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이 선사한 9개월을 나는 매우 충실히 보냈다. 로즈마리 블로썸, 플로렌스 벨, 뭐든 간에 찰랑거리는 금발과 제비꽃 같은 눈동자를 자랑하는 여자애는 당연하겠지만 등장하지 않았다.
소중한 내 소꿉친구, 피츠시몬스를 거친 모든 빌라드를 통틀어 가장 악마적인 빌라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나의 5학년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
시스템은 사라졌지만 몇몇 잔재를 남겼다. 학생회 애들의 매끈한 면상 위로 아른거리는 반짝이 효과를 볼 때마다 엄청 웃겼다. 사람들 머리 위의 ‘칭호’도. 카일이 더는 아카데미에 없는 탓인지 그것은 이제 상태 창이 사라진 내 시야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카일이 그랬듯이, 싫어도 아카데미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었다. 순기능도 있었고 역기능도 있었다. 말하자면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가십만을 모아 편찬한 <일간 달튼>으로 가짜 언론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건 순기능이라 칠 수 있었다. 일간 달튼의 뒷면 귀퉁이에는 항상 브레넌 스톡스의 자작시가 실렸다.
반면 월시랑 헤어지겠다고 여섯 번째 맹세한 브리아나가 걔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여전히 ‘애덤 월시의 여자 친구’ 칭호를 달고 있는 건 너무 싫었다.
브리아나와의 관계는 의외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내가 홍당무처럼 빨간 머리에, 여름에 우거진 녹음과도 같은 녹색 눈을 가진 애랑 사귀는 중이라고 계속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제법 미남인데, 몸도 좋고, 그리폰 크리켓에도 뛰어난 데다가 탤론시청 마도구 관리부서에 채용될 만큼 똑똑한 애 말이다.
그랬더니 브리아나는 내가 소설이나 연극 속 가상 인물에 푹 빠졌다고 여기는 모양새였다. 걔는 정이 너무 많아서, 정신병을 앓는 듯이 보이는 건 브리아나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기에 딱 좋았다. 나는 브리아나의 오지랖을 거부하지 않는 대신 그녀와 친구 먹길 택했다.
켈리가 ‘장례 희망’으로 전 남친을 못살게 구는 게 실은 그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라는 걸 지난 5학년을 통해 알았다. 만일 케이시가 메이나드처럼 진짜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면 켈리는 죽음과 맞짱이라도 떴을 게 분명했다.
골탕을 먹이는 식으로밖에 호감을 표현할 수 없는 비뚤어진 친구의 등을 밀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하도 개난리를 쳐서 켈리는 케이시랑 딱 한 번 데이트를 했다. 바로 이튿날 재결합을 했다 하기에 그만 정신이 혼미했다.
중매쟁이 노릇만 하는 건 아니었다. 무려 천지가 개벽하였어도 개자식은 여전히 개자식이었다. 애덤 월시와, 도넬리 준남작 말이다.
월시는 언제나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으므로 그를 내 절친으로부터 떼어 놓는 건 보기보다 수월했다. 아나이스는, 그녀의 성서에 ‘참지 않도록 하라’를 새겨 넣기 위하여 나는 밤낮 없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어쨌든 결과가 성공적이니 다행이었다. 만일 실패했더라면 내게 남는 거라고는 못 말리는 여색가에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의 악성 추종자라는 오명뿐이었을 테고, 그러면 진짜로 엄청나게 시간을 돌리고 싶었을 테니까.
블로썸이 금화를 풀지 않아서 엘리자베스의 2학기 등록금은 무사했다. 마력선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리폰 크리켓 경기장에서 청혼한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선수들이 쳐서 날린 마나탄이 하늘에 작성한 청혼서에 엘리자베스는 무지 기뻐했다.
그리폰 크리켓부는 용병 길드 이상으로 금화에 울고 웃는 집단이었다.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 브레넌은 올해도 마법 자물쇠를 판매해야 했다. 나는 카일이 어리숙한 일 학년 애들을 어떻게 등쳐 먹었는지 되새기며 동화에 금박을 입힌 걸 거스름돈이랍시고 들이밀었다.
카일의 빈자리는 컸다. 때때로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느꼈다. 하피 똥 폭죽을 왕창 샀는데 나눠 줄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나, 소토의 방 문짝에서 ‘빌라드’가 전부 도려내진 것을 발견했을 때. 그러나 아나이스 근처에서 으스대는 메이나드와, 주말마다 켈리와 팔짱을 끼고 쏘다니는 케이시를 보면 기분이 나아졌다.
후회는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만은 모든 사람의 삶이 전부 동일한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외모나 성격이나 지위가 아무리 달라도 말이다. 처음 운명의 물레를 봤을 때 실감개에 둘린 실들은 완전히 똑같이 반짝이는 중이었다.
치열하게 살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었다. 일례로 올해 내 성적은 아주 뛰어났는데, 마과학에서는 심지어 A-를 받기까지 했다.
