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77화 (177/178)

마구 소리 지르며 카일의 팔뚝을 쳤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더듬어 깍지 끼며 중얼거렸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다정한 온기로 차올랐다.

“내가 너를 이길 리가 있나.”

내가 애틋이 여기는 남자애의 패배 선언은 빌어먹게 달콤해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단어들이 죄다 사랑의 밀어처럼 느껴졌다. 실은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도 말이다.

“터미널이 닫히면 못 나가게 되는 건 플레이어뿐만이 아냐.”

“잠깐, 그건….”

“이제 정말 숨기는 거 없어. 변하는 것도 없고. 나는 물레를 부술 거야. 너는 플레이어를 돌려보내면 돼.”

카일은 터미널에서 물레를 부수고, 나는 터미널 바깥에서 플레이어를 돌려보낸다. 그런 다음엔? 부지불식간에,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충동이 일었다.

못 들은 셈 칠까?

멍하니 입을 떼자 바짝 마른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굴면서 당장 플레이어를 끌고 오겠다고 할까?

엉겅퀴를 삼킨 듯이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그러면, 걔 하나만 희생한다면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전부 행복할 수 있는데.

다음 순간 얼굴에 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부적절한 번제로 얻어 낸 구원에 어떠한 가치도 없음을 알았다.

더구나 내 손을 꽉 쥔 카일의 표정이 지나치게 단단했던 것이다. 그건 어깨가 완전히 여문 열아홉 남자애를 반찬 투정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대신 로티세리 조리법을 익히길 택한 빌라드 저택의 고집쟁이 도련님처럼 보이게 했다. 달튼의 작은 악마를 감탕나무 꼭대기까지 이끈, 내가 푹 빠졌던 소년.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누군가 기적적으로 닫히지 않은 출구를 찾아낸다면 그건 터미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내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카일….”

“내가 시작한 일이잖아. 끝내는 것도 나여야 맞지. 사실 네가 플레이어와 함께 나타나지 않아서 절망적인 한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네 말대로 거기까지 비열하지는 않은가 봐, 나.”

“아냐. 이건 아니라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더 좋은 방법이. 예를 들어, 마법 인형을 부려서 물레를 파괴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출구에 돌을 괴어 놓으면 안 닫히지 않을까? 또….”

“아리. 아리엘. 나 좀 봐.”

마법 인형? 굄돌? 어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껄였다. 아무튼 그만큼 절실했던 까닭이다. 물레의 남은 부분에 자폭 버튼이라도 있는지 살피던 내 고개를 카일이 나긋하게 잡아 끌었다. 이윽고 눈이 마주쳤다. 갈피를 잃은 마음을 부드러운 눈빛이 어루만졌다.

“다른 방법은 없어. 혹여 있다 해도, 나는 가장 옳은 방법을 택할 거야.”

나는 순식간에 그를 설득하는 것이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겠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매우 우울해졌다.

“어쩌면 금방 잊을지도 몰라. 어쩌면 잊는 게 나을 수도 있고. ‘남친’이라고 표현해 줘서 기뻤지만, 내 생각에 네가 장거리 연애를 버틸 수 있을 만한 위인은 아니라서. 기왕이면 바로 잊어 줬으면 좋겠네.”

내 소꿉친구, 남친은 정말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다양한 로맨스 소설을 독파하던 시절,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댈 적마다 낭만에 닥치는 여러 형태의 고난을 상상했다. 삼각관계나 부모님의 반대, 하다못해 변태적인 취미까지도 말이다. 변태 취미는 극복할 수 있었으나 장거리 연애는 그러지 못했다. 지독한 팔랑귀에, 참는 법을 모르는 데다, 의심도 질투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 관해 빠짐없이 알았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눈초리를 뾰족하게 하자 카일은 샐쭉 혀를 내밀었다.

“미안, 또 거짓말했어. 나를 잊지 마, 아리엘. 네 ‘남친’ 자리에 다른 자식 이름을 올리지 마. 질투 나서 콱 뒈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너의 불행을 비는 건 아니지만, 나 없이 너무 많이 행복하지는 말아 줘.”

그건 내가 들은 카일 빌라드의 발화 중에 가장 날 것에 속했다. 나는 속절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인지 눈물은 안 나왔다. 켄드라 브래들리가 브래들리 공작 부부의 관 앞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그건 흡사 내 몸뚱어리가 나에게 슬픔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여겨졌다.

