 굳었다곤 생각했다. 마법에만 너무 의존하면 감각이 무뎌지니 맨몸 운동도 가끔은 필요했다.
이러한 판단이 서자 사내는 즉시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던 놈이 묵직한 둔기를 휘둘렀다.
부웅!
소리만 듣고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정직한 공격이다.
살짝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우습게 피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반격. 주먹을 말아쥐어 놈과의 거리를 삽시간에 좁힌 후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끄아악!”
풀썩
흙바닥은 제법 푹신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다른 4명을 바라봤다.
“그냥 보내줘. 아니다. 하나만 좀 물을게. 여기 근처에 용사 한 명이 살고 있을 텐데, 암기 용사 진 키아라라고. 알아?”
“방금 몸놀림... 모두 조심해! 보통 놈이 아니야!”
“대답이나 해줘. 진 키아라 어디 있냐고 묻잖아.”
“대답할 이유는 없을 텐데!”
이들은 포위망을 좁혀오며 동시에 덤볐다.
그 기세는 좋았지만 팀워크는 최악이었다.
타이밍만 잘 노렸더라면 막아내야 할 공격도 있었을 텐데, 놈들은 오합지졸이라는 걸 증명하듯 굉장히 중구난방하게 사내를 공격해왔다.
“이상하다. 이 근처 맞을 텐데...”
“끄아악!!”
한 명이 왼쪽 눈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진다.
“그럼 단발 여자는 못 봤어? 얼굴 엄청 새하얀데.”
“악! 내 팔! 내 파아알!!”
한 명은 팔이 기괴하게 꺾인 채 바닥에서 뒹굴며 고통에 호소한다.
“아니다. 그럼 그냥 여자는 못 봤니?”
“끄, 끄으으윽! 죽이라고! 죽여!!”
다른 한 명은 자기 가슴팍에 올라온 사내의 신발을 붙잡으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 포부 넘치는 대사에 반도 못 따라가는 실력이었다.
몸풀기도 안 되는 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실망 역력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엄살들이 심하네... 아무튼 그쪽은 안 때렸으니까 대답해. 흑발 여자 못 봤냐고 묻잖아.”
“에... 에취...!! 살,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얼음에 얼굴만 빼고 모두 갇혀버린 마지막 장정이 오줌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사내에게 잘못을 빌었다.
“살고 싶으면 묻는 말에나 대답해. 여자 못 봤냐고.”
“그, 그으으! 여자는 못 봤고 다른 사내는 봤습니다!”
“누구? 어떻게 생겼는데?”
“180 약간 안 되는 키에... 맞아, 굉장히 잘생겼습니다. 진짜 너무 잘생겼어요!”
‘농담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 상황에서 농담을 뱉을 강심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잘생겼길래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주목적은 암기 용사지만 그 사내라는 자에게도 관심이 생겼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데?”
장정에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눈알을 제외하곤 없었다.
목숨이 위태롭다. 그는 성급히 눈알을 굴리며 숲 안쪽을 가리켰다.
“저어어기. 제 뒤에 있는 숲 쪽으로 쭉 들어갔는데... 이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사내라서... 그보다 그 여성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글쎄, 묻는 말에나 대답하지그래?”
“아니,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아요. 대답에 따라서는 알려줄 수도 있는뎅.”
“얘기나 좀 나눠볼까 하는데, 그 말투를 보면 별로 삶에 여한이 없나 봐. 뭐, 너 말고 다른 놈들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굳이 이 강도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사내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위로 치켜올렸다.
그대로 놈의 눈알을 푹 찍었다. 그러자 느껴지는 손맛이...
이상했다. 도저히 사람을 죽인 느낌이 아니었다. 인형을 찌른 듯한 느낌.
“쟤가 계속 너 찾는데?”
“농장 손님 아니야?”
“아니야, 인심 후한 농장 주인아줌마가 아니라 암기 용사 찾고 있잖아.”
“...오빠, 뒤질래?”
당황하기도 잠시, 저 멀리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내는 성급히 마법을 온몸에 두르려고 했지만, 이미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내가 쓰러트린 5명의 장정이 얼음처럼 녹아내려 흙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니라 냉기 속성 클론...?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 마법은 7서클 이상이 돼서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야. 그리고 이토록 사람 같은 클론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법 주도권뿐만 아니라 신체의 주도권까지 빼앗긴 것일까?
고개를 내려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니 살얼음이 끼고 있었다. 발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독이 퍼지듯 서리가 드리우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사용하던 거 오빠 마법이야?”
“본질은 같아. 근데 저건 저 사람이 응용한 버전이지. 내 제자보다 낫네.”
“책 더럽게 못 썼던데 어떻게 독학했대.”
“세린아, 너야말로 뒤질래?”
두 개의 인영이 숲에서 서서히 다가온다.
거리는 제법 됐지만 사내는 직감했다. 저 둘의 존재는 인간을 초월했다고 말이다.
