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74화 (174/178)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퇴서를 냈다고 하지 않았어? 게다가, ‘공략 대상’이라니, 네가 그 단어를 어떻게 알아?”

플로렌스 벨 세계에서, 이름 모를 레스토랑 점원은 세계의 이치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 역시도 여러 극단적인 사건의 당사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여태껏 ‘제4의 벽’에 가로막혀 답답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 상식선에서 패닝턴의 반응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당황하여 캐물었더니 패닝턴은 대답 대신 검지를 똑바로 세웠다.

[플레이어의 생체 반응 정지까지 3분 남았습니다.]

덜 자란 남자애의 뼈만 남은 손가락 끝에서, 글자들이 이른 저녁 하늘에 잘못 뜬 별이라도 된 양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에 얼마 남잖은 플레이어의 수명을 담았다가 패닝턴을 보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저걸 볼 수 있지. 그 이유가 뭔지 궁리해 본 적이 있어?”

패닝턴의 말대로, 나나 카일처럼 시스템에 깊이 관여한 경우를 제외하면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아카데미 상공에 벌어진 이변을 인지했다. 엘리자베스와 아나이스, 그리고 브리아나였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블로썸의 실종과 동시에 글자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마탑에 의뢰하여 그것이 뜻하는 바를 분석하고 블로썸을 찾아내자는 아나이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세 사람마저도 더는 글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녀의 길이나 악마 소동 같은 일종의 신비가 아카데미를 찾는 일은 줄곧 있어 왔기 때문이다. 평범한 신비가 아님을 아는 나만이 계속해서 그것에 구애될 뿐이었다.

처음에는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해선 안 되는 모드가 설치되는 바람에 시스템의 코드가 꼬였고, 블로썸이 로그아웃할 수 없게 되었듯이 말이다. 마침 글자를 볼 수 있는 전원이 주어진 운명에서 크게 벗어난 처지였으며 자랑은 아니지만 거기에 내 역할이 지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브레넌 스톡스가 못 끼는 게 이상했다. 약혼자처럼, 그 역시도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곡괭이를 들지 않았을 거다. 곰곰이 고민하다가 무릎을 쳤다. 브리아나와 엘리자베스의 공통점. 엘리자베스와 브레넌의 차이점. 얼핏 비슷해 보이는 연인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의지였다.

엘리자베스는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스스로 광산에 발을 들였다. 반면 브레넌은 엘리자베스를 이기지 못하여 끌려간 것에 가까웠다. 아예 진로를 광산 사업가로 정한 엘리자베스와 달리 브레넌은 사정이 있어 곡괭이질을 했다 뿐이지 여전히 시인이 꿈이었다.

아나이스와 브리아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넬리 준남작의 낭심을 걷어찬 아나이스는 말할 나위가 없었으며, 브리아나는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서 셈을 하는 시련을 겪었을 만큼 진지하게 상단에 속하는 미래를 고려했다.

즉, 자신의 의지로 실을 끊은 사람들. 카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버그 덩어리.

“설마….”

“너 때문에 전하를 모실 수 없게 되어서 낙심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눈이 뜨였지. 고맙기 짝이 없네.”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선 패닝턴에게는 감사 인사를 건네는 순간마저도 비뚤게 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발끈했지만, 그가 여자 손 한 번 안 잡아 본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하고 진정했다.

“나는 네가 아는 것보다 켈란 전하와 가까운 사이야. 애초에 나를 너한테 붙인 것도 전하고. 다치게 한 만큼 보호하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사실상 감시였지. 어차피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면 내가 나설 자리가 없었으니까.”

“켈란이… 그러니까… 1학기부터? 계속? 지금까지?”

“전혀 몰랐냐? 검술 수업 꽁으로 들었네, 이거.”

혀를 차는 패닝턴을 바라보는 내 턱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내가 카일과 어땠는지를 떠올리면 도무지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황하여 잔뜩 뚝딱거리니까 패닝턴은 뒤늦게 방금 나눈 대화의 함의를 눈치챈 듯했다.

이마까지 시뻘게진 패닝턴이 누가 붙어먹는 거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게 더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푹 꺾으니까, 패닝턴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여하튼’을 다섯 번쯤 말해 가까스로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했다.

“그 쌍둥이 왕자도 고전하는 마당에 네가 저 인파를 뚫고 연회장까지 가는 건 불가능해. 육로는 버려야 돼.”

“뭐? 어떻게?”

“항로로 가야지.”

광장을 배회하는 연회복 구울 무리를 가리키던 패닝턴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하늘로 향했다. 이내 주변이 온통 어둑해지는 듯싶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돌바닥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완전히 덮었다. 돌풍에 휩싸인 나뭇잎이 볼을 때리고, 엄청 큰 돛이 펄럭이는 것 같은 소리가 귀를 메울 즈음에 패닝턴이 말하는 ‘항로’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제이든!”