되게 서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픔에 잠길 여유가 없는 게 맞는다고 느꼈다. 켈란과 짧지 않은 공방을 주고받았고, 카일과도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레이어에게는 이제 낙관하기 어려운 만큼의 시간만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해일처럼 나를 덮치는 애수에 가까스로 휩쓸리지 않은 채 똑바로 섰다.

“다시 만나.”

내가 내민 새끼손가락은 스스로 보기에도 안쓰럽게 떨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욱 난폭하게 굴었다.

“꼭 다시 만나. 약속해. 나 약속 지켰잖아. 이기적인 선택,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약속하라고….”

그러자 카일은 내 손가락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그 위에 입술을 댔다. 그가 말했다.

“아리엘, 아리, 내 최고의 친구, 가족, 모든 좋은 것…. 밤하늘에 빛나는 가장 밝은 별, 잠에서 깰 때 눈꺼풀을 간질이는 바람, 겨울 아침에 드는 볕. 사랑이라는 통속적인 단어로 표현하기 싫을 만큼 너를 사랑해.”

맹세의 말이 아니었다. 긍정의 의미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다만 들은 중 최고로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었다. 어떤 기묘한 확신을 주기에는 충분한.

대꾸 없이 돌아섰다. 작별 인사는 필요 없었다.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었으므로.

***

앞만 보고 갔다. 죄 사함을 받고 지옥문을 나서는 스티아 신도처럼 말이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우울감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가능한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끝끝내 목전까지 다가온 졸업의 꿈과 놀고먹는 상단주가 되어 보낼 나날들. 내가 최고로 아끼는 모자에 얹힐 포도송이 모양의 보석. 또 카일의 목소리. 다양한 행복에 빗댄 사랑 고백.

마녀의 길을 빠져나와 아카데미 정문을 지나면서 정작 내 쪽에서는 카일에게 사랑을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크게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게임의 서브 캐릭터와 배경 인물이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며 보낸 지난 9개월, 쌓아 올린 돌탑을 망칠 어떤 가능성도 용인하고 싶지 않았다.

3월의 피츠시몬스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어김없이 펄럭이는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 현수막 아래로 튤립이 왕창 피어 있었다. 봄바람에 울렁이는 흰색과 분홍색 꽃을 구경할 겨를도 없이 뛰었다. 엉망진창으로 찢어지고 망가진 미색 드레스로 몸뚱어리의 일부만을 가린 채 말이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연회장까지 가는 도중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수상쩍게 지저분한 드레스를 연회도 없는 날에 걸친 까닭을 궁금해했을 테니까. 내게는 그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거리도, 입방아에 또 찧어질 자신도, 그릇된 선택을 주워 담을 기회도 없었다. 시간은 이제 한 방향으로만 흐를 것이다.

연회장 문은 허무하리만치 부드럽게 열렸다. 문을 막고 있던 연회복 구울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연회복 구울뿐만 아니라 다리의 생김새가 우아한 테이블과 밑단에 술이 달린 테이블보, 각종 다과 역시 온데간데없었으며, 입학식의 여파가 남아 바람 빠진 풍선과 종이 가루들만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댄스 홀 중앙에, 여자애가 쓰러져 있었다. 부스스한 검은 머리는 턱을 스치는 길이로 잘린 채였으며 매우 생경한 스타일의 의복이 눈에 띄었다. 얼핏 짧은 튜닉처럼 보이는 상의의 네크라인은 둥글었다. 바지는 아주 길었고 잘 관리된 양털보다 푹신푹신했다.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금색이 아니고, 눈동자가 보라색이 아니어도 말이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시간이 돌아가고, 게임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와중에 사라진 줄만 알았던 내가 등장하니 플레이어는 겁에 질려 버린 듯했다.

“마, 만족하니?”

망연자실하여 내 쪽을 보던 그녀가 문득 내뱉었다.

“더, 덕분에 나는 더 이상 피츠시몬스에 못 다니게 됐어.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미래는 부, 불투명해졌어. 공략 대상의 호감, 도는 물론이고, 게임에 대한 토, 통제력마저 잃었지. 게다가 내 현실은, 삶은 고작 십이 초만이 나, 남았단 말이야. 가짜 주제에, 한낱 데이터 주, 주제에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으니 마, 만족이 되냐고!”

플레이어의 기준으로 십이 초라면 내게는 오 분가량이었다. 나는 씩씩대며 외치는 플레이어에게 가까이 가서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뒤에는 미친 듯이 달리는 동안에도 용케 버티던 스티아 신의 티아라를 벗어 들었다. ‘MAX’로 가득하던 상태 창이 본래 형태를 되찾았다.

