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76화 (176/178)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누르며 한참 걸었다. 수명을 다한 물레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가까워질 즈음에 갑자기 촛불이라도 켜진 듯이 주변이 환해졌다. 운명의 물레가 있는 장소에 다다른 탓이었다.

물레와 간이 물레의 잔해들 가운데, 빨간 머리 남자애가 서 있었다. 버려진 밭에 적당히 세운 허수아비처럼 기운 빠진 자세였다. 견디지 못하고 달려가 그를 껴안았더니 기다린 듯 마주 안아 오는 모습이 사뭇 처량했다. 그가 내 어깨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너를 또 잃었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어.”

“하지만 지금 네 앞에 있지. 언제나처럼. 감격스럽지 않아?”

일부러 유쾌한 체를 했다. 화가 잔뜩 난 험프리스 교수 앞에서도 태연했던 나의 소꿉친구가 너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환각 마법도, 임프의 장난도 아니야. 원한다면 만져서 확인해 봐도 좋아.”

그러자 카일은 대담하게도 내 엉덩이를 꼬집었다. 치켜 올라간 입꼬리 근처에 볼우물이 깊었다.

주먹에 안도감과 약간의 짜증을 담아 카일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그는 턱을 움켜쥐고 아파하기 시작했는데, 연기가 아니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왼쪽 턱 밑이 멋지게 부어 있었다. 달튼의 돌주먹이 암만 딱딱하다 한들 거기까지는 아닌 듯했고, 다른 누구한테 맞은 모양이었다.

“에드가는 만났어?”

“만났지. 그 자식이 월시에 이어 소토까지 태워 버렸어. 소토가 드와이어 교수 목조각으로 나를 죽이려고 들었거든.”

“하마터면 세상에서 제일 수치스러운 죽음이 될 뻔했네. 그 턱도 소토 작품이야?”

“아니, 라모스. 얼굴 보자마자 한 대 갈기더니 금화 세 개 주더라. 명색이 나돈 왕자인데 너무 짠 거 아니야?”

과장되게 투덜거리는 카일 덕분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낄낄거리며 그의 주머니를 뒤져 금화 세 개를 꺼냈다. 올해도 카일의 펀칭 부스는 그리폰 크리켓부가 수확의 달 연회에서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중간에 장사를 접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거의 항상 함께 장난을 쳤으므로, 카일의 높은 악명에는 내가 기여한 바가 컸다. 때문에 그가 턱을 희생하여 번 금화 중 세 개쯤은 내게 소유권이 있었다. 그렇게 주장하자 카일은 맞은 까닭이 나이긴 하니 아예 틀려먹은 논리는 아니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그가 덧붙였다.

“기숙사에서 나와서 갈라진 다음에는 못 봤어. 어쨌든 위험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 아주 괴물이던데, 그 자식…. 블로썸은?”

“듣는 시늉도 안 하더라.”

“그럴 줄 알았어.”

최후의 날에, 카일과 나에게는 각자 맡은 업무가 있었다. 그의 업무는 간이 물레로 충분히 시험하여 변수를 줄이는 것이었고, 나의 업무는 블로썸을 설득하여 마녀의 길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물레가 무너질 때 그녀에게 증표들을 건넬 수 있도록 말이다.

블로썸이 내게 고분고분할 확률은 희박했으므로, 카일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계획을 문제없이 수행할 비장의 무기를 마련해 두었다고 했다. 그게 뭔지 너무 궁금했는데, 때가 되면 알려 주겠다고 하기에 여태껏 가만히 있었다.

지금이 때가 아니면 어느 순간도 아닌 거라고 느꼈다.

“비장의 무기가 등장할 차례야.”

몸이 달아 채근하자, 카일은 나를 잠시 보더니 이내 딴소리를 했다. 일단 물레를 돌리기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소 미심쩍었으나 아무튼 물레를 돌리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또한 텍스처 절벽에 둘러싸인 패닝턴, 그러니까 키이스나 불에 타 버린 소토가 한시바삐 안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느리게 돌아가는 물레바퀴의 왼편을 붙잡았다. 카일은 반대편으로 갔다.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힘을 주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망해져서 건너를 슬쩍 보자 카일은 실감개에 기대어 폭소하고 있었다. 열이 확 뻗쳤다.

“야, 뭐 해!”

“아리, 지금 체력 레벨 어느 정도야?”

“9인데. 이그나스의 비늘 차고.”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카일은 검지로 눈물을 닦아 내며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껴 보라고 했다. 체력과 매력, 항마력을 가리키는 상태 창의 숫자가 빛났다. 다음으로는 내 허리에 매달린 가방을 뒤져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를 쥐여 주었다. 매력, 지력, 화술이 올랐다.

원래 회중시계의 영향을 받는 능력치는 화술뿐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쳐다보았더니 카일은 눈웃음을 치며 알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세트 효과야.’ 그러더니 다른 증표도 착용해 보기를 권했다.

성녀 에이레네의 묵주를 손목에 감았다. 지력과 항마력에 변화가 일었다. 마침내 스티아 신의 티아라를 정교하게 꼬인 올림머리에 고정하자 다섯 개 수치 전부 ‘MAX’가 됨과 동시에 황금으로 만든 베일을 둘러쓴 듯 전신이 금색 아우라로 덮였다.