휴스턴 교수는 내가 저학년일 때도 마과학을 가르쳤으므로, 나의 성취에 엄청나게 감명받은 듯했다. 제발 마과학 연구실에 지원해 달라고 하도 붙잡아 가지고 골머리를 좀 앓았다.
그리하여 졸업 연회에 참석하는 내 모가지는 여느 때보다 꼿꼿했다. 리본으로 복잡하게 꼬아 올린 다음 군데군데 들꽃을 꽂은 머리 모양 때문이기도 했다. 안개꽃과 톱풀 위주로 다양한 톤의 블루벨을 곁들인 리본 장식은, 환상적이긴 했지만 상당히 거추장스러웠다.
턱을 치켜들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컵케이크가 놓인 테이블로 가면서 몇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으나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말로만 미안하다고 했다.
맨 처음에 부딪힌 사람이 줄곧 나를 따라왔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은 고오귀한 귀족가 후계인 줄 알고 팔짱을 낀 채 돌아섰다. 뜻밖의 미모가 갑자기 눈을 공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했다.
“푸른 드레스가 네 눈동자 색과는 더 잘 어울렸을 텐데.”
시스템이 남긴 잔재 중 가장 커다란 것은 기억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운명의 물레에서 벗어난 이력이 있는 일부의 뇌리에는 기억의 파편이 여기저기 박혔다.
파편의 생김새는 개개인이 달랐다. 이를테면 마르퀴즈 볼턴은 죄다 까먹었거나 그런 체를 하는 것 같았다. 제이든 스펜서는 아니었다. 하기는 고귀하기가 신에 필적하는 초월자이자 불멸자인데 필멸자랑 같은 취급을 받으면 면이 안 살았다.
한편 쌍둥이는 무의식 저변에 묻어 둔 기억을 문득문득 꺼내곤 했다. 특례 입학생 없이 새학기가 시작된 바로 다음 날 브라이스 나돈과 마주쳤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네가 아냐’라고 하더니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그거 말고는 그들이 지난 5학년과 다르게 구는 지점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과 필요 이상의 접점을 만들지 않고 사마귀의 영혼을 찾아 주기 위해, 나는 영혼석의 발생 원리나 특징 등을 설명하느라고 <일간 달튼>의 지면을 전부 썼다. 꿀벌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동화로 각색하여 싣기도 했다. 글솜씨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동화 작가의 필명은 ‘익명의 자작가 영애’였다.
그 짓을 티 안 나게 반복하자 나돈의 계승 전쟁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풍문이 들려 왔다. 쌍둥이 왕자가 자퇴서를 내고 피츠시몬스를 떠났다는 소식도.
뒷공작 아닌 뒷공작의 바라마지않던 성공에 방심한 내 앞에, 검은 후드를 눌러 쓴 갈색 피부의 남자애가 나타났다. 덕분에 어머니를 구했으니 여간 운명적인 사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에드가 라모스의 붉은 눈은 월시의 발가락 털을 태워 버리던 시절과 닮아 있었다.
켈란의 기억은 매우 온전한 편에 속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도 느꼈지만 켈란 일레스티아에게는 은근히 질척이는 구석이 있어서, 그는 카일의 일시 부재를 둘도 없는 기회로 여기며 대부분의 연회에서 내 옆구리에 드레스를 찔러 넣었다. 그의 연회복과 정확히 같은 색으로.
탐이 전혀 안 났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아라크네 실크로 만든 드레스를 입는 건 거의 모든 여자애의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상 인물이 아닌 내 남친이 그걸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눈물을 머금고 재봉사들을 돌려보냈다.
메건이나 볼턴을 통해 나를 은근히 압박하는 일레스티아의 철권 황제 역시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케이틀린 대제만큼은 기억을 잃기를 바랐는데, 세상사가 마냥 녹록지만은 않았다.
“미안, 나 이거 마지막 목숨이거든.”
그래서 이렇게 말하니까 켈란은 목을 울려 웃고는 연단으로 갔다. 입학생 대표가 켈란 일레스티아였듯이 졸업생 대표 또한 그였다.
푸른 옷을 입은 금발의 황태자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 거대한 손을 묵묵히 내밀기에, 컵케이크를 올려 주자 한 입에 털어 넣고 댄스 홀을 가리켰다. 나는 내 친구가 계속된 거절에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능청스럽게 눈썹을 들썩였다.
“감히 위대한 존재의 발등을 구두 굽으로 또 난도질할 수는 없지.”
그러자 제이든은 별다른 반응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기다리는 거야.”
“뭘?”
“내 차례를.”
내가 봤을 때 그건 춤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한 데로 잘못 넘어간 컵케이크를 캑캑거리며 토해 냈더니 제이든이 무뚝뚝한 얼굴로 성실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잖아.”
“나도 인간이야, 제이든. 카일이 죽을 때는 나도 죽는다고.”
내 말에 그는 눈만 휘어 미소 지었는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팔뚝을 문지르며 다른 테이블로 갔다. 완전 깜찍하니 천사 같은 애였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나는 그가 적당히 약아지기를 바랐지 집요해지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모든 남자는 짐승이야, 미스 달튼. 절대 믿지 마.”