손가락에 걸고 있던 티아라를 플레이어의 머리카락 사이에 꽂아 넣자 금색 기운 일부가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주춤거리며 허리를 빼던 플레이어가 만면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네 진짜 이름을 몰라. 솔직히 말해서 궁금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냥 플레이어라고 부를게.”

“뭐, 하자는 거야?”

“잘 들어, 플레이어. 지금부터 내가 근 9개월간 죽어라 모은 증표들을 너에게 넘길 거야. 너를 다시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면 네 시야에는 온전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떠오르겠지. 로그아웃 버튼도.”

지껄이며, 나는 손목에 둘리어 있던 성녀 에이레네의 묵주를 풀어내었다. 그것을 플레이어에게 들이대었더니, 그녀는 내가 묵주로 자기 목을 조르기라도 할 듯이 경기를 일으켰다. 내가 자기인 줄 아나 보았다.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제압했다. 일시적으로 가당치 않은 숫자가 되어 있던 나의 지력 수치는 다시금 지극히 친근해졌다.

“시스템은 곧 무너져. 그게 끝장나는 순간, 터미널의 문이 닫히고 운명의 물레가 완전히 가루가 되는 순간. 네가 로그아웃 버튼을 누를 유일한 기회야. 진정 ‘현실’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놓치지 말도록 해.”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끄를 때 플레이어의 만면에 아른거리던 물음표는 의구심과 두려움, 불안이 뒤섞인 덩어리로 변했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 마담 바틀렛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쪼개져 들어온 여러 갈래의 빛이 크게 홉뜨인 그녀의 눈동자를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들였다.

“만족하냐고? 전혀 만족 못 해. 장거리 연애하게 생겼단 말이야. 너 때문에.”

이그나스의 비늘은 내 드레스의 옷깃에 달려 있었다. 허리에 대충 늘어진 장식끈으로 꿰어 목걸이처럼 만든 다음에 걸어 주었다. 어리숙하게 고개를 숙이는 태도에서 다소의 귀염성을 느꼈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마지막으로 시종 말아 쥐고 있던 오른 주먹을 펼치자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가 나타났다. 카일의 증표를 하필이면 플레이어의 품에 넘기는 건 확실히 살짝 망설여졌다.

나는 손아귀의 열로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회중시계 뚜껑에 입술을 꾹 눌렀다. 조금 밍기적거리다가 내밀었다. 플레이어가 그것을 움켜잡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휘몰아쳐 들어온 바람이 연회장 내 풍선을 모조리 띄웠다. 알록달록한 종이 가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영웅의 귀향 같은 것을 축하하는 듯이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 생각에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나를 향한 축포는 아직 터질 때가 안되었다.

“다, 달튼….”

종이 가루 폭풍에 완전히 묻히기 직전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무심코 귀를 기울이고 싶어질 정도로 가냘팠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으나 이마며 볼때기에 치덕치덕 붙는 종잇조각 때문에 플레이어의 모습은커녕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엄청나게 강한 빛이 눈꺼풀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낯선 옷을 입은 검은 머리 여자애가 있던 자리에는 언제 날뛰었냐는 듯 얌전히 가라앉은 종이 가루들만이 내 약을 올리는 중이었다.

플레이어가 사라진 연회장에서, 나는 오래도록 감정의 스튜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연회장을 나와서는 한참 헤매었다. 내 발이 가야 할 길을 닦아 주던 물레가 사라지니 불현듯 어두운 숲 중간에 떨어진 듯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산책로에 접어들 즈음 손바닥에 온기가 스쳤다. 그건 체인질링일지도 모르는 빨간 머리 남자애와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것이었다. 조금 울고 나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적어도 숲 중간에 떨어진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탓이다.

함께 숲을 방랑하며 웃기게 생긴 버섯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야생 딸기를 나누어 먹는 것도 충분히 즐거우리라고 확신했다. 가끔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픽시가 파 놓은 구덩이에 발이 빠지더라도 말이다.

또한 나를 기다리는 사람과 내가 기다리는 사람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똑바로 걸어서 기숙사까지 갔다. 칼날이 스친 자국이나 더러운 말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던 자국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방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브리아나 모슬리, 나 남친 있어. 보기 좋게 통통하고 아주 많이 똑똑한 여자애의 가치를 추호도 모르는 얼간이 월시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뜻이야. 또 너는 나를 싫어하겠지만 나는 네가 좋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 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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