금색 손끝을 갖다 대자 물레바퀴는 싱거우리만치 쉽게 움직였다. 나는 카일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금방 물레를 최초의 상태로 되돌렸다. 제각기 빛나던 운명의 실이 코드 조각이 되어 흩뿌려지는 광경은 너무나 신비해서 마치 밤하늘의 탄생을 보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실 한 올까지 물레를 벗어나니 문득 매우 벅찬 감정이 들었다. 내가 그 감정의 정체- 만족감과 행복, 성취감이 허무감과 함께 뒤섞인 스튜 같은 것-를 파악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와중에 카일이 다가왔다. 그가 수줍게 속삭였다.

“아리엘, 너 무슨 여신 같아. 무지 황홀해.”

“뭐야, 갑자기? 민망하게…. 뭘 잘못 먹은 거야, 잘 못 먹은 거야?”

“진심이야. 이대로 눈을 감고 영영 뜨지 않아서 눈꺼풀에 네 모습만을 새기고 싶을 정도라고.”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다가, 문득 카일이 말하는 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대번에 심각해져서 캐물으려니까 카일은 그답지 않게 삐그덕대며 말을 돌렸다. 플레이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만큼 빨리 마녀의 길을 벗어나 그녀를 찾아야 한다고 내 등을 떠밀어 댔다.

여간 수상한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즉시 카일의 멱살을 쥐었다.

“바른대로 불어, 카일 다미앙 빌라드.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참고로 내 이상형은 솔직한 사람이야.”

잔뜩 으르렁대니 그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는 항복이라도 한다는 듯 양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네 이상형 되기 진짜 까다롭다. 좋아. 솔직해질게. ‘비장의 무기’ 같은 건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어. 내가 네게 블로썸을 데려오라고 시킨 건 걔를 속여 먹어서 우리 대신 물레를 부수게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

“뭐?”

“전에 너한테 보여 준 간이 물레 시험은 죄 엉터리야. 연출이라고. 진짜는 여기에 너부러진 것들이고.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를 시험했지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무수한 마나 코어와 나무 조각을 가리키며, 카일이 말을 흐렸다. 딱 봐도 간이 물레 한두 개로 나올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나는 카일이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가 아니라 ‘모든’ 경우의 수를 시험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의 무기’를 찾지 못했음을. 불현듯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로그아웃 버튼이 활성화되는 건 맞아. 하지만 로그아웃 버튼이 동작하는 건 게임 속에서만이야. 마녀의 길, 터미널은 포함되지 않아. 즉 물레가 파괴될 때 플레이어는 터미널 바깥에 있어야 한다는 거지.”

“…….”

“그러면 왜 굳이 터미널까지 플레이어를 데리고 오길 바랐냐, 단순해. 영원히 가둬 버리기 위해.”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턱을 뚝 떨어뜨리니 카일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터미널도 시스템의 일부야. 시스템이 망가지는 경우 터미널 역시 멀쩡하지 않을 거야. 충분한 시험을 거쳐, 적어도 출입구가 막힐 거라는 사실을 파악했지.”

플레이어의 말처럼 카일과 나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그녀는 아니다. 데이터는 출입구가 막혀도 터미널과 게임 사이를 오갈 수 있지만 플레이어는 불가능할 것이다. 플레이어가 우리의 도움을 받아 게임을 떠나는 데 성공하더라도 추후 돌아와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가둬 버리는 것이 속 편하다. 카일이 장황하게 떠드는 말의 요지는 그거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따위 끔찍하고 지저분한 계획이 내 소꿉친구의 머리통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기 싫었다. 이를 악물고 따지려는 찰나였다.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지. 물레는 내가 부술게. 너는 플레이어에게 증표를 전달하고 탈출시켜. 네가 원하던 대로, 모두를 구하는 거야.”

지나치게 선선한 말투였다. 마치 큰 잘못을 가리기 위해 작은 잘못을 냉큼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해.’ 그의 오른쪽 턱마저 부풀리는 대신 지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돌아와서 해코지할 수도 있다고? 플레이어가 게임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는 사실은 걔의 눈을 삼 초만 봐도 알아.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데 릴루의 젤리라도 걸 수 있다고. 고작 불확실한 가능성이 두려워 플레이어를 영원히 가두려고 했다는 말이야? 영원히 갇히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말도 안 돼. 적어도 내가 봐 온 너는 그렇게 비열한 자식이 아니야.”

“아리엘.”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너 아직 나한테 전부 안 털어놨어. 네가 거짓말하는 모습을 내가 한두 번 본 것 같아?”

카일이 질리지도 않고 답답하게 나오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이번에도 카일은 우리가 가야 하는 길에 놓인 위험이나 어려움을 혼자서 밟아 없애기로 마음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내 발에는 부드러운 흙만이 닿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은 건 카일의 연인이지 신 내지는 애완 동물이 아니었다. 또 그는 페터슨 후작이 아내를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바가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사과 편지가 내 침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더는 머저리처럼 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고, 내게 키를 쥐여 준 건 너야. 이제 와서 내리라 하면 납득할 줄 알았어? 꿈 깨시지. 너도 말했듯이 너에게는 내 선택지를 제한할 권리가 없어. 아무리 네가 내 남친이어도 말이야.”

“…….”

“제발, 카일. 나는 네 곁에서 걷고 싶어. 네 뒤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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