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과 함께 검을 꺼내자 볼턴은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위협하면 기죽어서 모가지라도 닦을 줄 알았나 본데, 1학기 내내 검술 수업에서 붙어 놓고 내가 밟으면 도리어 꿈틀하는 지렁이임을 모르는 것도 신기했다.
“진심이야? 나랑 해 보겠다고? 눈이라도 편하게 감으려면 가만히 있는 게 나을 텐데.”
“네가 빨간 팬티에 지리는 꼴을 못 보고 죽는다면 숨이 끊어져도 눈은 안 감길걸.”
불량배처럼 비열하게 지껄였다. 틈만 나면 천박하네 어쩌네 비난하던 자식이니, 진짜 천박한 게 어떤 건지 맛보여 줄 때도 되었다. 기사 서임도 안 받았는데 기사도 따위 개를 준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볼턴을 놀리기 위해 뽑았던 검을 도로 검집에 넣은 다음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곧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함께 우레 같은 괴성이 귀를 울렸다. 그러고 나서는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검은 용의 날갯짓이 만들어 낸 회오리였다.
“불멸자가 필멸자의 역사에 간섭해서는 안 되지 않나?”
[나 용 아니야. 인간도 아니고. 나는 제이든이야.]
어느새 내 등을 받치고 선 검은 용이 뻔뻔하게 우기자 볼턴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혀를 차며 쥐고 있던 검에 신성력을 흘려 넣자 손끝에서부터 새어 나온 빛이 몸뚱어리를 덮었다.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며 천천히 나부끼는 회색 머리카락은 따뜻한 색이 감도는 신성력의 영향을 받아 백금색으로 보였다. 그가 유행시킨, 무늬 없는 흰색 크라바트도 매한가지였다. 또 연회복에 금실로 수 놓인 고풍스러운 문양은 빛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반짝였는데, 목을 완전히 감싸는 옷깃으로 위화감 없이 이어져 전신에 마법진을 두른 듯했다.
막연히 신성력을 사용하는 마검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빈약한 상상력을 쥐어짜 그렸던 머릿속 그림보다 몇 배는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대고 어중이떠중이나 베었을까 싶은 준기사가 나섰으니 볼턴이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상대가 용이라는 점이었다. 제이든에게 검 같은 건 가락뼈에 걸린 노움 발톱에 불과했다. 또한 날개의 도움을 받지 않을 때도 제이든 스펜서는 밀루아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기사였다.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 분투하였으나, 결국 볼턴은 검은 용의 무자비한 꼬리에 짓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가, 아리엘!]
제이든의 신호에 즉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집요하기 그지없는 신성력을 타고 발치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뛰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마른침과 함께 넘기며 문고리를 붙든 찰나였다.
“달튼!”
문득 불린 이름에 돌아보니 목걸이 비스름한 것이 날아왔다. 무심코 잡아채자 작은 효과음을 동반하며 상태 창에 변화가 일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손아귀를 확인하니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진주를 은실로 꿴 묵주가 나타났다. 끄트머리에는 스티아의 상징 문양을 표현한 은 프레임에 오팔을 가공해 넣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는데, 오팔 속을 헤엄치는 빛의 움직임이 유려했다.
“로즈를… 구해 줘.”
“…….”
“네 특기잖아, 그거.”
왠지 목이 메는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가지가 빠져라 끄덕여 대었다. 그러자 볼턴은 만족한 듯 웃었다. 부러진 안경 너머로 잔뜩 휘어진 청회색 시선에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강한 신뢰가 쏟아졌다.
별안간 강한 중압감이 어깨와 무릎을 내리눌렀다.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비겁하고, 천박한 데다 영웅적인 면모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내가 멋대로 세계를 바꾸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신화시대의 영웅 르네 레베스크와 달리 나는 검만 좀 휘둘러 보았다뿐이지 평범한 귀족가 영애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러면 어때 싶어졌다. 구원할 자격까진 아니어도, 구원을 시도할 자격쯤은 슬라임 푸딩에 환장하고 잘생긴 남자애에 약한 장난꾸러기에게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이제 와서 못 해 먹겠다고 빼기에도 애매했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치고 연회장 문을 젖혔다.
“달튼…! 달튼, 달튼!”
“우와, 완전 열받았네….”
문 너머로 머리통을 내미자마자 천둥 같은 사자후와 함께 유리 조각이나 도자기 화병 비스름한 게 날아왔다.