여성 쪽은 놀라우리만큼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앞에 마주하고도 기척을 못 알아챌 것만 같은 한없이 0에 가까운 마나였다.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사람뿐만일까?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경악스러운 건 그 옆에 걸어오는 사내였다.
무식하리만큼 방대한 마나다. 마치 드래곤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
저런 사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어떻게 몰랐을까? 같은 마을... 아니, 같은 나라 안에 있어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마력인데 도대체 어떻게...
“저를 찾으셨다고요?”
여성이 남성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으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토록 찾던 여자였다. 흑단발의 날카로운 인상.
진 키아라, 암기 용사가 그의 앞에 있었다.
"좋은 일로 찾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쵸?"
그녀는 중의적 의미로 얼어버린 사내의 턱을 잡아당겨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이게 암기 용사 진 키아라...'
그녀의 손길은 놀라우리만큼 차가웠고 시선은 그보다 더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인형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못... 못 이겨.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남녀를 마주하자 사내의 전의는 꺾였다.
이 여성과 옆의 사내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온몸이 공포로 떨리지도 않는다.
몸 떠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그의 온몸에는 냉기가 잠식했다.
“누가 보냈어요?”
“...죄, 죄송합니”
털썩.
사내는 공포심에 눈을 뒤집어 까고 기절했다.
그를 본 악쿤 토든은 진 키아라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기술이야?”
“위압(??). 힘조절해서 한두 시간이면 깨어날걸."
*
동료가 필요했고, 나랑 뜻이 가장 맞는 사람은 최세린(진 키아라) 단 한 명이었다.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내 시그니처의 시연이었다.
“나보고 그런 마법을 상대해 달라고? 그게 3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할 소리야?”
선물이라도 사왔어야 했던 걸까. 최세린은 나를 반기지 않았다.
“왜? 너도 나랑 똑같은 용사잖아. 다른 사람한테는 제대로 실험해볼 수 없다고.”
“제자들도 많았다며. 그리고 철수 아저씨도 있잖아. 정 안 되면 재홍 오빠도 있고.”
“제자는 내가 진심으로 하면 그냥 죽으니 안 되고, 철수 형은 지금 행방불명이잖아.”
“재홍 오빠는?”
“장난치는 거 아니지?”
잠시 아까의 사내가 틀어박힌 방에게 흘깃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듯하니 숨김없이 얘기해도 괜찮았다.
시시한 잠담이 재밌는 건 일시적이다. 이제 슬슬 진짜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
“그래, 시그니처 얘기는 잠깐 미루고,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위험한 곳이면 안 가.”
“아니, 너는 같이 가줄걸?”
4년 전 마왕을 물리치러 마왕성에 침범한 마지막 전투.
그때 흑마장 메이블 토진과 마왕 단탈리온이 보였던 태도는 석연찮았다.
그들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세 명의 사천왕과 마왕군 전체에게도 공통적인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나는 최세린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성에 찾아가려는 거니까.”
그때 최세린이 보였던 표정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한다. 내 앞이어서 조금 풀어진 것도 있겠지만, 암기 용사가 내비칠 표정은 절대로 아니었다.
“......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 아니, 대체 거기 가서 뭐 하려고? 잔당 처리라도 하려고?”
“그건 아닌데... 아무튼 준비는 끝났어. 너는 몸만 오면 돼.”
가방을 열어 찬란한 백색 돌멩이 더미를 보여줬다.
“돌멩이... 마석이네. 그것도 하나같이 최상급.”
“정확하게는 시간의 파편이지. 금기 중 하나인 시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더럽게 비싼 일회용 촉매.”
마탑에서 벌어들인 내 자본이 바닥난 것도 이 돌멩이들 때문이다.
최세린은 잠시 그 시간의 파편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너무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오빠가 시간의 파편 어디다 쓰려는지 나 알 것 같아. 말해볼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놀란 표정을 거두고 특유의 차가운 시선으로 날 훑고 있는 최세린이 보였다.
“이미 죽은 마왕과 사천왕을 다시 만나려는 거야. 그것 때문에 시간 파편을 대량으로 긁어모았고, 혹시 전투가 펼쳐질 수도 있으니 시그니처를 나를 상대로 실험해보려는 거지.”
“정답! 역시 눈치는 엄청 빠르다니까.”
“미친, 난 절대 안 해. 또 사지에 몸을 밀어 넣으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글쎄, 넌 따라오게 될 거라니까.”
철그렁
내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가방에서 기다랗고 시커먼 쇠사슬이 쭉 빠져나온다.
그걸 보자 최세린의 무표정이 경악과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사천왕 긴의 무기인 ‘열 번째 사슬’이야. 너는 녀석의 의도가 궁금하지 않아?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째서 널 죽이지 않았는지 말이야.”
“차, 참나. 그걸 또 어디서 구해왔대.”
“할래, 말래?”
“...잠깐만, 너무 얘기가 급작스럽잖아.”
끄, 끄으으...
신음과 함께 방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