과일 펀치가 놓인 테이블에서는 절친이 나를 반겼다. 고블릿 잔에 가득 담긴 과일 펀치를 단숨에 넘긴 브리아나가 음산하게 지껄였다.
잠시 제이든이 실은 용이라는 게 들통이 났나 생각했는데, 그냥 얘의 개인적 견해인 듯했다. 월시에 이어 커크패트릭에게도 크게 덴 브리아나 모슬리는 요사이 다리 사이에 다리가 더 있다고만 하면 들이받으려고 들었다.
수확의 달 연회에서 브리아나의 늠름한 모습에 반했다고 들이대던 스테판 커크패트릭은 알고 보니 늠름한 여자가 아니라 늠름한 여장남자가 취향인 자식이었다. 그가 예배당에서 가발 쓴 남자랑 뒹굴다가 발견되는 통에 온 피츠시몬스가 난리였던 적이 있었다. 에드가가 그의 첫사랑에 대해 말해 줬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내 남친은 꼭 돌아올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대자 브리아나가 연민에 젖은 표정으로 과장스레 끄덕였다. ‘꼭 그럴 거야.’ 놀리는 투로 말하기에 짜증이 났다.
미간에 힘을 주고 브리아나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그녀의 상태가 여간 심상치 않은 게 눈에 들어왔다. 볼하고 이마는 새빨갰고, 혀와 발은 자꾸 꼬였다. 꼭 얼근하게 취한 주정뱅이 같은 모양새였다.
“연회 전에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온 거야? 얼굴이 막 터질 거 같은데?”
“술은 무슨 술이야,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였구만.”
핀잔하며, 브리아나는 고블릿 잔에 새로운 과일 펀치를 담았다. 오렌지와 자몽의 톡 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알싸한 알코올 향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펀치에 술 탔어?”
브리아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더니 그녀는 갑자기 무도하게 구는 나 때문에 화들짝 놀란 듯했다. 휘둥그레 커진 눈동자가 순간 탁하게 가라앉았다가 도로 명료해졌다. 아주 해묵은 책에 꽂아 놓은 책갈피를 불현듯 찾아낸 듯이 말이다.
“뭐야, 이거 술 들었어? 그래서 아까부터 기분이 좋았구나…. 너 아니면 빌라드겠지 뭐. 네가 모르는 거 보니까 빌라드네.”
“빌라드? 카일?”
“네 남친 말고 빌라드가 또 있니?”
내 남친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코나 시큰해질 줄 알던 브리아나 모슬리의 반응이 명백히 바뀌었다. 나는 머리 모양이 망가지건 말건 주위를 연신 돌아봤다. 후두둑 떨어지는 안개꽃과 톱풀과 블루벨 사이로 휴스턴 교수와 시선이 맞았는데, 그는 내게 볼 일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가 버렸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숨이 콱 막혔다. 나는 손을 쫙 펼쳐 입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카일 다미앙 빌라드!”
있는 힘을 전부 쥐어짜 내뱉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왜 그래, 갑자기!”
덩달아 관심을 받게 되니 브리아나는 사뭇 당황스러운 듯했다. 그녀가 내 소매를 잡아끌며 속삭였다.
“넌 내 최고의 친구고, 가족이고, 예정에 없던 휴일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마침 마법 인형 악단이 연주하던 음악도 끊긴 시점이어서, 내 목소리는 어떠한 방해도 없이 연회장을 종횡무진 활보했다.
“너는 해 질 녘 바다에 비치는 노을이야! 순항 중인 배의 기분 좋은 흔들림이야! 릴루 발바닥에서 나는 냄새고, 마지막에 남은 슬라임 푸딩이야!”
누군가 과일 펀치에 술을 탔다. 하지만 휴스턴 교수가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브리아나는 더 이상 그녀의 룸메이트를 정신병자거나 몽상가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나도 널 사랑해!”
우는지, 웃는지, 하다못해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채 무아지경으로 부르짖었다. 속으로 막 치미는 단어들을 뱉어내지 않고서는 당장 고꾸라져 죽어 버릴지도 몰라서였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감각이 허리를 감싼다 싶더니만 뒤로 확 끌어당겨졌다.
허리에 둘린 팔뚝은 볕에 약간 그을린 채였고 핏줄이 바짝 서 있었다. 즐거움이 잔뜩 담긴 웃음소리가 귓불을 깨문 다음에는 난폭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등과 맞닿은 가슴팍을 통해 전해졌다. 또 어깨를 간지럽히는 숨결. 볼 여기저기로 분별없이 내리눌러지는 입술. 열기에 가까운 온기. 모든 요소에서 싱그러움을 느꼈다.
“졸업 축하해, 아리.”
마침내 그리운 음성이 울려 퍼진 순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행복이 뱃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혀끝에 담아, 나는 카일의 인사를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돌려주었다.
졸업 축하해, 아리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