잽싸게 검을 들어 화병을 쳐 내면서 발치에 떨어지는 유리 조각을 슬쩍 봤다. 납 이음매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담 바틀렛이 애지중지하던 스테인드글라스 초상화 같았다. 불쌍한 마담 바틀렛.
연회복 구울들과 깨진 텍스처 절벽이 점령한 바깥과 달리, 연회장 내부는 평소와 거의 같았다. 공기는 따뜻했고, 달콤한 냄새가 났으며, 커튼이 걷힌 발코니에서는 마법 인형 악단이 부드러운 왈츠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천장에 늘어뜨린 푸른색과 금색 피츠시몬스 깃발 사이로 샹들리에의 수정 장식이 반짝거렸다. 그 아래에는 연회를 즐기는 시늉을 하는 연회복 구울이 열서너 쌍가량 있었는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몰골로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는 모습이 매우 섬뜩했다.
연회장 가장 안쪽, 평소에는 마담 바틀렛이, 사랑의 달 연회 때는 연회의 왕과 여왕이 차지하는 자리에 고개를 깊게 수그린 켈란과, 블로썸으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있었다. 왜 ‘추정되는 여자애’라고 표현했냐면, 걔의 이목구비가 내 기억 속 블로썸과 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눈부신 금발과 요요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은 여전했으나, 눈꼬리의 휘어진 각도나 코가 솟은 정도, 광대뼈와 턱선의 조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막연히 그녀가 ‘주인공’의 탈이 일부 벗겨진 ‘플레이어’임을 짐작했다. 내가 설득해야만 하는.
우선 멀찍이서 켈란의 상태를 파악했다. 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눈에 띄는 외상도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몸을 낮춘 채 난간에 숨어 나선 계단을 내려갔다. 발코니를 지날 때는 마법 인형 악사에게서 빼앗은 콘트라베이스가 엄폐에 도움을 주었다.
“이 비, 빌어 처먹을 게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주인공이 된 너를 죽, 일 수 없다면, 치트로라도 삭제해 버리겠어. 애초에 네가 끼,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나는….”
말하며,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이를 갈았다. 그녀의 잇새에서 빠득 소리가 날 때마다 유리잔이 허공을 가르거나 연회복 구울이 달려들었다. 유리잔은 콘트라베이스가, 연회복 구울은 요사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마한 장난 마법이 막아 주었다.
나는 연어살을 올린 크래커와 코를 톡 쏘는 소스가 올려진 테이블을 짚고 유령 분장에 쓰이는 마법진을 그렸다. 이윽고 식기를 와장창 깨며 빠져나온 테이블보가 두둥실 날아서는 연회복 구울 무리를 덮쳤다. 순식간에 시야를 잃은 구울들이 아우성치는 사이 외쳤다.
“저기, 네 심정은 이해를 하는데,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주면 안 될까!”
“닥쳐! 닥치라구!”
귀를 틀어막은 플레이어가 마구 악을 질렀다. 내가 하는 말은 꿈에서라도 듣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간 찰나였다. 잘 꾸민 인형처럼 플레이어의 곁에 늘어져 있던 켈란이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잔뜩 부르튼 입술이 열리는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아리엘 달튼은….”
“사, 라져, 야 해.”
더듬거나 더듬지 않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완전 똑같았다. 맥마이클스, 혼, 서덜랜드, 오라일리처럼 말이다. 그 스스로조차 의심하며 외로이 저항하던 켈란의 발버둥이 끝내 좌절되고 만 것이다. 그가 게임의 메인 공략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적어, 도, 네가 조, 좋아하는 사람한테 마, 맡겨 줄게.”
플레이어의 입술이 비틀림과 동시에 켈란이 허리춤에서 보석이 박힌 예장용 단검을 꺼내 들었다. 물결 모양의 칼날은 주조된 이래로 검집 이외의 무언가에 닿아 본 적이 없는 듯 성결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발을 물렸다. 연회복 구울이야 페드로 캔트렐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너덧씩 덤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켈란이라면 일대일이어도 엄두가 안 났다.
뒷걸음질로 도망치다가 따라 잡혔다. 달튼의 말괄량이와 일레스티아의 황태자 간 실력 차이를 절실히 가늠하기까지는 세 합이면 충분했다. 분명히 사용 무기 면에서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능한 동작이라고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허겁지겁 막는 것뿐이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등이 벽에 닿았다. 연회장의 끝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턱을 노린 칼날을 가까스로 피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기 깔린 융단을 쥐어 당기자 켈란의 발이 꼬였다.