“좋겠어, ‘공략 대상’들은. 과거도 화려하고, 정체도 그럴싸하고.”

패닝턴이 빈정거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든, 검은 용은 광장 주변을 크게 돌면서 착륙할 자리를 찾았다. 다소 변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내 친구들 중 착하기로는 으뜸인 그이니만큼 가능한 연회복 구울들을 깔아뭉개지 않는 방법을 물색하는 듯했다.

마침내 제이든이 택한 장소는 분수대가 있는 곳이었다. 가엾은 돌 조각은 검은 용의 무자비한 발톱 아래 두부처럼 으깨어졌다. 연회복 구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단한 비늘이 촘촘히 박힌 꼬리의 움직임에 와르르 쓸려 나가는 모습이 사뭇 가련할 정도였다. 제이든 나름대로는 힘을 조절하는 듯했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

문득, 패닝턴이 나를 불렀다. 팔을 쭉 뻗고 허리를 숙인 자세를 취한 채였다. 어쩌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받쳐 줄 테니까 밟고 뛰라고 했다.

‘보기에는 말라 보여도, 이게 다 근육이라고.’ 그가 우쭐거렸다.

“여자애를 던지는 것 정도는 식은 수프 마시기야.”

확실히, 평범하게 도약해서는 깨진 텍스처 절벽을 넘어 제이든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다. 또한 제이든은 연회복 구울들을 죽이지 않는 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당장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너는?”

그러자 패닝턴은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파르게 깎인 턱이 툭 떨어졌다. 재미있게도, 얼빠진 표정을 지은 그는 내가 접한 어떤 순간보다 앳되게 보였다.

“멍청아, 배경 인물이 ‘이벤트’에 끼어드는 거 봤냐? 어차피 우리 같은 애들 역할은 주변에서 박수 쳐 주는 거밖에 없단 말이야. 잘 알면서 왜 그래?”

험한 말을 내뱉는 것과 반대로, 그는 콧대에 주름을 잡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엄청 말 안 듣는 사촌 동생 같은 웃음이었다.

대개 그렇게 웃는 꼬마애를 설득할 방법은 전무했다. 하릴없이 고분고분 도움닫기를 준비하기나 했다.

“있잖아, 패닝턴.”

다만 그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뜀박질하기 용이하게끔 검으로 치마의 옆면을 길게 찢어 올리며 다소 충동적으로 지껄였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주인공일 거야. 너도, 나도!”

마지막 음절을 내뱉는 동시에 패닝턴의 팔뚝을 박찼다. 이윽고 세게 밀리는 감각과 함께 몸이 확 떠올랐다.

“키이스!”

공기 중에 무겁게 축적된 마나를 가르며 날아가는 와중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듣자 하니 그건 검은 머리에, 눈 밑이 푸르죽죽하고, 비쩍 마른 데다가 새 흉내를 더럽게 못 내는 남자애의 외침이었다.

“키이스야, 내 이름! 제임스 패닝턴도, 제레미야 마이어도, 베티도 아닌, 키이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찼다. 나는 깨진 텍스처 절벽의 반대편에 도달하자마자 키이스를 돌아보았다.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과장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눈에 담고 나서 검은 용을 향해 달렸다. 두툼한 발등에 와글와글 매달린 연회복 구울을 잡아 뜯고, 검집으로 두들겨 팬 다음 제이든의 등에 올라타기까지 내 혀끝에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

***

검은 용이 꼬리로 착륙장을 정리하는 사이 그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코르셋을 과하게 조인 스태포드 교수와, 예식용 더블릿의 어깨를 왕창 부풀린 모나한 교수를 끈적이 슬라임으로 무력화하고 나니 연회장이 코앞이었다.

연회장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는 시스템에 지배되지 않은 맨정신으로 ‘아리엘 달튼은 사라져야 해’라고 말할 법한 얼마 안 되는 자식이었다. 간만에 만나서인지, 조금 전까지 험담을 한 까닭인지, 아니면 내가 접한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인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고 느꼈다.

혹은 슬쩍 보이는 그의 소매와 바짓단 안쪽이 온통 붕대투성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나돈은 로즈마리 왕비에게 호되게 당한 볼턴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묘사했는데, 거기까진 아니어도 얼추 숨만 붙여 놓은 상태는 맞는 듯했다.

“네가 여기까지 오지 않기를 빌었어. 네 목을 조를 때, 정말이지… 끝내주게 역겨운 기분이었거든.”

“내 소멸을 바란다는 말을 우아하게도 하는구나.”

심드렁하게 비꼬았더니 볼턴은 하나도 안 웃긴 표정으로 대강 웃었다.

“너는 내 친구야. 심지어 내가 꽤 좋아하는 친구지.”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만지작대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로즈는 그녀가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한다고 해. 친구의 목숨은 내게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만 한 가치가 없고. 미안하지만 말이야.”

“이거 아주 숙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글러 먹었네. 본 교관은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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