그가 휘청대는 동안 문을 향해 뛰었다. 그러자 근방을 배회하던 연회복 구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문 앞에 모여 살아 있는 결계를 이루었다.
“안 되지, 비, 비겁하게. 주인공, 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의 목소리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켈란이 나를 없애려고 들고, 내가 필사적으로 피하는 상황을 아주 재미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입술을 감쳐물고 진로를 바꾸었다. 이번에 내 발은 마법 인형 악단에게로 향했다.
마법 인형 악단의 바로 맞은편에 다소 폭이 좁은 계단이 있었다. 계단 위에는 외부인이 참석하는 연회 때만 개방되는 몇 개의 개인실이 있었고, 바깥으로 통하는 발코니가 있었다. 주로 연회에서 눈이 맞은 연인이 낭만을 속삭이기 위해 들르는 곳이었다. 낭만의 필수 요소는 달아오른 볼을 식힐 바람과 아름다운 밤하늘이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발코니까지 갔다. 어떻게 된 게 검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 때보다 발코니 난간에 한 다리를 걸친 지금이 훨씬 무서웠다. 뛰어내리려고 눈을 질끈 감은 찰나 허리를 붙잡혔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뒤 검으로 급소를 막았다. 날과 날이 부딪히는 충격으로 인해 강한 진동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내가 놓친 검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 ‘엿 됐다.’ 그렇게 읊조릴 때 이미 내 손아귀에는 얼얼한 감각만 남은 채였다.
“아리엘, 달튼, 은….”
“알아, 안다고! 사라져 줄게! 그러니까 이거 좀 놓을래?”
나를 거의 부둥켜안은 채 공격을 가하는 켈란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깨를 비틀며 용을 쓰고 발끝에 닿는 정강이를 마구 걷어차도 단단한 몸뚱어리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공격은 요행으로 피했다. 다음 공격과 그다음 공격은 다소 예측 가능하게 들어와서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몇 번이나 고개를 까딱이는 동작을 취했기 때문이다. 의아하다고 생각할 찰나 일말의 미혹도 없는 공격이 날아왔다.
급한 대로 손을 들어 목을 감쌌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검의 궤적이 야속하리만치 깨끗했다. 이를 꽉 문 채 숨을 참았다. 잠시 후 콧잔등에 따뜻한 액체가 뿌려졌다. 훅 끼치는 짙은 비린내에 속이 막 뒤집어졌다. 실은 비린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하…. 이제 정신이 좀 드네.”
“켈란!”
신성력을 씌워 밝은 빛이 나는 칼날 일부는 내 목이 아니라 켈란의 왼쪽 쇄골 바로 아래에 파묻혀 있었다. 그가 찰나 검의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계속… 이렇게 하고 싶었어.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서도 말이야.”
잇새와 가슴팍에서 흐르는 피가 켈란의 금발과 거의 흡사한 상아색 조끼, 광택이 흐르는 흰 셔츠를 삽시간에 끔찍한 색으로 물들였다. ‘켈란, 상처가….’ 아연실색하여 가쁘게 뜨는 숨을 도로 밀어 넣느라고, 나는 겨우 단어 몇 개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상처가, 가슴에, 너무….”
“터미널은 시스템이 설계하지 않은 요소… 즉 버그가 발생할 때마다 열려.”
침착하게 말하는 와중에도 켈란의 조각 같은 얼굴은 점점 본래의 색을 잃어 갔다. 정말로 스티아 신전 어디쯤을 장식하는 대리석 부조처럼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스템이 결코 공략 대상을 죽이지 않는단 사실을 아는 나로서도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죽음이 오지 않더라도 고통은 왔다. 마지막으로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다녀온 이후로 이틀 중 하루는 불에 타는 꿈을 꿨다.
“그를 만나러 가. 그리고 이 저주받은 운명의 굴레를 끊어. 너만이 할 수 있어, 아리… 내가 사랑하는 너만이.”
말을 마치면서, 켈란은 왼 팔뚝에 깊이 꽂힌 칼을 확 비틀어 뽑았다. 그러자 크게 벌어진 상처에서 핏방울과 함께 무수한 문자가 튀어나왔다. 나는 블로썸이 자해 공갈 쇼를 벌였을 때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변수에 대응하여 뱉어 내는 오류 메시지였다.
허공에 아무렇게나 쏟아진 오류 메시지는 곧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것이 눈꺼풀에 달라붙었다고 느낀 다음 순간 내 발은 아득한 어둠을 밟고 있었다. 마녀의 길, 그러니까 ‘터미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